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21화 (121/275)

< 121. 응징(5) >

3척이나 되는 조경함은 사파비 제국 남서부 거점 도시이자 무역항인 부셰르에 하루 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거대한 성체와 같은 3척의 배를 보고 놀란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항구 근처에 있던 모든 배들이 도망을 갔다.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엘람인들이 항구로 사용했던 부셰르는 역사적인 곳이다.

그래서인지 항구를 따라 쭉 들어선 석조와 아라비아 시멘트를 섞어 지어진 독특한 건조물은 조화롭고 보기에도 좋았다.

부셰르가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큰 곳이라 하지만, 보잘것없었다.

항구 곳곳에 우뚝 솟은 야자수가 이국적이긴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조선에 비하면 단조로웠다.

해수는 연의 말도 있었기에 이곳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위협을 주지 않으려고 항구에서 멀리 떨어져서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작전 참모의 지휘하에 해경 대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함께 타고 온 육경 대원들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아서인지 오늘따라 번개처럼 선상 위를 뛰어다녔다.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흰 제복을 입은 대원들은 조2 소총을 어깨에 메고 바른 자세로 선상에 정렬했다.

햇볕에 탄 그들의 모습은 강인해 보였다.

정예와 같은 해경들의 모습을 봤는지 다가오는 쪽배는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쪽배는 다시 노를 저어 다가왔다.

조경 5호선에 올라선 사람은 힘이 드는지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호흡이 안정되었는데도 두려운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해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 세금징수원인 압둘라라 합니다. 혹시, 조선에서 오셨습니까?"

"그렇다."

해수는 짧게 대답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우호적인 것이 아니기에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까지 무슨 일로···, 우리와 교역을 하시고자 오신 겁니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압둘라가 물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

해수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니라고 단정 짓 기도 뭐 했기 때문이다.

"너도 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사파비 제국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으냐?"

관리는 침을 삼키더니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일 때문에···."

관리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하겠느냐? 길을 열어주겠느냐? 아니면···."

"당연히, 당연히 열어드려야죠."

해수가 말을 다 전하기도 전에 관리는 허락했다.

살살거리며 웃는 모습이 별로였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해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잘 생각했다. 우리는 이곳에 정박하고 있을 것이니 교역을 원하면 찾아오거라. 또한 상륙한 우리 병사들이 쉴 곳을 마련해 주도록."

"당연히 그래야 합죠. 그런데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도 조선의 은화와 금화는 최고의 대접을 받습니다."

"허!"

해수는 기가 찼지만,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돈을 주고 거래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깔끔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신수 또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관리들도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느냐? 우리 또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계산은 깔끔히 하라고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복돌 부장을 데리고 왔습니다."

"복돌이?"

"아, 있잖습니까? 신의주 요새에서 최초로 청나라 놈들에게 물품을 팔면서 바가지를 씌운 중대장 말입니다."

"아···! 그 복돌이."

조선전력공사 영업직원이 된 복돌이는 유명했다.

어찌나 말주변이 좋고 상술이 뛰어났던 지 벌써 부장이 되었다.

"복돌아!"

"네, 사단장님."

"관리를 따라가서 계산하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사단장님."

복돌이는 통역과 함께 부셰르 관리를 따라 쪽배를 타고 떠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수가 신수에게 물었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냐?"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나 관리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이스파한까지 약 500km 정도 되니,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넉넉잡고 두 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두 달이라···."

"네, 두 달! 아무리 늦어도 두 달이면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준비하고 상륙하도록!"

"넵! 사령관님."

다음날.

신의주를 지키는 조선전력공사 육경 제2사단 대원들이 사파비 제국을 치기 위해 부셰르 항구로 상륙했다.

* * *

효종 5년(1653) 4월 8일.

새로 확보한 조선의 영토 서쪽 끝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찰마다 불공(佛供)을 드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들은 조선군 병사로서 멀리 떠난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오늘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불교의 개조(開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인 사월초파일(四月初八日)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불공을 드리러 온 백성들은 절을 하며 각자가 가진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다른 모습도 보였다.

따사로운 봄날 햇살이 내리 쪼는 가운데 사람들은 대웅전 앞마당에 모여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매달린 연등(燃燈)들이 햇빛을 가려주었기에 마당은 포근하고 좋았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거사(居士)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특별히 주지 스님께서 허락해주셨으니 떠들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모두 사연이 있는 것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자, 자. 이제 곧 시작합니다. 오늘 중요한 소식이 발표된다고 하니 모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무슨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그것도 부처님 오신 날에.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라디오방송에서 오늘 정오에 특별 방송을 한다고 안내했다.

그것도 이번에 서쪽에서 일어난 전쟁에 관한 내용을.

하지만 라디오가 없는 사람들은 들을 길이 없었다.

물론 읍내에 나가 조선전력공사 분점에 가면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절에 가야 했다.

무슨 소식인지 궁금했지만, 1년 중 가장 큰 행사가 있는 날이라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시주를 많이 하는 부자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주지 스님에게 허락을 받고 비싼 라디오를 들고 왔다.

한눈에 봐도 부자처럼 잘 차려입은 거사는 다름 아닌 만득이었다.

옆집 아저씨의 말을 듣고 공사판에 나간 만득이는 마당 한가운데 놓인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무려 3원이나 되는 라디오를 살 정도로 부자가 된 만득이는 살짝 소리를 키웠다.

-뚜우···!

아직 전파가 없는 세상이라 잡음은 없었지만,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만득이는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분 남았습니다."

하루 3번 라디오방송에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에 비싼 돈을 주고 산 시계는 정확했다.

10초를 남겨 놓고 만득이는 소리를 최대한 높였다.

-지지직!

-여기는 조선방송공사입니다.

-현재 시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땡' 소리와 함께 선식이의 목소리가 나오자 사람들의 목젖이 굼틀거렸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라디오가 무엇인지.

유명한 만담가인 선식이의 목소리와 조선의 명창 예은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라디오는 너무나 비싸기에 구입할 수 없었다.

또한 한 개에 2문이나 하는 소모품인 '건전지' 값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만득이는 이 정도는 펑펑 쓸 정도로 부자였다.

가뭄으로 인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만득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항상 챙겨주던 옆집 아저씨의 말에 따라 읍내 공사장에 나갔다.

농사를 지어도 벌기 힘든 돈을 받게 된 만득이는 본격적으로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일자무식 만득이를 눈여겨본 공사장 반장은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각종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공사판에 나돌면서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번 만득이는 제일 먼저 최진사댁 빚부터 갚았다.

게다가 이장의 딸이자 어릴 때부터 동무였던 꽃님이와 혼인했다.

만득이는 장인이 된 옆집 아저씨와 함께 조그만 토건 업체를 차렸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만득 상사는 성실과 정직으로 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도로와 선로 공사를 맡으면서 돈을 번 만득이는 대단지 주택 건설까지 추진했다.

성실과 신용이 인정되어 조선은행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거다.

주택 단지는 완공되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갔다.

만득 상사가 만든 주택은 믿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돈이 굴러 들어왔다.

떼돈을 번 만득이는 세금도 많이 냈지만, 기부 또한 많이 했다.

기부한다고 세금을 감면해 주지 않았지만, 어릴 때 못 배운 한을 풀기라도 한 것처럼 초등학교마다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다.

그중 하나가 라디오였다.

만득이는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야말로 배우는 학생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만득이는 장인을 따라 절에 왔다.

그것도 라디오를 들고.

처남인 창공이가 현두 요새로 파병 간 이후 장모와 아내는 날마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더니 요즘은 아예 가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라디오를 가지고 와 소식을 전해 주기로 했다.

만득이는 상사를 운영하다 보니 남보다 정보를 빨리 입수할 수 있었다.

현두 요새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공신력 있는 조선방송공사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다.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서쪽 현두 요새에 도적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도적놈들이 조선을 노리고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하지만 조선군 총사령관인 태자께서 진두지휘하셔서 놈들을 무찌르고 20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도적놈들이 총알받이로 끌고 온 10만 명의 농민 중 살아남은 5만 명은 조선인이 될 수 있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농병 10만 명 중 5만 명은 조선군의 총탄에 죽었다.

그래서 연은 나머지 농병들을 조선의 품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선군의 잘못은 없지만, 어찌 됐건 조선군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 건 사실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받아들여 조선인으로 만들어라.'

연은 세계에 이름을 떨친 정복 군주와 다르게 후세를 생각했다.

오로지 침략하여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던 정복 군주들의 뒤끝은 좋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지.'

연은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지 않게 하려고 많은 것을 고려하며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서맥 요새도 사파비-무굴 도적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태자의 명을 받은 조선전력공사 기병대 기수 사령관이 이들을 무찔렀습니다.

-이번에 잡은 포로도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대조선 만세!

"""와···!"""

"""만세!"""

고요한 사찰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선군 총사령관인 태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감히 조선을 침공한 도적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황제를 뜻하는 차르, 질롤라, 파디샤라 말하는 권력을 가진 놈들을 반드시 잡아 응징하겠다고 했습니다.

-과욕과 오만으로 우리 대조선 침공에 앞장선 놈들도 단호히 처리 하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라디오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침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전쟁에서 조선전력공사 대원 8명과 조선군 병사 12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500명이 넘는 대원들과 병사들이 다쳤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고 하니 안심하십시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40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잡은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20명뿐이 안 되다니.

도대체 전쟁을 어떻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상식적이지 않은 말에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식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선식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통하고 고통스럽게 들렸다.

-이번에 전쟁으로 전사한 조선의 영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명씩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사람들은 극락정토(極樂淨土)에 가길 기원했다.

마지막까지 이름을 듣고 있던 만득이의 장모와 아내는 창공이 이름이 나오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꽉 쥔 손을 풀었다.

하얗다 못해 시퍼레진 장모의 손을 장인이 잡고 엷게 미소 지었다.

-숭고한 이들을 위해 잠시 묵념하겠습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가운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선군 총사령관인 태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선을 침략하고 약탈하기 위해 자신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놈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짓을 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놈들이 있는 곳으로 진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선식이가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대조선의 백성들에게 알립니다.

-간악한 도적놈들의 수장을 잡으러 가는 대원들과 병사들을 응원해 주십시오.

-그들이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십시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새로운 조선의 영토에 조선말과 조선글, 산수, 역사, 예절을 가르칠 교사들을 모집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선식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어 말했다.

-이번에 벌어진 전쟁에서 조선군은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팔도의 두 배나 되는 농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농사짓기를 원하시는 농민에게는 원하는 만큼 땅을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와···!"""

"대조선 만세!"

대웅전 앞마당은 다시 함성으로 가득 찼다.

확보한 농지가 조선 팔도의 두 배나 된다고 하니 백성들은 놀랍기도 하지만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게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조선인에게는 땅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지원자에게는 조선전력공사에서 지원하는 집이 제공되며 월급은 100문을 준다고 합니다.

-그것도 2년 동안 준다고 하니 뜻이 있는 분들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연이 이렇게 방송을 내보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생긴 일로 조선말과 조선글을 가르치는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어 왔다.

그들은 바로 일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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