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대전쟁시대(17) >
현두 요새 사령관이자 조선군 제15사단장인 현수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날이 밝았지만, 쳐들어오지 않은 적들이 수상했다.
요새에서 2km 떨어진 놈들의 진지는 볼 수 없었다.
조선군의 포격을 피하려고 쌓아 놓은 둔덕 때문이다.
현수는 적의 진지를 막고 있는 둔덕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건···."
멀리 꿈틀거리는 곳에 초점이 맞춰지자 현수는 깜짝 놀랐다.
놈들이 땅을 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구덩이를 파고 있는 적들.
파낸 흙을 요새를 향해 쌓아 올리며 쭉쭉 뻗어 나왔다.
"크흠···."
적들의 행동에 현수는 깊은 침음을 내뱉었다.
백령도에서 사장님으로부터 군사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은 아니지만, 모든 나라가 총과 대포로 무장하게 되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을 쌓기보다 땅을 파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식으로 바뀔 게 틀림없다. 그것이 총이나 대포의 공격을 막기에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성을 높이 쌓을 필요는 없다.'
때문에 요새를 만들때 성벽을 높이 쌓지 않았다.
조선전력공사가 만든 모든 요새는 보초탑은 10m 가까이 되지만 성벽의 3m가 넘는 것이 없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람을 차단하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 놈들은 참호를 파고 있었다.
그것도 총격과 포격을 피하려고 사선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마치 1차 세계대전의 양상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단장님, 놈들이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참호전을 생각하나 봅니다."
"흠···, 곤란한데."
강력한 조선의 대포 공격을 막고 저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참호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현수는 저격병 투입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명사수들로만 구성된 저격병 맛을 보면 놈들이 다른 생각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격병 맛을 본 지 하루가 지나자 놈들은 사선으로 참호를 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노출된 상태에서는 조선군의 화력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오늘과 낼만 버티면 되는데···."
지원군은 현두 요새로 오면서 수시로 무전 연락을 보내왔다.
파미르고원을 지나면서 문제가 있어 지체되었지만, 초원이라 넉넉잡고 이틀이면 현두 요새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놈들이 저렇게 나오면 밀떡 로켓도 쓸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작전 참모의 말에 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알기 때문이다.
밀떡 로켓은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강력한 화력으로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밀떡 로켓이 있기에 그동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호 속까지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못 막은 것은 아니다.
300만 발이 넘는 총알이 있기에 이틀을 버티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전처럼 가까이서 총격전이 벌어지면 아군도 죽거나 다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예맥 기병대를 내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수적 열세가 너무 심했다.
"놈들은 가지고 있던 것이 화승총이라고 했나?"
"화승총보다는 좀 나은 것 같긴 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전장을 수습하다가 가져온 총은 급조한 머스킷이었다.
만들기 힘든고 비싼 수석총 대신에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급히 준비한 것 같았다.
현수는 부관이 가져온 머스킷을 살폈다.
"엉망이군."
몇 번 쏘면 망가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고 조잡했다.
그렇다 해도 무시할 순 없었다.
30만 명이나 되는 적병들이 동시에 쏜다면 30만 발이 쏟아지기에 극심한 피해가 예상된다.
"지연시키는 방법뿐이 없겠군. 만수야?"
"네, 사단장님."
"더 가까이 올 수 없도록 포격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사단장님."
엄청난 인원이라 그런지 참호는 빠르게 다가왔다.
'낼 아침이 문제군.'
낮이라 포격으로 놈들이 참호를 파고 다가오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지만, 어두운 밤이 되면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심각한 사태를 맞이한 현수는 즉시 장교들을 불러들였다.
* * *
어제부터 연은 온종일 서맥 요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현두 요새처럼 놈들은 사선으로 참호를 파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곳곳에 있는 수로를 따라 둔덕을 만들고 있었다.
수시로 대포를 쏘아 방해하고 있지만, 죽어 나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서맥강을 끼고 지어진 서맥 요새는 현두 요새보다 훨씬 컸다.
서양과 본격적으로 교역할 장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을 변경했다.
예맥해를 온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사파비 제국에 총을 주고 오스만과 싸움을 붙일 생각이었다.
석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엘부르즈산맥을 경계로 국경을 정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연은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식욕이 댕겼다.
"쌍식아, 배고프지 않냐?"
"저는 괜찮은데 뭐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까?"
"속이 답답하구나. 시원하고 매콤한 것이 먹고 싶구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매운 것이 댕긴다더니···.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니다. 가서 먹는 게 좋겠다."
연은 머리도 식힐 겸 구 본사 건물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연구원들은 연을 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식당에서는 굳이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기에 말을 하진 않았지만, 스승이나 다름없는 사장님이기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의 표했다.
식당 곳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연구원들의 표정을 밝았다.
서쪽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감히 조선군을 이길 세력은 없다고 생각해서다.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된 비빔냉면이 나왔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너도 먹을 거냐?"
"네, 사장님."
"안 먹는다며?"
뭔가 풀리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사장님. 어서 드십시오."
연의 인상을 쓰고 있는데도 은쌍식은 입맛을 다시며 비빔냉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많이 먹거라."
연은 짜증을 부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악몽을 꾸고 난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짜증이 자주 치밀었다.
아마 뜻대로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인 것 같았다.
맛있기 비빔냉면을 먹고 있는 은쌍식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은쌍식은 대식가였다.
은쌍식뿐만 아니었다.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진 조선이지만, 대식을 넘어서 과식하는 풍속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먹는 만큼 활동량도 많기에 보기 흉하게 살찐 이들은 없었다.
"많이 먹어라."
"고맙습니다. 사장님."
씩 하고 밝게 웃는 은쌍식을 보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연이 비빔냉면을 먹고 있는 사이에 은쌍식 벌써 다 먹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사장님. 요즘 불맛이 끝내주는 불면이 나왔다고 하는데 드시겠습니까?"
"불면? 그런데 네가 불맛이 뭔지 알아?"
"그럼요. 요즘 연구원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만드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됐다."
은쌍식이 불면을 가지러 간 사이에 연은 생각에 잠겼다.
'불맛이라···.'
고개를 돌려 불면을 만드는 모습을 봤다.
오픈 주방이라 요리를 만드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불면을 만들고 있는 숙수는 잘게 썰어 놓은 채소와 고기, 해물을 넣고 기름을 부었다.
그런 후 불을 붙여 바쁘게 휘저었다.
그 모습을 본 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쌍식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쌍식아, 급하다 가자."
"네?"
연은 은쌍식이 따라오든지 말든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급히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였다.
* * *
백령도 본부에서 무전 연락을 받은 기수는 멀리 떨어진 둔덕을 살폈다.
서맥 요새를 감싸는 모양으로 곳곳에 둔덕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요새의 해자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 근처에 만들고 있는 둔덕은 아무래도 수상했다.
뭔가를 감추려 하는 게 틀림없었다.
'화공을 할지도 모른다고···?'
서맥 요새 주면은 대평원이다.
너무 넓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기에 화공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로를 따라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해자로 둘러싸인 요새는 화염에 휩싸이게 될 게 틀림없었다.
성벽이 낮기에 대응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불꽃과 시커먼 연기는 다가오는 적을 적이 볼수 없게 만들 것이다.
자칫하면 대원들이나 병사들이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 공격당하면 아무리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조선군이라도 수적 열세로 인해 패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적장이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놈인 것 같구나.'
청나라와 전쟁만 생각했었다.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두 요새도 그러고 이곳도 적들의 대처 능력은 예상 밖이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다면, 둔덕 뒤에는 기름 항아리가 가득 있겠지.'
생각에 빠진 기수에게 정보 참모가 다가왔다.
"사령관님, 아무래도 화공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다면 굳이 수로 옆에 둔덕을 쌓을 이유가 없을 것 아닙니까?"
"흐음···."
기수는 정보 참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이곳은 기름이 흔한 곳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지···."
들어 온 정보에 의하면 예맥해 서쪽 바쿠 주변은 지표면을 뚫고 기름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안심할 수 없었다.
고대부터 바쿠에서 노천 기름이 나온다는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기 3~4세기경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은 코카서스 기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298년에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집필한 '동방견문록'에도 바쿠 유전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백여 척의 배로 실어 나른다. 먹지 못하는 기름이지만 불에는 잘 타다. 사람과 낙타가 상처를 입었을 때 바르면 효과가 좋다.'
1593년 기록에는 35m까지 땅을 파고 내려가 원유를 채굴했다고 한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어떡하긴, 기병대원 중 활을 잘 쏘고 기마술이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라."
"넵! 사령관님."
화공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기수는 기마술과 활을 잘 쏘는 기병대원들을 따로 모았다.
생각보다 활을 쏠 줄 아는 대원들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배웠고 활쏘기를 좋아해서 지금도 즐기고 있었다.
기수 또한 명궁수(名弓手)였다.
지원에 나선 대원들 앞에 기수가 섰다.
생각보다 많은 대원을 보고 기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이번 작전은 적진 바로 앞까지 가야 한다. 죽을 수도 있으니 두려우면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빠지고 싶은 대원은 물러나도 좋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빠지는 기병대원은 없었다.
왜 모이라고 했는지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맥 기병대원 중 두렵다는 표정을 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기수는 옅게 미소 지은 후 말을 이었다.
"작전은 오늘 밤에 실시한다. 그러니 활을 점검하고 쉬다가 해가 지거든 방검복을 단단히 입고 다시 모여라."
"""멸!"""
이번에는 '충성'이 아니라 '멸'이라 외쳤다.
조선을 넘보는 놈들은 무조건 '멸'해야 한다고 배워서이다.
기병대원들이 돌아가자 기수는 장교들을 모아 작전을 설명했다.
"······따라서 말발굽 소리가 나지 않게 천으로 두르고 둔덕 아래까지 걸어간다."
"사령관님, 질문 있습니다."
"말하라."
"단지 밀떡 폭탄만 날리고 오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
"이번에 아예 쓸어 버리면 안 됩니까?"
"그건 불가하다. 적의 수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수십만 명이 넘는다는 보고다. 그 많은 수를 어찌 처리할 수 있겠느냐?"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아니다. 나도 놈들을 이번 기회에 죽이고 싶었다."
기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고 이어 말했다.
"우리 조선군은 적들에게는 없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사상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멸!"""
연은 수시로 말했다.
'비대칭 무기를 가지고도 무식하게 싸운다면 그건 바보나 할 짓이다. 그러니 모든 걸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라.'
비대칭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지만, 교육을 받던 대원들은 그게 바로 총이란 걸 알았다.
처음 수석총을 받고 훈련을 받으면서 활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비대칭이란 말이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새겨들었다.
밤이 되자 10명씩 팀 단위로 분산된 기병대원들은 각자 맡은 둔덕 아래로 검은 천을 두른 말을 끌고 걸어갔다.
원래라면 둔덕 위에 횃불을 켜놓고 보초가 있어야 했지만, 조선군 포격이 무서웠던지 둔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쉬! 모두 듣기만 해라."
팀장을 맡은 장교는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앞으로 7분 후에 둔덕 너머로 밀떡 폭탄을 쏜 후에 우린 바로 복귀한다. 엄호 포격을 해주기로 했으니 뒤는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달려라. 알았나?"
"""넵!"""
초침이 30초 정도 남았을 때. 팀장은 밀떡 폭탄을 꺼내 불을 붙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각자가 가지고 온 화살에 매달린 밀떡 폭탄의 수는 5개.
목표를 겨냥하지 않고 쏘아 날리면 되기에 10초도 걸리지 않을 터이다.
-치익! 치익!
5개의 밀떡 폭탄 심지에 불을 모두 붙인 대원들은 가차 없이 화살을 둔덕 너머로 날렸다.
그런 후 빠르게 말에 올라타고 요새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적이다!"
곳곳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말과 동시에.
-쿠앙! 쿠앙!
둔덕 너머에서 밀떡 폭탄이 터져 나갔다.
-화르륵!
거대한 불기둥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