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뒤흔들기(1) - 지도 >
'이대로 안주하기에는 좋지 않아.'
예맥해까지 진출한 연은 더는 서쪽을 넘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물러난다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연은 입을 열었다.
"통신이 없다면 다스릴 수 없겠지만, 통신과 철도만 연결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습니다. 사장님.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 어떤 생각인지 듣고 싶구나."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은진이라 연은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은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시봉을 들고 작전판 위를 가리켰다.
"사장님께서는 이 모든 영토를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통치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은진이의 말에 모두 놀랐다.
연의 말에 토를 다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이처럼 반박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진이는 스웨덴 지역을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이곳까지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유는?"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분이라···, 무슨 명분 말이냐? 스웨덴은 우리와 접촉조차 하지 않은 곳 아니냐?"
"사장님. 명분을 얻으시면 됩니다. 스웨덴의 정당한 계승자인 얀 2세로부터 권리를 받으시면 됩니다."
"그를 풀어주잔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흐음···."
연은 이번 전쟁에 개입한 왕은 그 누구도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은진이의 생각은 달랐다.
"얀 2세를 죽이는 건 조선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에게 권리를 넘겨받고 스웨덴을 얻으면 조선은 예맥 대륙 북방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은진이는 지시봉으로 작전판 위에 그려진 유럽과 아시아 대륙 북쪽을 쭉 그었다.
"이처럼 예맥 대륙 북방 영토를 모두 차지하게 되면 관리하는데 더 좋습니다. 또한 이곳 발트해를 온전한 조선의 바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넘겼다.
그러면서 은진이와 작전판에 그려진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다른 이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만큼 은진이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은 명분 없이는 타국을 침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분이 있으면 됩니다. 명분을 얻고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데도 물러선다면 비웃으며 도발할지도 모릅니다."
"음···."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히 보이면 만만하게 생각하는 게 사람이지.'
선의로 양보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따라서 명분이 있을 때 이곳까지 조선의 영토로 만드셨으면 합니다."
"그런 후?"
"관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연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건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이곳까지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신다고 해도 단계적으로 넓혀가면 됩니다."
"그래?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네, 사장님."
은진이는 조서원의 요원들로부터 수시로 정보를 받고 정리하다 보니 유럽의 정세뿐만 아니라 문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생각한 통치 방법은 점진적 중앙 집권제였다.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들을 모두 처형하고 그곳에 조선의 관리를 파견하여 맡게 하는 겁니다."
"총독을 파견하자는 말이지."
"네, 사장님. 에스파냐 제국이 아메리카라는 대륙을 점령하고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명분이 있으니까요."
은진이가 생각한 점진적 중앙 집권제는 식민 통치와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수탈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곳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을 조선의 영토로 선포하시고 그곳의 귀족들을 처형하신 후에 사파비 제국처럼 세금을 10년 동안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따를 거로 생각합니다."
"음···."
연은 다시 작전판을 보며 생각에 잠시 잠겼다.
"은진아?"
"네, 사장님."
"네가 생각하는 데로 진행된다고 해도 이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연은 작전판에서 스웨덴 서쪽에 있는 노르웨이가 눈에 거슬렸다.
"그건 사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전?"
"네, 사장님. 원래 이곳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세 나라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이라고 하나였습니다. 남쪽 한자(Hansa)동맹을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다?"
"네, 사장님."
"그러면 우리가 스웨덴을 차지해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 아니냐?"
"하게 만들면 됩니다. 스웨덴이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면 노르웨이나 덴마크는 불안해할 겁니다."
"불안한 곳에 불을 지피자는 거냐?"
"맞습니다. 사장님. 그래서 귀족들을 처형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연은 은진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천부적인 전략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을 처형하자고 했을 때도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르웨이와 덴마크까지 노리고 한 말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남쪽에서 반말이 심할 것 같은데?"
"그건 오스만 제국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스만?"
"네, 사장님. 오스만 제국은 망해버린 사파비 제국을 노리고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우리 조선이 확보한 사파비 제국으로 발을 딛는다면 조선은 그들을 칠 수 있는 명분이 생깁니다."
"그건 무리인 것 같은데?"
"꼭 치자는 건 아닙니다. 명분을 챙기고 무기를 파시면 됩니다."
"수석총을 팔자는 말이냐?"
"네, 사장님. 이번에 들어간 전쟁 비용은 그것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괜찮은 방법 같구나."
연과 은진이의 대화 내용을 들고 있던 다른 이들은 뭔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은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불필요한 내용을 아예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금함을 참지 못한 은쌍식이 끼어들었다.
"사장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설마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겠다는 말씀인지요?"
"그건 아니다. 확보한 땅을 관리하는 일이 먼저다."
"그럼 무슨 말씀이신지요? 궁금해 죽겠습니다."
연은 답답해하는 은쌍식을 보고 씩 웃었다.
혼인해서 아들도 있는 은쌍식이지만, 연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치솟았다.
하지만 중요한 자리라 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우리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점령했을 때 이곳 서쪽과 남쪽에 흩어져 있는 나라들이 우리에게 대항할 거로 예상된다."
"네?"
은쌍식은 믿지 못하겠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 모두와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 않으냐?"
"사장님, 그런데 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왜 그들을 전부 죽여야만 합니까? 그냥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은쌍식은 사파비 제국을 점령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주민들의 반응이 좋다는 보고를 받았다.
바로 세금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설사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 죽여야 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이라고 아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이라 말하는 서쪽과 오스만 제국이 종교 문제로 서로 전쟁을 벌였다."
"아···, 그것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은쌍식도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을 은진이가 집에서 처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톨릭이라는 종교로 묶여있기에 우리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점령하면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것 같다."
"지들이 두고 보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명분은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종교 문제가 끼어들면 명분이란 필요가 없게 된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서 오스만을 이용하자는 것이군요."
"맞다 원래부터 싸우던 놈들이니 우리가 양쪽에 총을 팔고 더 싸우라고 부추기자는 것이 은진이가 말한 내용이다."
연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곱디고운 은진이를 보고 몸을 살짝 떨었다.
'우리 편인 게 정말 다행이구나.'
'조서원의 원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네.'
'어쩐지 원장님 말이라면 사장님께서 진지하게 듣는 이유가 있었구나.'
모두가 은진이를 보며 감탄하는 가운데 은쌍식이 또 물었다.
"그럼 루스 차르국도 문제가 될 것 아닙니까?"
"그곳은 가톨릭이 아니라 상관없다."
"네?"
"사파비와 오스만도 같은 종교지만 싸웠지 않으냐?"
"아···, 네. 뭔 말인지 알겠습니다."
연은 모두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당부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우리 조선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대원이나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절대 답 없는 종교 문제는 끼어들지 말라고 전해라. 끼어들어봤자 좋은 꼴을 볼 수 없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선식이가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수시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종교 문제였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조선의 영토.
더 큰 꿈을 품고 새로운 개척지로 나서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랬기에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교육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방송공사에서 알려드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듯이 종교 또한 모두 다릅니다.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듯이 종교가 다르다고 잘못됐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건 싸우자는 것이니 서로 존중하는 조선인이 됩시다. 이상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선식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7시 방송이 끝나는 시간이면 선식이는 이와 같은 말을 하고 방송을 마쳤다.
처음엔 '행복(幸福, Happiness)'이란 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자주 듣다 보니 좋은 것인 줄 알게 되었다.
'복(福)'자가 들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한 거다.
그래서인지 '행복하세요'란 말이 '밥은 먹었소'란 인사말을 대신하게 되었다.
* * *
대붕의 명령이 떨어지자, 얀 2세는 풀려났다.
조선전력공사 기병대 사령관인 기수는 얀 2세를 보내기 전에 따로 만났다.
"그대가 협조해 준 것을 우리 대왕께서 만족하셨소. 그래서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오."
"무슨 제안인지 말해 주시오."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얀 2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제안인지 모르지만, 좋은 것이기를 바라며.
"실레시아로 간다고 들었소."
"그렇소. 돈만 넉넉하다면 비엔나(Vienna)로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모두 야코프 그놈 때문이요."
얀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진 게 별로 없었다.
야코프에게 머스킷을 사들이고 조선을 치려 전쟁을 준비하면서 가진 재산을 모두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얀 2세는 처참하게 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망가지 못했다.
조선과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떼돈을 벌 수 있었겠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고자 하오."
"그게 무엇이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얀 2세의 표정이 돌변했다.
조선에서 자기를 밀어준다면 골치 아픈 왕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빈에서 화려한 생활을 영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석총이 좋다는 건 들어 봤소?"
"설마···?"
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조선의 수석총 거래를 맡기고 싶다고 하셨소."
얀 2세는 침을 꿀꺽 삼기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처럼 좋은 조건이라면 틀림없이 뭔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면 되오?"
"별거 없소. 우린 그대가 넘겨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을 고맙게 받겠소. 그 와중에 남아 있는 귀족들을 모두 쫓아낼 생각이오."
"그거야···."
"맞소. 그대가 상관할 일은 아니오. 하지만 반항하는 귀족이 있다면 모두 처형할 생각이기에 그대의 정치력을 사고자 하오."
"흐음···."
얀 2세는 욕심이 났다.
그것도 엄청나게.
자신이 당해봐서 알지만, 무기 판매는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구매자가 있어야 팔 수 있는 것 아닌가.
뭔가 고심에 빠진 얀 2세를 보고 기수가 슬쩍 말을 던졌다.
"오스만에서 헝가리를 공격할 생각인가 보오."
"뭐, 뭐라고 하셨소?"
"우리에게 막대한 양의 수석총 판매를 요청해 왔소."
"그렇다면···!"
"맞소, 그대에게 부를 안겨줄 기회가 온 거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사실인 것처럼 기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얀 2세는 온몸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기회야! 꼭 잡아야 해. 빌어먹을 놈들의 비유를 맞추면서 고생할 필요 없지.'
거의 전부라 할 정도로 유럽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권력을 쥐고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다.
더 넓은 영지를 확보하고 세금을 걷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정치적으로도 목에 힘을 줄 수 있으니.
전쟁을 준비하느라 국고는 언제나 바닥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은 돈 없는 왕은 인정조차 하지 않았고, 심할 경우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런 빌어먹을 곳을 떠나 언제나 화려한 빈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천국의 삶이 아니겠는가.
"하겠소! 내가 맡아서 할 것이니 나에게만 지원해 준다고 약조해 주시오."
얀 2세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하지만 조선이 배신할까 두려웠다.
"걱정하지 마시오. 조선은 신의를 지키는 나라라는 걸 잘 알 것이요."
"그럼요. 당연히 알지요."
얀 2세는 소릴 내어 크게 웃었다.
자신의 다스렸던 나라를 잃어버리고,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 여왕이 통치하고 있는 스웨덴까지 넘겼지만, 찬란한 미래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