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응징(11) >
'야코프'
그 이름이 나오자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소?"
"몇 달 전에 서유럽으로 떠난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혹시 야코프 체르카스키에 대해서 아시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단지 그자가 총을 만들어 팔았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꼈을 뿐이오."
현수는 전쟁을 수습하는 가운데 루스 차르국 고위 장교들로부터 야코프에 관해 알게 되었다.
체르카스키 대공 가문의 장자인 그는 신기한 도구를 만들어 머스킷을 빠르게 제조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이 사실은 백령도에 있는 대붕 무선 기지를 거쳐 즉시 은동리로 전달됐다.
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야코프를 사로잡아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현수가 놀랐던 거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사신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야코프 그놈이 차르를 꼬드기지만 않았어도 저희가 겁도 없이 대조선을 넘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흥!"
현수는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야코프가 아니더라도 힘이 있었다면 우리 조선을 칠 생각이 아니었소?"
"아, 아닙니다."
"그대의 말은 언제라도 힘만 있다면 우리 조선을 넘볼 생각이 있단 말이 아니오?"
"그, 그건···. 오해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해하고 말 것 없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조선은 타국을 간섭하지도 않고 침략하지도 않았소. 하지만 우리 조선을 넘본 놈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았소. 더구나 우리 조선의 발원지인 예맥의 땅을 더럽힌 도적놈들이라면 절대 그냥 둘 순 없소.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오."
"장군! 장군! 제발 불쌍한 루스 차르국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부탁드립니다."
"바로 그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했기에 이곳까지 왔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현수만 아니라 옹진반도 출신 조선군 고위 장교들은 침략하고 약탈하고 겁탈하는 도적놈들이라면 치를 떨었다.
연의 보살핌으로 좋은 성정을 가질 수 있었지만, 어릴 때 당했던 고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수는 사신의 간절한 부탁에도 매몰차게 그를 돌려보냈다.
사신이 돌아가자 작전 참모가 다가와 물었다.
"바로 공격 하시겠습니까?"
"아니다. 준비해 온 선전물을 날려서 이곳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그 후에 공격해도 늦지 않다."
"알겠습니다. 사단장님. 우리 백성이 될지도 모르는 데 원한을 살 필요는 없겠습니다."
현수는 이번 모스크바 진공 작전을 실행하면서 선전물을 찍어냈다.
일종의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석유를 얻게 되면서 조선의 인쇄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은동리에 있는 연구원들은 석유의 유용성을 알고 다양한 실험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노력 끝에 휘발유와 비슷하지만, 좀 더 무거운 물질을 별도로 뽑아낼 수 있었다.
휘발유보다 무겁다고 해서 중발류(重發油)라 이름 붙여진 나프타(Naphtha)를 얻어 낸 것이다.
나프타는 휘발유처럼 휘발성이 있는 석유를 총칭하는 말이지만, 연구원들은 그런 것을 몰랐기에 따로 중발류라 이름을 붙였다.
원유를 100~180도로 가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중발류다.
연구원들은 이 중발류를 이용해 수지를 합성해 냈다.
석유로 만들었다고 해서 석유수지(Petroleum Resins)라 이름 붙여진 이 물질은 연구 결과 접착 성질이 좋다는 것을 알아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새로운 것에 흥미가 있는 연구원들이 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연구원들은 높은 접착력, 안정적인 접착성질, 적당한 내열성이 있는 석유수지를 보고 활용도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양한 제품을 만들 때 석유수지를 이용해 실험했다.
실험 결과.
타이어, 호스 등 고무 제품을 붙일 때.
페인트, 인쇄용 잉크, 도로용 페인트, 열 용융 접착제, 감압 접착제 등 접착력이 필요한 제품을 만들 때 쓸 수 있다는 것이 확인했다.
아무튼 대량으로 인쇄용 잉크를 생산해 낼 수 있게 되었고, 이번에 무장열차가 오면서 싣고 왔다.
인체에 크게 해롭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대원들과 병사들에게 위장용 크림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위장용으로 가져온 인쇄용 잉크를 선전물을 인쇄하는 데 쓰기로 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는데 실험해 볼 게 있어서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조선 백성이라면 조선글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지만, 루스 차르국 백성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선전물을 제작해 뿌리려고 했던 계획이 중단되었다.
보고를 받은 연이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은쌍식이 나섰다.
'사장님, 문자를 모른다면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 그거 좋은 방법이구나. 은진이가 알려준 거냐?'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요즘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인기 있는 만화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난 겁니다.'
값싼 종이와 잉크로 인해 조선에서 출판사가 성행하고 있었다.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폴리에스터로 만든 천 사이에 인쇄할 글자나 그림이 파인 비닐판을 넣고, 석유에서 추출한 잉크로 인쇄하는 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연이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21세기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실크 스크린 인쇄술'이 활용된 것이다.
은쌍식의 발상은 바로 채택되어 현두 요새로 전달되었다.
그림을 그려서 선전물을 만들어 유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림에 재능있는 병사를 착출해 만든 선전용으로 그려진 그림은 단순했다.
루스 차르국의 인장이 그려진 표시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약탈한다.
하지만 조선전력공사를 상징하는 '번개' 표시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집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조선군이기에 해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쉬웅! 쉬웅!
밀떡 로켓에 매달린 선전물이 모스크바 상공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작전 참모가 현수에게 물었다.
"효과가 없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때는 쳐들어가야지, 별수 있나?"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루스 차르국에도 허접하지만 총이 있기에 바로 진입할 순 없었다.
박격포를 날려 완전히 부숴 버린 후 무장열차를 앞세울 수밖에.
그럴 경우,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인 모스크바가 처참히 파괴되고 불바다가 될 게 뻔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군 병사가 다칠 수도 있기에 시간을 두고 공략하기로 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준비해라. 오는 즉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줘야 하지 않겠냐?"
"알겠습니다. 사단장님."
예상대로라면 선전물을 본 모스크바 시민들이 조선군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사람이란 알 수 없고, 문화까지 다르기에 어떻게 반을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실험은 해봐야 했다.
그들만 모두 빠져나온다면 모스크바 공략은 간단하니까.
어차피 쳐 죽일 놈은 조선을 침략하라 명령한 황제와 귀족들이니.
그들만 남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일은 거칠 게 없었다.
* * *
창덕궁에 여름이 찾아오자 봄을 알렸던 홍매화와 능수 벚꽃이 자취를 감췄다.
꽃은 사라졌지만, 햇살을 듬뿍 받은 푸르른 나뭇잎은 더욱 생기가 돌았다.
짝을 찾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창덕궁 대전에 모인 대신들은 열띤 토론을 끝낼 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효종은 답답했는지, 얼음이 담긴 차가운 물을 연신 들이켰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논쟁이 끝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신과 무신이란 개념이 조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관리는 나라의 행정을 수행하고, 병사는 나라를 지킨다는 개념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국왕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조선이 이만큼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이유가 모두 효종과 태자 덕분이라 생각해서다.
아직 국가(國家)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한 나라의 상징이자 중심인 왕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백성들은 효종을 성군이라 칭송하며 섬겼고, 조선의 영토를 한없이 넓히고 있는 태자 연을 따랐다.
섬기고 따르는 것은 대신들도 같았다.
전처럼 정적을 죽이는 당파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관매직과 비리로 부를 축적하지 않아도 되었다.
관리나 병사가 되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넉넉한 월급이 나와서였다.
게다가 고위직으로 올라가면, 월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인상되었기에 굳이 비리를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신들은 명예를 더욱 중시했다.
명예가 바로 가문을 빛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선이란 나라는 효종이란 왕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효종 또한 인간이기에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서 효종의 유일한 아들인 연의 안위를 대신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태자께서는 조선군 총사령관이시니 당연히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누가 몰라서 그렇습니까? 후세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닙니까?"
"허···, 참."
대신들은 연이 조선군 총사령관이기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모스크바에 가는 일은 당연하다고 봤다.
그러나 혹시라도 연이 잘못될까 봐 걱정되었다.
황제국을 자처하지 않았지만, 주변국들은 조선을 '대조선 제국'이라 부르며 수시로 사신들을 보내왔다.
방문한 사신들은 조선을 상국이라 말하며 조선의 신하들에게 극진할 정도로 예를 보였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대신들은 태자의 안전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룬 이는 다름 아닌 태자인 연이었으니.
하지만 연은 답답했다.
'빨리 가봐야 하는데···.'
루스 차르국에서 만든 총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 점령한 예맥해 서쪽 거대한 농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일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직접 만나보지 않고 판단할 수 없지.'
조선을 침략하고 형수를 취하고 변발을 강요하며 거침없이 사람을 죽였던 도르곤만 하더라도 은덕이 무엇인지 알았다.
대륙으로 돌아가 후금을 다시 세운 도르곤은 조선을 형제의 나라이자 형님의 나라라 말하며 조선을 영원히 따를 것을 천명했다.
물론 조선에서 수석총 같은 무기를 수입해야 하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도르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친서를 보내 조선에 저지를 짓을 사죄했다.
효종은 사죄가 담긴 도르곤의 친서를 보고 후금을 조선의 우방국으로 인정하는 답신을 보냈다.
여진족을 같은 예맥의 핏줄이라 말했는데 인제 와서 청을 멸할 필요는 없다고 본 거였다.
또한 조선 영토 서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기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러기보다는 조선에 이익을 안겨줄 고객으로 후금을 대하기로 했다.
그런데 은쌍식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청을 멸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쉽지만, 잊어버려라. 이제는 형제가 되지 않았느냐?'
연은 서운해하는 은쌍식을 달래고 대신들을 찾아가 만났다.
'군사령관이 적진에 가보지도 않고 작전을 지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전하, 그게 왜 말이 안 된다고 보십니까? 오래전부터 그래 왔지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랬기에 원균이나 이괄 같은 자가 이 나라 조선을 망친 것 아닙니까?'
'그거야···.'
연이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을 반대하던 대신은 할 말이 없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능하지만 탐욕으로 찌든 원균이나 반란으로 조선 북방 병력을 말아 먹은 이괄.
두 장수로 인해 혼란을 겪는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장수를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대신은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문신이 군권을 쥐고 휘둘렀던 황당한 시기에 벌어진 일로 인해 조선이 망할 뻔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무신이란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
군은 조선을 지키고 병사는 정치에 나서지 못한다는 법까지 만들어 공포했다.
그렇다 해도 조선군 총사령관인 연은 차기 조선의 왕이 될 태자이기에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하자 대신들은 불안했다.
대신들은 연이 조선군 총사령관이기에 당연히 가봐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렇지만 태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조선에 큰 위기가 닥칠 수도 있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연은 모스크바에 꼭 가봐야 했기에 대신들을 설득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어느 나라나 군사령관이라면 전장에 직접 나가 상황을 살폈습니다. 태조께서도 그리하셨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선에는 유능한 장군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새로 점령한 곳을 조선에 포함해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직접 보지 않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말을 했지만, 효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태자인 연이 후세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논쟁이 시작됐다.
보다 못한 효종이 옥좌를 내리쳤다.
갑자기 들려 온 소리에 대신들은 논쟁을 중단하고 효종을 바라보았다.
효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으시오. 짐은 아직 젊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