< 134. 뒤섞기(1) >
연은 새로 보강된 무장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던 중, 서맥 요새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이곳까지 3달이나 걸렸구나.'
일전에 무장열차가 오면서 닦아 놓은 길이 있기에 약 7,000km나 되는 길을 빠르게 올 수 있었지만, 오는 도중 만나는 요새마다 들려 점검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광산과 제철소가 있는 무수 요새에서 시간을 많이 소요됐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거쳐 간 무수 요새.
이제 인구 5만 명이 넘게 사는 도시가 되었다.
주변에 버려지다시피 널려 있는 초원은 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개간되었고, 요새 주변은 새로 지은 집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서맥 요새였다.
예맥의 땅을 약탈하던 코사크 용병들의 요새가 있었던 이곳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놀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원래부터 무역 도시로 개발하고자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굽이굽이 흐르는 서맥강을 따라 농지가 개간되어 있었고, 요새 남쪽에는 대단위 정유시설이 건설 중이었다.
'수십만 명 동원했다고 하는데···, 못할 것이 없구나.'
이번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동원해 서맥강 변에 둑을 쌓고, 수로를 파고, 농지를 개간하고, 집을 짓고,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연이 놀라며 감탄하는 가운데 조선군 제17사단장 걸웅이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파비와 무굴제국 포로들은 바르샤바와 모스크바로 가는 도로와 철길을 만드는 데 투입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대붕에서 세밀한 작전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시키는 일만 잘하는 것도 대단한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연은 걸웅이의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맥 요새의 사령관이었던 기수가 바르샤바로 떠나자 걸웅이가 대신 요새를 맡았다.
그러면서 모든 일을 지휘 감독했다.
서맥 요새에서 바르샤바까지 길을 내면서 동시에 모스크바로 가는 길도 닦고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약 1,400km.
콘크리트 포장을 하지 않았다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걸웅이는 그것을 해냈다.
서맥 요새에서 바르샤바나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이 평지라 하지만, 폭 푹 빠지는 진창이나 다름없는 초원지대다.
그런 길에 자갈을 깔고 모래로 덮어 기초 공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석재를 얻을 수 있는 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걸웅이는 풍부한 석유를 이용해 진흙을 구워 자갈 대용으로 썼다.
동글동글한 벽돌을 만들어 바닥에 깔고 그 사이로 모래를 넣어 도로의 기초 공사를 한 것이다.
또한 광식이가 만들어준 아스팔트 용액을 뿌렸다,
검은색으로 쭉 나 있는 반듯한 길을 보고 연은 다시 한번 걸웅이를 칭찬했다.
"보기 좋구나. 정말 잘했다. 장하구나!"
연구원들만 들었다는 장하다는 칭찬에 걸웅이의 우람한 어깨 근육이 실룩거렸다.
"10일 후 면 모스크바까지 흑(黑)길이 완성된다고 하니 금방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전까지 이곳에서 편히 지내십시오."
"알겠다. 그런데 저곳은 뭐냐?"
연은 서맥 강 너머 거대한 마을이 형성된 것을 보고 의아한지 물었다.
아무리 봐도 수십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묵었던 곳은 아니었다.
"교반 작전 2단계인 뒤섞기의 일환으로 지어 놓은 마을입니다. 벌써부터 사파비 사람들은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굴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벌써 가족들이 와서 산다는 말이냐?"
"네, 사장님. 복돌 부장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은진이가 내놓은 작전명 교반의 첫 번째 단계는 오스만과 합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뭉친 유럽이 싸우게 만드는 거다.
다음으로 두 번째 단계는 앞으로 조선 사람이 될 포로들을 서로 섞어 놓는 일이다.
남쪽에서 온 사파비-무굴제국 동맹군 포로들은 서쪽과 북쪽으로 보내고 있다.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포로들은 동쪽 사마르칸트로 보낸 후 다시 몽골 초원으로 보낼 계획이다.
한때 비단길 서쪽 입구의 관문이었던 사마르칸트.
천산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제랍샨강이 있기에 드넓은 곡창지대가 주변에 널려 있지만,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쇠퇴해 버렸다.
'빌어먹을 오스만 놈들 때문이지.'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는 오스만 제국이 교역을 가로막자 배를 이용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교반 작전으로 다시 번성하고 있었다.
아무튼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포로들과 가족들은 사마르칸트에 모여 살면서 예맥남로를 개설하고 있었다.
또한 원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며 어울려 살고 있었다.
"불만은 없더냐?"
"불만이라뇨?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되려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자신들이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생소한 곳으로 끌려 온 포로들은 노예로 팔려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구역을 한정해 놓고 벗어나지만 않으면 간섭하지도 않았다.
물론 도주하면 즉시 총살당했다.
집을 짓고 도로와 철길 만드는 일을 시켰다.
그러면서 매일 2문씩 임금을 주었다.
그러자 포로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돈을 보낼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이건 기회지! 돈을 벌 수 있다니, 이리나에게 청혼할 수 있겠어.'
병사로 끌려와 전쟁에 참여했던 이유는 돈이었다.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다는 조선을 치고 돈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나섰다.
하지만 전쟁에서 졌다.
비참한 포로 신세가 되어 언제 노예로 팔려 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일을 시키고 돈을 주다니.
이건 기회였다.
포로들은 혹시라도 잘릴까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가족들이 몰려왔다.
'이리나!'
'빅토르!'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던 두 사람은 조촐한 혼례를 올리고 포로들이 지은 집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던 걸웅이가 연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사장님, 문제가 있습니다."
"응? 무슨 문제 말이냐?"
"대원들은 군기가 확실해서 문제가 없는데 조선군 병사들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무슨 사고를 친다는 말이냐? 듣지 못했는데?"
포로들과 가족들이 만나 행복하게 모여 사는 모습을 보고 은근슬쩍 그들 사이로 끼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이 있었다.
"그건 잘된 일이다. 그러니 혼내지 말고, 아니 적극 장려하도록 해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느냐? 모두 조선의 백성이 될 사람들 아니냐?"
"그, 그러긴 합니다."
사실 걸웅이도 마음에 두고 있는 우크라이나 처자가 있었다.
자신의 수발을 들어 주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민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라. 특히 여인들을 희롱하거나 겁탈하면 광산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로부터 내려온 군법은 엄중했다.
공로가 있기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었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광산으로 끌려갔다.
그랬기에 포로 중 대항하거나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처벌했지만, 그것 말고는 언제나 정중하게 행동하는 게 조선군이었다.
그래서인지 포로들을 찾아온 가족 중 젊은 처자들 눈에는 조선군이야말로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그렇게 말이야. 조선인은 여자와 아이에게 손찌검하지 않는다며?'
'맞아! 나도 들었어.'
'어디서?'
'마을 광장에 게시판이 있잖아.'
'너, 조선 문자를 알아?'
'아니, 다른 사람이 읽어 줬어.'
'그래? 다른 내용은 없었어?'
관공서라 말하는 조선 관리들이 일하는 곳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광장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광장 곳곳에 세워진 게시판.
매일 같이 새로운 내용이 붙었다.
그런데 게시판에 쓰여있는 글은 모두 한글이었다.
조선말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가 모두 한글로 쓰여 있었다.
따라서 한글만 깨우친다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음···, 뭐더라? 맞아! 그 누구라도 타인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면 바로 신고하라는 내용도 있었어.'
'정말?'
'응, 정말이야.'
'와···! 이젠 아버지에게 맞지 않아도 되겠다.'
'설마 아버지를 신고하려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차갑게 표정이 변한 나탈리아는 치마를 들어 올려 피멍이 든 허벅지를 보여 줬다.
또한 소매도 걷어붙였다.
'이런···, 네가 뭘 잘못했다고?'
'아침밥을 좀 늦게 차려 줬다고 이렇게 때리지 뭐야.'
나탈리아는 몽둥이로 얻어맞은 일이 생각났는지 흠칫거렸다.
'난 꼭 조선인과 결혼할 거야.'
'나도.'
절대적인 남성 중심의 중세 기독교 문화.
여인이란 노예나 다름없었다.
평등을 말하는 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게 인간이기에 힘없는 여성과 노약자들의 인권 따위는 무시했다.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유럽의 중세 시대.
르네상스와 종교계획이 시작되면서 조금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문화는 달랐다.
'너 그거 알아? 조선에서는 부부끼리도 서로 존댓말을 한다고 해.'
'존댓말? 그게 뭐야?'
'음···.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는데, 조선말에는 높이 부르는 말이 있데.'
'귀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런 존칭 말고, 아무튼 있데.'
'그래?'
'응, 그래서 조선말을 가르치는 곳을 가볼까 해.'
'그런 곳도 있어?'
'너 마을 광장에 가봤어?'
'당연하지.'
'그곳 한쪽에 짓고 있는 큰 건물이 조선말과 글을 가르치는···, 뭐라더라? 맞아 초등학교라 했어.'
'초등학교?'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래. 그것도 무료로.'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어? 내가 아무리 집에서 천덕꾸러기라지만 너까지 나에게 이러면 안 돼.'
나탈리아는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공짜라니.
그런 건 교회에서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내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니. 게시판에 쓰인 글을 읽어 준 사람이 진짜라고 했어. 나도 정오에 밥까지 준다고 말하길래 믿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웃으며 그러더라.'
'뭐, 뭐라고 했는데.'
'믿는 자에 복이 있다고.'
'그래? 믿는 자에 복이···?'
어디선가 분명 들어 본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선 들은 말인지 생각해 내지 못한 나탈리아는 마을 광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전쟁터에 나가 죽은 줄만 알았던 오빠.
그런데 돈을 벌고 있다는 오빠의 편지가 왔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오라는 말에 굶주리고 있던 가족 전체가 머나먼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천국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성질이 불같은 아버지의 매질만 아니라면 굶을 걱정이 없는 이곳은 정말 천국이었다.
'그래! 조선인과 결혼하려면 조선말부터 배워야 해.'
나탈리아는 아직 초등학교가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시간만 나면 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게 그을렸지만, 늠름한 조선 병사를 만나 혼례를 올렸다.
남편의 친구들은 짓궂었지만, 하나같이 예의 바르게 나탈리아를 대했다.
이름까지 나순이로 바꾼 나탈리아는 언제나 정중하게 대하며 때리지 않는 남편의 이야기를 자랑삼아 퍼트렸다.
소문이 나자 마을 광장에는 과년한 처자들과 조선군 병사들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사마르칸트를 관리하던 관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한양에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가 없었기에 처벌도 홍보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걸웅이가 연에게 물었던 거다.
교반 작전 2단계 시행령이 떨어지기 전의 일이라 난감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은 도로가 완공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볼가강 때문에 잠시 지체했지만, 1,500km 나 되는 먼 길을 3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리만 건설되면 이틀이면 충분하겠군.'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장열차를 타고 가야 했기에 한강보다 더 넓은 볼가강을 어렵게 건넜다.
나무로 만든 거대한 부선(바지선)으로 무장열차를 옮겨 싣고 강을 건너는 일은 정말 위험했다.
연이 모스크바 성에 다다랐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현수가 마중 나와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장님."
"아니다. 길을 잘 닦아 놓아서 편하게 왔다."
새로 만든 무장열차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중 통고무로 된 바퀴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어 전보다 가벼워졌고 충격 흡수까지 해냈다.
묵중한 무장열차는 아스팔트로 칠해진 흑길을 따라 시속 50km가 넘는 속도로 이동했다.
그런 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주저앉은 흑길 몇 곳이 있었지만, 바퀴가 많이 달린 무장열차가 지나가기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왕궁으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다. 그곳으로 가자."
"네, 사장님."
현수를 따라 무장열차는 모스크바 성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이곳이냐?"
"네, 사장님. 놈이 떠날 때 모든 것을 파괴해 놓았습니다."
"흐음···."
길게 늘어선 건물 곳곳에 불탄 흔적이 남아있었다.
현수는 연을 안내하면서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저기 보이는 곳을 제철소로 썼던 것 같습니다."
"화약으로 폭발시킨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사장님. 조사한 바로는 놈이 떠난 후에 이곳에서 폭발과 함께 큰불이 났다고 합니다."
"흔적을 지우려 한 거겠지."
"그래 보입니다."
연은 곳곳에 떨어진 파편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폈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수가 연의 마음을 알고 먼저 입을 뗐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걱정되어 광식이가 보내준 공돌이 장인에게 조사하게 했습니다. 다행히 정밀 가공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흐음···."
그동안 걱정했던 일이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당도하자마자 서둘러 이곳부터 들렀다.
하지만 이곳에 지어진 건물들의 형태를 보니 틀림없이 대량 생산체계를 예상한 거였다.
'도대체 넌 누구냐?'
주변을 둘러본 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