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응징(2) - 지도 >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장군들은 기가 막힌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죽어 갔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몸값을 덜 내려고 협상을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몸값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끌고 나와 나무 기둥에 묶어 버렸다.
말이 통한다면 뭐라도 해보겠지만, 통하지 않으니 하소연조차 할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를 모았다.
벌레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카자크 농병들이 던진 돌을 맞고 죽어 가는 중에도 놈을 향한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야코프!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아!'
'너를 믿고 모든 것을 투자했는데···.'
'지옥에서 보자! 야코프!'
그들이 표출한 분노는 조선군도 카자크 농병도 아니었다.
자신들을 꾀어 조선과 전쟁을 하라고 부추긴 야코프였다.
여인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야코프의 말이 아니었다면, 강력한 총기를 보유했다고 소문난 조선을 넘보지 않았을 거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귀족으로서 명예와 지위를 누리며 원하는 대로 살다가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고통과 함께 사라져 갔다.
창식이, 돌석이, 갑돌이는 적군의 장군들이 고개를 떨구자 자리를 떠났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고 돌을 던졌지만, 정신이 돌아오자 보고 싶지 않았다.
그와 달리 카자크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광분했다.
돌을 던지다 보니 지금까지 당한 일이 떠올랐는지 이미 죽어버린 적장을 향해 끊임없이 돌을 던졌다.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장들의 시신은 망가져 갔고, 그 아래는 돌멩이가 쌓여 갔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수는 연이 말한 대로 바로 지시를 내렸다.
'포로들을 계급별로 분리하고 적장은 일단 죽여라. 놈들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역사를 잘 모르는 연이라 중세 시대 전통인 포로 배상금에 대한 것을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 둬봐야 골치만 아프지.'
연은 예맥해와 예맥산맥 너머로 진격하더라도 그 땅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차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벅차!'
중앙아시아는 텅 빈 곳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점령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유럽은 아니었다.
연의 알고 있는 역사 상식으로는 유럽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럽 국가 전체가 몇몇 왕가의 피로 엮여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번 전쟁을 일으킨 놈들을 그냥 둘 순 없지.'
이번 일로 유럽 전체가 덤벼들 일은 없다고 봤지만, 덤빈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예맥해와 예맥산맥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하면 돼.'
이번 전쟁으로 예맥산맥을 넘어 볼가강까지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폭이 최소 1km가 넘는다고 했지.'
볼가강은 거대한 강이었다.
최대 폭이 10km가 넘는 호수 같은 곳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니 볼가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하면 유럽 전체가 조선을 공격한다고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연은 이번 기회에 볼가강 너머 아조프해까지 진출할 생각이었다.
'아조프해까지 진출하면 흑해를 지나 지중해까지 갈 수 있지.'
연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전력공사 핵심 직원들을 전략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새로운 영토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다시 작전을 짜야만 했기 때문이다.
백령도에 있는 정용식이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에 연은 은쌍식과 함께 미리 작전을 설계했다.
"이곳은 마리우폴(Mariupol) 같은데···."
"이곳 칼미우스 요새 말입니까?"
은쌍식의 물음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할 때 유명해진 마리우폴은 딱 봐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기에 최적이었다.
북쪽으로 평지나 다름없는 대지는 숲으로 덮여있지만, 개간만 하면 최고의 곡창지대가 될 게 틀림없었다.
남쪽 또한 아조프해를 통해 흑해와 연결되기에 지중해를 넘어 대서양까지 진출할 수 있어 보였다.
연은 상인으로 위장한 정보 참모가 보내온 내용을 살폈다.
"칼미우스(Kalmius)강과 칼치크(Kalchik)강이 만나는 곳에 코사크 용병들의 만든 칼미우스 요새가 있다는 말이지···."
칼미우스 요새는 강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자로 인해 서쪽 말고는 접근할 곳이 없었다.
"좋긴 한데, 좀 좁군."
"사장님, 이곳에 요새를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러고 싶은데 너무 좁구나."
하지만 연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에도 유명한 곳이라 최상의 요지가 분명했다.
"한 번 가서 보고 싶구나."
직접 가서 살펴보고 어떤 곳인지 보고 싶었다.
뉴스로만 봤던 마리우폴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단지 요새만 짓고 끝낼지 아니면 서쪽 중심도시로 키울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굳이 그곳에 요새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이곳 키이우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긴 한데 서맥 요새와 멀기도 하고 바다와 접근성도 좋지 않아."
"접근성은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요. 주변이 다 평지 아닙니까?"
21세기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 또한 볼가강만큼 크고 넓은 드네프르강을 따라 흑해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맥 요새에서 그곳까지 가는 물길은 복잡했다.
"그건 아니다. 이곳 전체가 전부 숲으로 이루어진 평지지만, 예맥의 땅 남쪽같이 초원지대라 푹푹 빠지는 곳이다. 이런 곳은 도로나 철도를 만들기도 쉽지 않아. 그래서 이 두 강 사이를 수로로 연결하고 이용할 생각이다."
작전판 위에 그려진 지도에 보이는 예맥해 북쪽 볼가강과 아조프해 동쪽 돈강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아···, 그러겠네요. 서맥 요새에서 칼미우스 요새까지는 수로를 이용하면 바로 갈 수 있는데, 키이우까지는 한참 돌아갈 수밖에 없어 보이네요."
"맞다. 그러니 이곳까지 연결하는 보급로는 도로보다 수로를 뚫어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의 말을 들은 은쌍식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씨익 웃었다.
"사장님, 포로 놈들이 땅을 잘 판다고 하니 수로 만드는데 동원하면 될 듯싶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용식이가 오면 포로 놈들을 당장 이곳으로 보내야겠다."
연은 볼가강과 돈강을 연결해서 수상 교통로를 만들고자 했다.
조서원의 보고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콘크리트를 이용해 수문을 만들어 통행하면 해결될 것 같았다.
'탐나는 곳이야.'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빽빽이 들어선 숲을 제거하고 물러터진 땅을 다진다면 만주를 능가하는 곡창지대가 틀림없었다.
'볼가강과 돈강 남쪽만 개발해도 한반도 면적의 두 배나 되는 평지구나.'
그곳에서 쌀농사를 1년만 지어도 2천만 명에 육박하는 조선 백성 모두가 십 년을 먹고도 남을 듯했다.
조선의 화폐는 쌀 본위제라 그 땅만 얻어도 돈을 무한정 찍어 내도 될 듯싶었다.
그만큼 비옥한 옥토지만, 그 누구도 개발하고 있지 않았다.
무성한 숲과 푹푹 빠지는 땅이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이 침을 흘리고 있을 때 은쌍식은 작전판에 그려진 지도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장님, 어느 곳부터 치실 생각입니까?"
"이곳, 루스 차르국의 서울인 모스크바부터 쳐야 하지 않겠느냐?"
서울이라는 말은 원래 수도(首都)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로 불렸고,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는 소부리(所夫里)라 불렀던 것이 보통 명사화되었다고 한다.
"아, 그래서 칼미우스에 요새를 만드실 계획이셨군요. 그런데 황제 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죽여야지."
연은 일본에 한 것처럼 왕뿐만 아니라 수뇌부들까지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 법'이란 말이 있었지만, 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에 패하더라도 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연이 생각하기로는 전부 개소리였다.
'지들끼리 해 처먹으려고 하는 것일 뿐이야.'
왕이 왕을 죽이지 않아야지, 혹시라도 전쟁에서 지더라도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왕들이 끝없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연은 생각했다.
"그러다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쩌시려고 합니까?"
"버리면 된다."
"네?"
"따르지 않는다면 굳이 다스릴 필요가 있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왜? 아까운 게냐?"
"네···, 사장님."
연은 장난감을 받았다 빼앗기 아이처럼 아쉬워하는 은쌍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차지한 땅만 해도 우리가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넓다. 그런데 말썽을 부리는 곳까지 관리하며 베풀어야 하겠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두 죽일 수도 없으니 반항한다면 포기하고 돌아오면 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장님."
연은 굳이 유럽까지 쳐들어가서 그곳을 정복하고 싶지 않았다.
정복해봐야 관리하느라 인력과 시간만 낭비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를 치더라도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수뇌부의 목만 챙겨 나올 생각이다.
'굳이 조선의 백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어.'
연이 생각하기로는 서양은 동양과 문화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민족주의가 없다고 하지만,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조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안될 게 뭐가 있느냐? 그래도 놈들에게 경고는 해야 한다. 조선에 덤비면 어떤 꼴을 당할지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이 전쟁을 일으킨 놈을 죽여버리겠다."
하지만 연은 당장 뜻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정용식이 온다는 시간에 맞춰 조선전력공사 핵심 직원들이 하나둘씩 전략회의실로 들어왔다.
백령도에서 연락을 받고 급히 은동리로 온 정용식이 전략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연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니다. 이미 이긴 전쟁인데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정용식이 자리에 앉자 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이 급한지 바로 말을 꺼냈다.
"사장님, 기수로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뭐? 문제가 생기다니 뭔 말이냐?"
"포로로 잡은 놈들이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몇 명이나 되는데?"
"현두와 서맥 요새에서 사로잡은 포로들만 4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뭐? 40만 명?"
"네, 그렇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두고 모스크바로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고 있다더냐?"
"일단 울타리와 철망을 쳐서 가둬 놓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답을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젠장···."
청나라의 포로들은 그 수만큼 많은 경비대원들이 있었고 조선과 가까워서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이라 어떻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40만 명이 된다고? 미치겠네.'
당장 조선군을 파견한다 해도 3달 넘게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모스크바 진격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수의 적이 몰려왔지만, 인명 피해가 거의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요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리한 전쟁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회의를 시작했는데 난관에 부닥쳤다.
'제기랄, 이게 뭐야? 뭘 받아와야 좋을지 회의를 하려고 했는데···.'
연의 놈들에게 있는 보물과 다양한 예술작품, 예술인들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조선의 문화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청난 수의 포로들 때문에 그런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첫 번째 안건은 다름 아닌 포로 처리 문제였다.
이번 전쟁으로 잡아놓은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서 알려줘야 했다.
'골치 아프군···.'
연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은쌍식은 씩씩거렸다.
놈들의 침략으로 소수이지만 대원들과 병사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장님, 놈들을 다 죽여버리면 안 되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려면 그들의 가족까지 다 찾아내서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니."
현실적으로 침공한 병사들의 가족을 찾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훗날 불안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에잇! 이게 뭔 일입니까? 포로 놈들 때문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다니."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포로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신분을 확인하는 일만 처리하는 데도 진이 빠졌다.
다행이라면 식량 걱정은 없다는 거였다.
놈들은 조선을 치려고 작정했는지 가져온 군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또한 서맥과 현두 요새에 보관하고 있는 전투식량도 충분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연은 작전판을 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용식아?"
"네, 사장님."
"카자크인들이 5만 명 정도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흠···."
연은 그들을 모두 조선인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결코 밭에서 김매는 여인도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은 만주와 같이 잘만 개척하면 곡창지대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지.'
하지만 농사지을 농민들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조선에서 농민들을 이곳까지 강제로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또한.
'이곳은 전통적으로 밀을 키우는 곳이지.'
'파란 하늘 노란 밀밭'을 상징하는 21세기 우크라이나 국기만 봐도 이곳에서 어떤 작물이 잘 자르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이곳에 쌀에 진심인 조선인들을 데리고 와 밀 농사를 짓게 할 수는 없다.
생각을 마친 연은 정용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