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응징(14) >
현수와 마주한 모스크바 시민 대표는 긴장했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힘을 내어 남아 있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눈을 똑바로 뜨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서양의 풍습은 조선과 달리 높은 이를 대할 때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덩치가 좋은 젊은 장군은 이곳에 조선군을 이끌고 온 최고 지휘자라 말을 들었다.
그런 고귀한 이가 자신을 보더니 씨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찌 용기를 내셨소?"
"···그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오."
현수는 말하기 힘들어하는 시민 대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게 끝 생각이 없던 현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선군 총사령관께서 말씀하셨소."
"네? 어떤···."
"그대들이 잡은 그대들의 왕을 그대들이 처리하라고 하셨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직접 처형해도 좋다고 하셨소."
"그래도 됩니까?"
"안될 게 뭐가 있겠소.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시민 대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알렉세이 차르를 사로잡아 데리고 왔지만, 조선군이 그를 놓아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기에 그냥 불태워 죽여버리고 끝내자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래도 시민 대표는 조선군을 한번 믿어 보자고 했다.
반대가 심했지만, 단 한마디로 의견을 모았다.
'그럼! 누가 차르를 죽이겠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태를 진정시킨 시민 대표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봤다.
이미 폭동을 일으켰기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떠올리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직접 처형하라고 했다.
그것도 뒤를 감당해준다고 하면서.
시민 대표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살아날 길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시민 대표는 현수를 보고 연신 굽신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화형은 안 되오."
"네?"
"조선에서는 화형이 금지되어 있소."
"그럼 어떻게···?"
"조선에서는 극악무도한 자는 돌로 쳐 죽이오. 따라서 그대들이 잡은 왕과 귀족들이 극악무도하다고 생각한다면 돌로 쳐죽이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시민 대표의 말에 따라 모스크바 성 앞으로 이동했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알렉세이 차르와 그를 따르던 귀족들을 묶었다.
그러는 동안 술에서 깬 알렉세이 차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에게 다가가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자신들을 합법적인 농노로 만든 알렉세이 차르.
그와 달리 조선에서는 농노라 할지라도 군에 입대하면 평민이 된다고 했다.
'이러니 루스 차르국이 망할 수밖에 없지.'
시민 대표는 지배하고 약탈만 일삼는 차르보다 조선의 왕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죽는 줄만 알았다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쟁터로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라도 나의 호아킨도 살아 있을 수도 있어···.'
루스 차르국이 조선을 치려고 벌인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시민 대표는 삶의 희망을 놓았다.
병으로 아내가 죽고 오직 하나뿐인 아들만 보고 살아왔는데 아들이 죽었다면 희망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군은 살아남은 루스 차르국 병사들에게 일을 시키겠다고 했다.
그들을 노예로 팔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찌 됐든 죗값은 치러야 했기 때문이라 했다.
더구나 일을 시키고 임금을 준다고 했다.
원하면 가족에게 대신 주겠다고 했으니 믿어 보기로 했다.
"자···!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시민 대표는 몇 번이나 외친 끝에 알렉세이 차르와 귀족들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번에 저기 있는 자기밖에 모르는 차르와 귀족들이 조선을 침략했소."
시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왕과 귀족들이 벌인 전쟁이지만,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전쟁에서 지게 되면, 진 나라의 사람들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 전쟁으로 죽은 자식도 있지만 산 사람이 더 많다고 하오."
그 말에도 시민들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에서 진 병사들은 노예로 팔려 갈 게 아닌가.
"그런데 조선에서 저에게 약속했소. 포로로 잡혀간 우리의 자식들을 노예로 팔지 않고 일을 시키겠다고 했소. 또한 일한 만큼 임금도 준다고 했소."
시민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야유가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린 하지 마시오!"
"맞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돈을 받아먹었소? 아니면 관리라도 시켜 준다는 말에 속은 거요?"
시민들은 시민 대표의 말을 믿지 않았다.
비록 조선군이 먹을 것을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노예로 부려 먹기 위해 그런 거로 생각했다.
당연했다.
지금 세상은 그런 세상이니.
하지만 시민들의 항의에도 시민 대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양손을 높이 들어 시민들을 진정시켰다.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생각이니 따지지 않겠소. 하지만 우린 더는 떨어질 곳이 없소. 그러니 한번 믿어 봅시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소."
시민 대표의 말에 시민들은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정말 조선군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아니야!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잖아?'
'틀림없어! 안톤이 뭔가를 받은 거야. 조선군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어.'
시민들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안톤이 목청껏 다시 외쳤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소!"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주고 다시 외쳤다.
"우리에게 뭐가 있소? 우린 어차피 농노일 뿐이오!"
가진 게 없다는 말에 시민들의 반응이 변했다.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믿는다고 손해 볼 것이 있겠는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질긴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우리를 농노로 만든 저 차르를 죽이고 조선을 따를 생각이오. 당신들의 생각이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저놈과 저놈을 따르면서 우릴 착취한 귀족 놈들을 죽입시다!"
귀족을 죽이자는 말에 시민들은 움츠러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묶어 놓고 욕을 하고 침을 뱉었지만, 죽이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시 풀려나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죽이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뒷감당은 조선군이 해준다고 했으니 돌을 들어 쳐 죽입시다!"
"정말이오?"
안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앞으로 나가 땅에서 돌을 골라 알렉세이 차르를 향해 집어 던졌다.
"죽어라! 이 악마 같은 놈아!"
루스 차르국 시민으로 태어나서 한때는 좋았다.
하지만 지속된 전쟁으로 삶은 갈수록 힘들어져만 갔다.
거기다 이제 막 15살이 된 아들까지 빼앗아 갔다.
아들 호아킨이 죽었는지 살아는 지 모르지만, 안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흙 채 움켜쥐고 집어 던졌다.
"""죽이자!"""
안톤의 행동에 군중심리가 작동했는지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찾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돌을 찾지 못한 이들은 흙을 뭉쳐서라도 집어 던졌다.
선왕의 치세를 부러워했던 알렉세이 차르는 모스크바 시민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를 따랐던 귀족들과 함께.
그 소식은 발이 달린 것처럼 루스 차르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귀족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졌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차르를 죽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왕을 죽인단 말인가.
놀란 귀족들은 즉시 가산을 챙겨 도주하기 시작했다.
왕도 죽였는데 귀족인 자신들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 같았다.
귀족들은 영토를 두고 다투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서맥 요새를 정리한 기수가 이끄는 기병대가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수 또한 조선군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람들에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원 역사대로라면 2년 후인 1655년.
루스 차르국이 빌뉴스를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면서 주민들을 학살했을 것이니.
* * *
유럽 전체가 떠들썩했다.
조선군이 루스 차르국을 붕괴시켰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사파비 제국 수도인 이스파한을 점령한 조선전력공사 제2사단도 움직였다.
서맥 요새에서 지원 온 예맥 기병대를 돌려보낸 사단장 신수는 사파비 제국 전역으로 대원들을 보냈다.
신수의 명령을 받은 제2연대 연대장 명득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 중 하나인 하마단(Hamedan)으로 대원들을 이끌고 진격했다.
가는 도중에 들린 마을에서 명득이는 공포했다.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사람들은 그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무섭고 강력하다는 조선군이 쳐들어왔지만, 그 어떤 행패도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니.
틀림없이 알라께서 보내신 천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명득이가 하마단에 도착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명득이가 이끄는 제2연대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하마단에 입성했다.
그는 넓은 광장에 성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까지 조선군이 오면서 했던 일들이 소문났는지 주민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곳은 앞으로 대조선이 관리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10년 동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또한···."
"누구 맘대로 그런 소릴 하시오!"
겁도 없는지 화려한 페르시아 복장을 한 이가 명득이의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칼과 창 그리고 방패를 든 자들은 그를 호위하고 있었지만, 두려운지 눈동자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와 반대로 말을 꺼낸 지는 당당했다.
"넌 누구냐?"
"난, 이곳 하마단의 셰이크이자 세금징수권자인 자카리야 이븐 알아사드요."
"그런데?"
"그런 데라니? 내가 이곳의 세이크이자 세금징수권자란 말이오."
"누가 너에게 그런 권한을 줬지?"
"위대하신 아···압."
그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압바스 2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명득이는 그런 그를 보고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 모습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었는지 그자는 길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위대하신 알라의 뜻을 받았소. 다시 말해 내가 바로 신의 대행자이자 신의 뜻을 받은 이곳의 세이크이자 신의 허락으로 세금을 징수한 권한을 가진 신의 ······란 말이오."
자카리야가 너무 길게 자신을 표현했기에 통역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번역해서 전했다.
"자기가 신이라고 합니다."
"뭐?!"
-탕! 탕! 탕!
통역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연대장인 명득이의 허락도 받지 않고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명득이 또한 권총을 꺼내 쓰러지는 자카리야의 머리를 겨냥해 총알을 날렸다.
-탕!
조선군 최고사령관인 사장님이 자신을 신이라 말하는 자는 일단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보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총알을 맞고 허망하게 죽어 버린 자카리야.
성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명득이는 자카리야를 보며 침을 뱉었다.
"어디서 감히 신을 팔아! 내가 종교는 없지만, 신을 모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켜 보고 있던 통역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떨고 있었다.
길게 말하기 싫어서 간단히 번역해 말했는데 그 때문에 하마단의 실력자가 죽어버렸다.
물론 실력자를 죽이는 건 문제 될 것이 없다.
조선군은 몸값을 받으려고 귀족들을 살려두고 그러지 않았으니.
하지만 거짓말을 해버렸다.
통역은 즉시 명득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연대장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뭘?"
"제가 통역을 잘못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신이라 말한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로 이곳을 통치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흥! 그게 그거지."
명득이는 통역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사파비 제국은 망해버렸고, 이곳은 조선이 통치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따지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혼날 줄만 알았는데 명득이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자 통역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너는 가서 즉시 사람들을 다시 불러와라."
"네, 네."
통역은 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깔때기를 들고 하마단 성안을 돌아다녔다.
"조선군은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세금도 10년 동안 걷지 않을 것이고, 종교는 원하는 대로 믿을 수 있게 한답니다. 또한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면 관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나와 조선군 대장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지만 한번 겁을 먹은 사람들은 집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터지라 외치고 돌아온 통역.
그를 보고 명득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