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응징(9) >
조선의 영토는 끝을 모르고 확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연은 아라비아반도까지만 확보하고 더는 서쪽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다짐이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안다.
은쌍식이 지도를 꺼내 석유가 있다는 곳을 살피는 동안 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를 못 만들게 해야 해.'
동서양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주는 해양 교통로인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는 것을 연은 원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확보한 땅을 활성화하려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 새로 만든 조경함을 페르시아만으로 보내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해양 물류가 발달하면 내륙은 죽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연은 오스만 제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이집트에 있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지 못 하게 할 생각이다.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운하가 뚫려봐야 좋을 게 없지.'
만약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다면, 지금 만들고 있는 대륙 횡단 철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너무 많은 데 그럴 수는 없지.'
엄청나게 넓어진 조선의 영토지만, 인구의 반 이상이 좁은 한반도에 살고 있다.
그것도 한양 남쪽에.
그렇다고 강제로 이주시킬 수도 없는 일.
연은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곳곳에 대도시를 새울 꿈을 꾸었다.
그러자면 해상 교통로가 없어야 한다.
'해상 교통로가 활발해질수록 사람들은 해안가에 모여 살지.'
아무튼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수에즈 운하 건설을 막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오스만인데···.'
현재 수에즈 운하의 동쪽 시나이반도와 서쪽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을 쫓아내고 그 땅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시발! 내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확 쳐버려!'
박격포와 터지는 폭탄이 완성되자 이젠 무서운 것이 없었다.
며칠 전 야수즈에서 일어난 전투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전술 시험 사단인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제2사단 병력 중 단 1개 대대만으로 적 3만 명을 몰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소총을 든 대원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고 한다.
그 보고를 받고 연은 세계를 정복해도 될 듯싶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복하긴 쉽지만, 관리하는 건 힘든 일이지.'
잘못하다간 로마 꼴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복하고 점령한 후 수탈로 부를 이룬 로마 제국.
시민들은 향락에 빠져 제국이 썩어 가는 줄도 몰랐다.
조선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연은 백성들의 임금을 많이 주고 있지 않았다.
조선전력공사에서 만든 상품을 더 많이 팔려면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장 한 명이 일해서 한 가족이 충분히 먹고살 만큼만 주고 있었다.
'아무튼 수에즈 운하는 절대 안 돼!'
연 때문에 틀어져 버린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루스 차르국에서 허접하지만, 대량으로 머스킷을 만들어 냈다.
직접 보지 않았지만, 무전으로 보고 받은 머스킷을 연은 심각하게 생각했다.
'빠른 시간에 머스킷 10만 정을 만들어 냈다면, 누군가 쓸만한 기관을 만들어 낸 게 틀림없어.'
실용성이 있는 증기기관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고열과 고압을 견딜 수 있는 파이프나 실린더를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아를 찍거나 총열을 다듬는 정도의 증기기관은 벌써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조서원이 입수했다.
'그래도 증기기관은 아닐 거야?'
아직은 조선 말고는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기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은 더욱 궁금했다.
'빨리 보고 싶은데···.'
현두 요새에서 수거한 루스 차르국에서 만든 머스킷은 날쌘 기병대원들을 뽑아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했다.
"쌍식아, 현두 요새에서 출발한 지 얼마나 됐지?"
"네? 무슨 말씀입니까?"
혼자 지도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던 은쌍식은 연의 물음에 눈만 깜빡거렸다.
"놈들이 만든 총을 가지고 온다고 했잖느냐?"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음···, 한 10일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됐구나."
"그런데 사장님, 그게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일단 봐야 한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까짓 총 백만 자루가 있어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대원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다."
"아···, 그러겠네요."
허접하다고 해도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면 대처하기 쉽지 않다.
물론 대원들과 병사들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일은 없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병사라도 아껴야 한다.
그들은 조선의 백성이자 총사령관인 연의 부하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지.'
게임이라면 유닛이 죽어 나가도 다시 뽑아내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병사가 죽으면 그 한 명만 죽는 게 아니다.
그와 관련된 사람들까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절대 인본주의자가 아닌 연이지만, 효종에 이어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조선의 백성들은 아끼고 싶었다.
'능력이 없다면 몰라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어찌 보면 연은 자신과 게임하고 있었다.
아니, 지루할 수밖에 없는 17세기에서 다시 태어난 연은 재미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문식이라도 있었으면···.'
덜 답답했을 거다.
하지만 혼자서 21세기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풀고자 자신만의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였다.
지도를 한 참 보고 난 은쌍식이 연을 불렀다.
"사장님?"
"응?"
"아무래도 사파비 제국을 먹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곳에 석유가 많다고 하는데 사파비 제국 땅을 우리가 가지지 않는다면 육로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배로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
"배로요? 배로 어떻게 가져옵니까?"
"고무 액도 가져왔는데 석유라고 안될 게 뭐가 있느냐?"
"그러긴 하지만···."
은쌍식은 말을 하다 말았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무장열차를 서맥과 현두 요새로 보내면서 석유가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무장열차에 딸린 화차에 경유를 반 정도 실어 보냈다.
그래도 중간에 경유가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도착하고서도 경유가 1/3가량 남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또한 새로 건조한 조경함의 경우 12,000km를 항해하고서도 경유가 1/5 정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경유 보관 통이 조경함 바닥을 채울 정도로 컸기 때문이지만, 어찌 됐건 경유는 석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이 대단했다.
또한 열식 발전기보다 간편하고 힘도 좋았다.
열식 발전기를 사용하려면, 숯을 태우고도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경유를 쓰는 디젤 엔진은 바로 시동이 걸리고 운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형 디젤 엔진을 개발 중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작게 만드는 게 더 어려웠다.
생각한 만큼 힘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쌍식이 보고 있던 휴대용 지도를 펴고 연에게 물었다.
"사장님, 그래도 이곳 바스라 지역은 차지해야겠습니다. 예맥해와 육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그곳은 수심이 얕아 배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보고를 받지 않았느냐? 또한 무역 도시라 점령하고 관리하려면 요새를 짓고 주둔군을 파견해야 한다."
"사장님?"
"왜?"
"이번에 넘어온 왜놈들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뭐?"
뜬금없는 은쌍식의 말에 연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엄청나게 넘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훈련 시켜 보내면 좋을 듯합니다."
"그곳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찌하려고?"
"에이,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밥만 먹여주는데도 고마워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반란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흐음···"
연은 은쌍식의 말이 어쩌면 맞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일본 선거를 보고 문식이가 뜬금없이 물었던 적이 있었다.
'공식아, 왜 쪽발이들이 조선 백성들을 보고 학을 뗐는지 아냐?'
'그거야 지들 국민과 달라서 아니냐?'
'아는군. 조선을 합병하면 지들 국민처럼 따를지 알았지. 하지만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무시당하고는 살지 못하잖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그치! 당연한 건데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어.'
일본에서는 아버지에 이어 중의원 선거에 나간 아들이 당선될 확률이 80%에 달한다고 한다.
그걸 보고 문식이가 기가 막힌 지 꺼낸 말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은 무능한 대통령을 쫓아냈다.
하지만 일본 국민은 지도자가 나라를 망치는데도 반항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조작하는 대로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아니면 포기하고 은둔해버렸다.
"사장님, 또 신기한 게 있는데 같이 한동네에 살다가 넘어왔어도 조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을 하면 바로 신고한다고 합니다."
"그래?"
"네, 사장님. 저도 이상해서 다시 물어봤는데 맞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용소 관리가 편하다고 합니다."
"흐음···."
연은 공식이 시절 미국으로 유학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히로시라는 일본인 유학생은 좀 독특했다.
일본인 미국 유학생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히로시는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다른 학생들에 관해 자주 물었다.
그냥 성격이려니 치부하려 했지만, 도를 넘어서는 그의 질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히로시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달리 일본인 유학생들과 모여 살지 않았다.
히로시뿐만 아니었다.
대부분 일본인 유학생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생활했다.
'히로시, 너희는 왜같이 안 모여 살아?'
'뒷말 듣기 싫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말하기 그런데···.'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리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그의 말을 듣고 왜 일본인들이 모여 살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 있어 전부 그렀다고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일본 유학생들은 남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했고, 몰래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일본에선 사무라이에게 대꾸라도 하면 바로 목을 벴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게 바로 우리 일본인들이야. 지금도 똑같아. 그런데 너희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더라. 그런 걸 보면 정말 부러워.'
아무튼 그런 관습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같은 직장에 다닐수록 더 멀리 떨어져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 세계에 리틀 도쿄라는 일본인 타운이 있지만, 코리아타운과 달리 사람은 살지 않고 장사만 하는 상업지대였다.
"사장님, 그럼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넘어온 자들 중 병사였던 자들도 많으니 그들을 모아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사파비 제국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건 생각 좀 해보자. 그들을 훈련하려면 조선말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겠느냐?"
연의 말에 은쌍식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사장님 김충선(金忠善)이란 분을 아십니까?"
"김충선?"
"거 있잖습니까?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부(歸附)하고 항왜(降倭) 자로써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까지 지낸 분 말입니다."
"아···, 그 김충선! 알다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대역 소설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김충선을 역알못인 연이라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그자는 죽었을 건데."
"최근에 부산에 수용소를 관리할 병사들을 모집하면서 일본어에 능한 자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김충선 대감의 손자들이 조선군에 입대해서 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은쌍식이 알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물었는데 은쌍식은 말끝을 흐렸다.
연이 은쌍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는 눈을 내리깔며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은진이가 알려줬습니다."
"허! 그게 뭐라고 그리 기가 죽었냐? 괜찮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은진이가 보고 있는 보고서가 궁금해서 살짝 살펴보다가···."
"쌍식아, 괜찮다. 너는 이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 아니냐. 그러니 모든 것을 알아도 된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갑자기 아들까지 있는 은쌍식이 눈물을 흘렸다.
'착한 놈 같으니라고···.'
다른 이 같으면 권세를 누리느라 바쁠 것이다.
하지만 은쌍식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래 그들이 있다면 일본인 병사들을 훈련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구나. 즉시 가서 그들을 데려오도록 해라."
"네, 사장님."
눈물을 훔친 은쌍식이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데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연이 불렀다.
"쌍식아, 그럼 충무공(忠武公)도 아느냐?"
"이순신 장군님 말씀입니까?"
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선팔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거북선도?"
"당연하지요."
은쌍식의 대답에 연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김충선의 후손도 중요하지만, 충무공의 후손과 거북선을 만든 장인의 후손도 중요하다. 그러니 이들을 모두 찾아내 데리고 오너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