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응징(1) >
현두 요새 사령관인 현수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어찌 처리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놈들을 요새 안에 가두기도 그렇고···."
여의도만 한 면적을 가진 요새였지만 5만 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 카자크 농병들이 들어와 있기에 복잡했다.
"놈들이 만들어 놓은 흙 둔덕을 이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음···, 괜찮을 것 같군. 즉시 시행하도록!"
"넵!"
카자크 농병들이 가지고 온 농기구가 있었지만, 포로가 된 놈들에게 주지 않았다.
손으로 땅을 파서 흙을 쌓아 경계선을 만들게 했다.
"똑바로 안 하나!"
"죽고 싶어!"
"어디서 눈알을 돌려!"
카자크 농병들에게 감시를 맡겨 놓았더니 갈퀴(Rake)같이 생긴 농기구로 놈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농병들의 감시하에 포로수용소는 빠르게 완성되었다.
"철조망을 둔덕 위로 옮기고 그 밖으로 카자크인들 막사를 옮겨서 감시하게 해라."
"넵!"
그런 와중에서 막사 안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적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로 두 나라의 장군들이었다.
화려한 복장으로 느긋하게 앉아있는 놈들은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스 차르군 총사령관인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는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께서는 정말로 용이라고 생각하셨단 말입니까?"
"그럼, 용이 아니었단 말이오?"
"허어···! 당연히 아니지요. 그저 놈들이 만든 기물이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분명 용으로 보였는데···."
말을 더듬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총사령관 스페탄 차르니에츠키를 보고 투루베츠코이는 할 말을 잃었다.
자국의 병사들도 용인 줄 알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건 틀림없이 용이 아니었습니다. 햇빛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크흠···."
마침 떠오르는 태양 때문에 착각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햇빛을 등지며 동남쪽에서 달려오는 무장열차는 신비롭게 보였다.
찬란한 빛과 함께 달려오는 무장열차는 조선군에게 희망이었지만, 적들에게는 지옥에서 나타난 사신이었다.
다행히도 루스-차르군 총사령관은 요새의 남쪽에 있었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차르니에츠키 풀란드-린투아니아 사령관은 요새 북쪽에 있었기에 착각을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한가운데 거대한 검은 물체가 소리를 내고 빠르게 달려오면 누구나 같았을 거다.
"우릴 어떻게 할 것 같소?"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겠지요."
"크흠···. 알다시피 이번 전쟁을 준비하느라 영지에 남아있는 게 없소."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두 사람은 주위에 있는 다른 장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같은 처지였는지 의기소침한 표정이 역력했다.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조선을 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총력전이나 다름없이 전 병력을 싹싹 긁어 왔다.
가진 재산을 모두 끌어모아 이번 전쟁에 투자했기에 남은 거라곤 영지뿐이 없었다.
앙숙이던 두 나라의 귀족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탐욕이었다.
탐욕을 이기지 못한 놈들은 조선을 치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조선만 이길 수 있다면 엄청난 금은보화와 조선이 가진 기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강한 화력 무기를 가지고 있는 조선군이지만, 20배가 넘는 병력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루스 차르국의 두뇌라 일컫는 야코브 체르카스키(Yakov Cherkassky) 공이 있었다.
체르카스키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난 그는 모스크바 차르돔(Muscovite Tsardom)의 신뢰받는 가신이었다.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 생각으로 루스 차르국이 커가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 쓸 머스킷 또한 그의 조언으로 빠르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길게 파이프를 만들어 한쪽을 막으면 그게 바로 총입니다. 그러니 비싼 수석총을 사오 지 마시고 제가 알려 드린 방법으로 머스킷을 만들면 됩니다.'
야코프가 제안한 머스킷 제조 방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쇠막대에 구리관을 끼우고.
틀에 고정한 다음.
쇳물을 부어 주물을 뜨고.
구리관이 녹아 쇠막대에 붙기 전에.
쇠막대만 꺼내면 총열이 완성되었다.
그래서였다.
놈들이 10만 정이나 되는 머스킷을 빠르게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가.
놈들이 겁도 없이 조선을 넘본 이유가.
또한 야코프는 기가 막힌 책략도 내놓았다.
'땅을 파서 둔덕을 쌓고 공격하면 총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요새에 접근하기 전에 다 죽을지 모르잖소.'
'조선군의 요새 성벽은 높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총알받이 농노들을 기어가게 하면 됩니다.'
'총알받이로 쓸 놈들이 다 죽으면 그땐 어찌해야 하오?'
'그때는 'Z'자 와 같이 사선으로 참호를 파서 전진하시면 됩니다.'
거침없는 야코프의 대답은 모두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총알과 화약이 떨어지면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그때 윙드 후사르를 투입하면 됩니다. 더 궁금하신 게 없다면 전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야코프 체르카스키는 서유럽으로 떠났다.
자신이 생각한 기물을 만들어 루스 차르국에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하며.
아무튼 야코프의 말대로 대공들은 소모전을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놈들이 가지고 있는 총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다.
하지만 야코프의 말에 의하면 병사 한 명이 쓸 수 있는 총탄은 많아야 200발이 넘지 않을 거라 했다.
그러니 총탄만 소모하게 하면 이번 전쟁은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런데 처참하게 패했다.
그것도 1/20도 안 되는 조선군에게 말이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아쉽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빌어먹을 용처럼 보이는 기물만 아니었다면···."
"운이 없었던 게지요. 어쩌겠습니까?"
"크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아쉬운 전쟁이었다.
쉬지 않고 병사들을 갈아 넣은 덕분에 적들은 힘이 빠졌는지 총격에 죽는 병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참호가 요새를 향해 전진할수록 조선군의 공격을 거셌지만, 공포에 물든 적들은 총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요새를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기물 때문에.
그것도 아침 햇살을 받아 용처럼 보이는 기물 때문에.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그나저나 몸값을 준비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쩌면 좋소?"
"사정을 해봐야겠지요."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우리 몸값이 얼마나 되는데 당신 같으면 죽이겠소?"
"그래도 낼 돈이 없는데···."
"그러게 말이요."
"돈이 문제요. 문제···."
"정 안되면 영지 일부라도 팔아야지 어쩌겠소."
"염치없지만 깎아야겠지요. 영지를 팔 순 없잖소."
"크흠···."
대공의 지위에 있는 두 사람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몸값을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전쟁에 패해 포로로 잡혀도 전쟁을 일으킨 적장이나, 돈 많은 기사는 죽지 않았다.
포로 배상금으로 거액의 몸값을 낼 수 있으니 대려 대우를 잘 받았다.
그랬기에 놈들은 몸값으로 지급할 돈 걱정만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병사가 엄청나게 죽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신분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막사 입구로 누군가 들어왔다.
막사에 들어선 조선군 병사는 놈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중얼거렸다.
"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들이 편하게 놀고 있구나."
커다란 덩치에 떡 부러진 어깨를 가진 조선군 병사는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을 꺼내 쏘고 싶은지 손잡이를 잡았다.
"에이,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아쉽지만 놈들을 편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죽은 대원들과 병사들의 피 값을 받아 내야 한다.
조선군 장교는 따라 들어 온 통역에게 말했다.
그러자 통역이 포로들을 보고 외쳤다.
"모두 밖으로 나와라!"
"이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고 뭐 하느냐?"
적장들은 미천해 보이는 통역의 말에 화를 냈다.
통역은 조선군 장교에게 그들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조선군 장교는 활짝 웃더니 막사의 천막을 걷고 말했다.
"봐! 내가 그럴 것 같다고 했잖아. 내가 이겼다."
"알았어. 주면 될 것 아니야."
조선군 장교 둘은 내기를 했다.
놈들이 어찌 행동하는지.
내기에 진 장교가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쓰고 소리를 빽 질렀다.
"뭣들하고 있냐? 당장 끌어내지 않고."
"""멸!"""
조선군 병사들은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놈들을 두드려 패더니 묶어서 끌고 나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몸값을, 몸값을 달라는 대로 다 주겠소."
"이러는 법은 없소. 당장 그만두시오."
"나는 루스 차르국의 대공이오. 정당한 대우를 원하오."
하지만 조선군 병사들이 휘두르는 쇠좆몽둥이가 그들의 몸에 착착 달라붙었다.
끌려 나온 그들 앞에는 수많은 카자크인이 모여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귀족이자 장군인 그들이 처참한 몰골로 끌려 나오자 카자크인들은 웅성거렸다.
"아···, 아! 조용! 조용! 잘 들어라! 이놈들은 조선의 법대로 처리할 것이다."
통역이 따라 외치자 카자크인들은 입을 다물고 장교를 주시했다.
"우리 조선에서는 사기 치거나 배신하는 놈은 돌로 쳐죽인다. 또한 조선의 침략하려 모의한 도적놈에게도 똑같이 처벌한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통역의 말을 들은 적장들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피멍으로 얼룩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장교는 고개를 돌려 적장들을 쳐다봤다.
"시끄럽다! 입 다물지 못할까!"
장교의 윽박에 적장들은 기가 막혔지만, 입을 다물었다.
미천한 놈과 말을 섞기 싫어서였다.
"잘 들어라! 이놈들은 우리 조선을 약탈하러 온 도적놈들의 수장이다. 따라서 바로 형을 집행한다. 너무 큰 돌을 맞으면 빨리 죽으니 작은 돌을 사용하기 바란다."
말을 마친 장교는 조선군 병사에게 턱짓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굳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조선군 병사들에게 이끌려 나무 기둥에 묶인 적장들은 살려달라고, 원하는 대로 몸값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원한다면 영지를 주겠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미개한 놈들, 몸값 올리려고 나를 이렇게 취급하다니 두고 보자.'
'설마 몸값을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 맞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니, 없어야 해."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조선군 병사들은 적장들을 기둥에 꽁꽁 묶어 버렸다.
"이제 시작해도 좋다!"
조선군 병사가 외쳤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감히 지체 높은 귀족인 장군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이는 있을 수가 없었다.
"뭐야? 이 사람들 왜 그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선군 병사가 통역에게 물었다.
"그게···."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겠다고 난리 쳤잖아? 그래서 기회를 준 건데, 왜?"
"이곳에서는 그럴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짓이라니?"
"어찌 감히 노예나 다름없는 카자크인들이 지체 높은 귀족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입니까?"
"무슨 개소리야!"
병사는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쓰더니 후임 병사들에게 말했다.
"창식이, 돌석이, 갑돌이 너희들이 먼저 보여줘야겠다."
"""멸!"""
'에이···씨, 꼭 이런 일만 나에게 시킨다니까.'
돌석이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땅에 널려 있는 작은 돌을 들어 묶여있는 적장 중 가장 높아 보이는 놈에게 던졌다.
-퍽!
날아온 돌에 의해 머리에서 피가 난 적장은 울 부치는 듯한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 새끼 때문에 봉두가 죽었어! 이 죽일 놈아!"
돌을 던지다 보니 화가 치민 갑돌이가 소리를 치며 더 빠르게 돌을 던졌다.
그제야 카자크인들도 하나둘씩 돌을 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 나쁜 놈들아! 내 죄는 네놈들이 하라는 대로 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나를 화살받이로 내몰다니! 죽어라!"
처참하고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지면서 적장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야코프 체르카스키였다.
'빌어먹을 새끼, 이럴 줄 알고 있었나?'
'어쩐지 급히 떠나더라니···.'
'야코프, 이 죽일 놈의 개새끼! 내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
'놈의 말을 믿은 게 실수였어.'
야코프의 말만 믿고 모든 것을 투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게 인제 와서 한이 됐다.
그냥 조선에 배상금을 주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치자고 했을 때 야코프가 한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이겨봐야 얻을 게 별로 없습니다. 그것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협력해서 조선을 치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놈들이 자신의 땅이라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우리 루스 차르국은 저 넓은 시베리아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조선에 빼앗긴다면, 루스 차르국의 앞날은 밝지 않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루스 차르국 장군들은 고통과 함께 밀려 들어오는 야코프가 한 말이 뼈에 사무치며 정신을 잃어갔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루스 차르국은 유럽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는데···.
10만 정이나 되는 머스킷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치고 서유럽으로 진격하면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는데···.
조선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침략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조선은 우랄산맥을 기점으로 국경을 정하고 교역을 하자고 했는데···.
그까짓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기 싫어서 조선과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니, 조선의 황금과 기물이 탐이 났던 건가.
마지막으로 힘을 내 피로 물든 눈동자를 치켜뜬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 루스 차르군 총사령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