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응징(12) >
효종의 보령(寶齡)은 이제 35세다.
그런데도 효종은 왕위에 오른 후 더는 후궁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청을 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연이 쉬지 않고 노력한 끝에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
만주에 이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드넓은 예맥의 땅을 확보했다.
하지만 효종은 후궁을 본 생각이 없었다.
넓어진 영토만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선은 타국의 침략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몇 년에 거쳐 확보한 조선군의 숫자만 10만 명이 넘었다.
예맥 기병대라 말하는 기마병 또한 3만 명이 넘어선 지 오래다.
둘을 합친 것보다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조선전력공사 경비대도 보강되었다.
기병대는 1만 5천 명으로 변함이 없지만, 육경은 5만 명이 되었다.
해경 또한 1만 명이 넘어섰다.
17세기 중반이지만, 조선의 병사들은 19세기 말 수준의 총기를 갖추고 있다.
기관총과 대포는 20세기 수준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병장이 작성한 내용으로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효종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조선의 백성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풍요를 누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효종이 원한 것은 조선에 굴욕을 안겨준 청을 멸하고 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국이 되는 것이었다.
아들인 연 때문에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지만,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선의 영토 때문에 쉴 수 없었다.
'연은 내 아들이지만, 그 아이가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그래서였다.
효종이 나선 이유가.
어릴 때부터 뜻 모를 말을 하던 연은 자신에게 했던 약속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해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연이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양난이 끝나고 백성들이 두 배로 늘었는데 모든 것이 풍족하다니 믿을 수 없구나···.'
이제 조선의 인구는 2천만 명이 넘어섰다.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출산 사명률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인구는 더욱 빠르게 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효종은 상상만 해도 흥분되었다.
전체 인구의 1%나 되는 2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걱정할 게 없었다.
병사들이 만족할 정도로 복지와 월급을 지급하고 있다.
군비를 충당하고 남을 정도로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돈을 뿌려 세금을 거둔다?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연은 조선전력공사를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쌓아 놓고만 있지 않았다.
퍼주다시피 사람을 고용하고 공사를 벌이면서 쌓인 돈을 풀었다.
그로 인해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막대한 세금이 들어오고 있었다.
굳이 대동법 같은 걸로 조세를 걷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전력공사에서 내는 세금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이 상거래를 하면서 발생한 세금만으로도 엄청나게 늘어난 관리들의 월급을 주고도 남았다.
'그랬기에 저들이 걱정하는 것이지.'
효종은 대신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러면서 며칠 전 연과 대화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아버지 확보한 영토를 관리하고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걸 알고 있는 네가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야 하겠느냐?'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이냐?'
'그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연은 기병대원들이 쉬지 않고 말을 몰아 가져온 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 총을 들고 바로 효종을 찾아온 거다.
'아버지, 이 총을 보십시오. 이번 전쟁에서 루스 차르국 병사들이 사용했던 총입니다.'
효종은 연이 가져온 총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총으로 우리 조선을 위협할 수 없지 않으냐?'
'하지만 대량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허접하다고 해도 총은 총이기에 효종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보려고 하는 것이냐?'
'네, 아버지. 총구를 보면 아시겠지만, 합금을 사용했습니다.'
'합금?!'
효종은 다른 성질을 가진 금속을 섞어 만들면 더 좋은 특성을 지닌 합금이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정확히 합금이 아니지만, 청동으로 만든 관과 무쇠를 결합해 만든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가 틀림없습니다.'
'흐음···.'
효종이 총구를 살피는 가운데 연은 이어 설명했다.
'아무리 청동관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쇳물을 부으면 녹아 붙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틀로 사용한 쇠막대를 꺼내기 쉽지 않습니다.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기물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걸 만든 이가 누군지 아느냐?'
'정보에 의하면 루스 차르국의 고위 귀족인 대공의 장자라 합니다. 그자가 대량으로 총을 만들어 팔면서 이번 전쟁을 주동했다고 합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효종은 조선이 이렇게 발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연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았다.
그랬기에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위험인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아버지. 그러니 그자를 꼭 잡아야 합니다. 아니면 죽이던지요.'
'알았다. 기다리거라.'
'네, 아버지.'
조선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루스 차르국에 있다니.
위험하다고 생각한 효종은 그자를 반드시 검거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효종이 나섰다.
"그대들이 보기엔 짐이 어때 보이오?"
"""···?"""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효종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효종은 잘생겼고 몸도 좋았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짐은 누구보다도 튼실하오. 태자 또한 그렇소. 그러니 더는 논쟁을 끝냈으면 하오."
"폐하, 그 말씀은···?"
"아직 짐은 젊소. 따라서 걱정하지 마시오."
"""폐하···!"""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대신들이 동시에 외쳤지만, 효종은 손바닥을 펴 대신들을 진정시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조선을 건국하신 태조께서도 무장이셨고, 전군을 지휘하며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셨소. 짐 또한 그러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소."
단상에서 내려온 효종은 대신들을 한명 한명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조선군 총사령관인 태자는 당연히 전장에 나가봐야 하오. 전쟁에서 승리했다지만, 후처리가 남아있소. 그래서 태자가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오. 그대들도 태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태자가 생각하기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기에 가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만 논쟁을 끝냅시다."
"""폐하···!"""
"태자가 짐에게 그러더이다. 이 나라 조선에서 말뿐인 충심은 필요 없다고. 따라서 태자가 직접 전장에 나가겠다고 했소. 그래야만 백성들이 짐과 조정을 믿고 따를 수 있다고 하였소."
"""폐하···!"""
효종이라고 어찌 하나뿐인 아들 연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연과 대화를 하면서 왕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더는 태자에 관한 일로 논쟁하지 마시오. 대신 새로 확보된 영토를 어찌 관리해야 할지 의논하기 바라오."
"""폐하···!"""
효종의 단호한 모습에 대신들은 며칠 동안 계속된 논쟁을 끝냈다.
그런데 내명부(內命婦)라 일컫는 여인들의 반대로 태자비를 동행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태자비가 너무 어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라는 것과 무리한 장거리 여행으로 몸이 상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또한 혼인 후 신랑 신부가 일정 기간 떨어져 지내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였다.
생각보다 조선 시대 여인들의 초산 연령은 늦었다.
1930년대 여인들의 초경 평균연령이 16.1세였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첫 출산은 빠르더라도 15세가 넘었고, 대부분 20세가 넘어서야 아이를 가졌다.
기록에 의하면 17~18세기 인구 증가를 경험한 청나라와 일본도 혼인은 일찍 했지만, 20세가 넘어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복잡한 이유로 연은 신혼여행의 단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 *
모스크바 상공에 선전물을 날려 보낸 조선군 제15사단 병사들은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과 다르게 이곳 사람들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전물을 본 시민들이 오면 주려고 전투식량으로 죽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투식량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다시마를 말려 넣었기에 누구라도 좋아할 맛이 났다.
그래서인지 전라도 해안에서는 다시마를 본격적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역과 다시마는 식물이 아닌 해조류이기에 키우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마 재배는 쉽지 않았다.
다시마의 포자를 따로 모아 곳곳에 뿌리면서 잘 자라기를 기대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마만 성공적으로 재배할 수만 있으면 떼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 완도 근처에 있는 작은 섬인 소랑도에서 다시마 재배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즉시 조선은행으로 달려가 대출을 신청했고, 확인 결과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받아 '완도 상사'를 세웠다.
아무튼 완도 상사에서 공급받은 다시마가 첨가된 전투식량이 죽으로 변하면서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용이 없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나?"
"그럴지도 모르죠."
현수와 참모들은 선전물 작전이 실패하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실망하기도 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모기떼가 극성을 부려서였다.
"그럼 내일 바로 공격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아쉽네요. 성공할 줄 알았는데."
이번 작전의 최고 지휘자인 현수보다 작전 참모가 더 섭섭했나 보다.
공격이 실행되면 모스크바 시민들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고, 병사들도 다칠 수 있었기에 점령하더라도 좋은 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음···."
현수 또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단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했다.
멀리 보이는 보로비쯔기 언덕 위에 있는 크렘린궁을 말도 못 하게 화려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본 루스 차르국 사람들은 상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현수는 분노를 함께 연민을 느꼈다.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답답한지 현수는 막사 밖으로 다시 나갔다.
'크라스나야'라 불리는 광장을 둘러싼 붉은 성벽이 지는 석양과 함께 어울려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저걸 부서야 하나?"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칼과 창을 들고 전쟁하는 군대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지···."
현수는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 놓은 성벽을 부수고 싶지 않아서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모스크바 성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건 뭐지?"
"네?!"
"저기 좀 봐봐라.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모기떼가 아닐까요?"
예맥의 땅도 그렇지만, 이곳에도 심심치 않게 회오리바람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기떼가 나타나 극성을 부렸다.
이런 현상은 물웅덩이가 많은 초원지대나 습지에서 주로 발생한다.
암컷 모기와 짝지기를 하려고 수컷 모기들이 달려들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뭉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모스크바 성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모기떼가 성안에 나타난단 말이냐?"
"어, 그렇네요. 그럼 저건···?"
현수는 즉시 망원경을 꺼내 모스크바 성을 살폈다.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함성도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봅니다."
"흠···, 아무래도 성안에서 뭔 일이 발생한 것 같군."
이제 함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뭐라는 거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작전 참모는 뛰어가서 통역을 데리고 왔다.
통역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사단장님. 폭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말과 차르를 처단하자는 함성이 들립니다."
"뭐?"
통역은 깔때기를 꺼내 한쪽 귀에 대고 모스크바 성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틀림없습니다. 차르를 죽이자는 함성입니다."
통역의 말에 작전 참모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단장님,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다행이다."
"아마도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나 봅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즉시 병사들을 투입할까요?"
"아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내일 날이 밝거든 진격하도록 하자."
현수는 루스 차르국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병사들을 위험에 노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병사들을 모두 쉬게 하고 날이 밝는 대로 공격하도록 하자."
"넵! 사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