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대전쟁시대(16) >
새벽이 돼서야 회의가 끝났다.
연은 전략회의실 위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가 그대로 뻗어 버렸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과 조선군 병사들의 생명이 달린 일이라 어린 몸에 심기를 너무 많이 소모한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꿈속에서 문식이가 나타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장소는 단골 삼겹살집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문식이는 학교에서 학생들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만 좀 해라. 애들 아니냐. 애들! 애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내 앞에서 쪽발이 놈들의 문화를 찬양할 수 있냐?'
'애들이니까 그렇지. 우리 때도 일본 만화 많이 봤잖아. 잊어버리고 한잔 받아라.'
'에잇! 시발!'
문식이는 연거푸 자작하더니 불콰해진 얼굴을 디밀었다.
'공식아 너 그거 아니?'
"또, 뭐?'
'사이판에서 8km 떨어져 있는 곳에 티니언섬(Tinian)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 중 반이 한국인이다.'
'무슨 개소리야! 그곳에 뭐가 있다고 한국인이 살아.'
뜬금없는 문식이의 말에 연은 헛소리를 그만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너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비행기가 어디서 출발한 지 모르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일본 놈들 죽였으면 됐지.'
'이런, 이런. 이래서 역알못이 문제라니까.'
'왜, 또?'
연은 심심하면 역사를 들먹이며 자신을 가지고 노는 문식이를 노려봤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터질 때 조선인 노동자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르니 그런 소릴 하지.'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돼. 거의 모를걸?'
'맞아, 우리 학생들도 모르더라.'
뭔가 나쁜 일이 있었는지 문식이는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켜더니 이어 말했다.
'쪽발이 놈들이 쌀은 물론 양은 냄비까지 다 가져간 건 알지?'
'그거야 알지. 아주 깡그리 긁어 갔잖아.'
'그랬는데도 우릴 도왔단다.'
'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
오늘따라 문식이가 발작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문화에 심취한 학생 몇몇이 수업 시간에 일본이 대한민국의 산업 근대화를 도와줬다는 개소리를 시전한 거였다.
출처는 당연히 근거 없는 인터넷이었다.
그러면서 시작된 문식이의 말에 연은 가슴이 아려왔다.
1945년 8월 6일.
사이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티니안섬에서 에놀라 게이(Enola Gay)라 이름 붙여진 B-29 슈퍼포트리스(Superfortress)가 떠올랐다.
그리고 3일 뒤 박스카(Bock Car)가 다시 이륙했다.
원폭을 처맞고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보이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4,670kg이니 되는 팻맨(FatMan)은 플루토늄 원자폭탄이었다.
원래 군수공장이 모여있는 '고쿠라'에 투하될 예정이었지만, 짙은 먹구름으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향을 틀다가 돌아갈 때까지 필요한 연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고쿠라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8만 명이나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그중 상당수가 강제로 징용당해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갑자기 문식이 얼굴이 그들로 바뀌더니 손을 내밀며 달려들었다.
순간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그들의 사정을 하나씩 듣다 보니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런! 시발 새끼들!"
연은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했다.
"왜? 이런 악몽이···."
아마도 현두 요새에서 3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카자크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혹시···?"
왠지 불길했다.
* * *
또다시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들을 보고 현두 요새 사령관인 현수는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기병대 대기하고 여차하면 나가서 쓸어버려라."
"""멸!""""
예맥 기병대 대대장들이 명령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현수는 작전 참모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만수야.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작전 참모 만수는 마이크를 잡고 단추를 눌렀다.
-지정된 사수는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저격을 실시한다.
-대원들과 병사들은 대기하고, 지시받은 대로만 행동하라!
말을 마친 만수는 거죽만 남은 것 같은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턱짓을 했다.
힘겹게 마이크를 받아든 사람은 어제 전장을 수습하다 발견한 카자크 병사였다.
그는 처음 보는 기물을 떨리는 손으로 쥐더니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반복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빅토르 본다르추크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들리면 요새에 노란 깃발이 걸려 있는 곳으로 오세요.
-살려면, 제발 살려면 노란 깃발을 향해 뛰어오세요.
-제발! 제발! 살려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오세요.
-흉악한 후사르 놈들을 무시하고 조선의 요새로 오세요.
-이곳은 천국입니다.
빅토르가 흐느끼면서 연신 말을 반복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농기구를 든 카자크 병사들은 죽지 않았다.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윽박지르면서 앞으로 가라고 외치는 독전대 놈들이 총을 맞고 즉사했다.
"와···! 끝내주네."
창공이는 조선군 저격병의 사격을 보고 눈이 커졌다.
경비대처럼 조선군도 사단별로 저격병을 양성하고 있었다.
어제 전투에서 막대한 총알을 낭비했다.
그래서 현수는 오늘 전투에 저격병을 투입했다.
50m 간격으로 세워진 보초탑에 올라온 저격병들은 일발 필살로 카자크 농병들의 뒤에서 깔짝대는 독전대 놈들을 쓰러트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농병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온갖 쌍욕을 하며 나가 죽으라고 내몰던 독전대 놈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그중 한 놈이 위험을 감지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로 농병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 죽일 놈의 새끼가 어딜 들어와!"
농병 한 명이 곡괭이로 놈의 얼굴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 버린 놈을 보며 농병은 침을 뱉었다.
"뭐해! 저 소리 안 들려?"
그 말을 남기고 농병은 현두 요새로 달려갔다.
멀리 보이는 노란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죽어라 달렸다.
천사의 손짓과 같은 노란 깃발이 가까워지자 활짝 열린 천국의 문이 보였다.
"살려주시오!"
그가 안전하게 요새 안으로 들어간 모습을 본 농병들이 앞다투어 튀어 나갔다.
멀리서 지켜보던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제처럼 농병들이 땅을 파서 둔덕을 쌓은 후에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농병들은 모두 현두 요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너무 멀어서 뭔 소린지 모르지만, 요새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전장으로 나가지 않자 말 탄 후사르들이 나섰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나가지 않고!"
"저기 좀 보십시오."
병사의 말에 후사르는 현두 요새 안으로 사라져 가는 농병들의 모습을 보고 기가 차는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도주병이다!"
"즉시 출동하라!"
어깨에 날개를 붙인 후사르 기병들은 반돌레트 기병총에 화약을 장전하고 말을 몰아 농병들의 뒤를 쫓았다.
1km가 넘는 거리였지만, 순간적으로 따라붙은 놈들은 총을 들어 좁은 요새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농병들의 뒤를 겨냥했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놈의 얼굴이 터져 나갔다.
밥 먹고 저격 연습만 하던 조선군 저격병들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펄럭이는 날개가 조준을 방해했지만, 반짝이는 투구를 겨냥하면 되기에 집중적으로 얼굴이 터져 나갔다.
급히 다가오는 놈은 말을 향해 총알을 날렸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이 꼬꾸라지면서 후사르 놈은 농병들의 발자국에 의해 진창이나 다름없게 변해 버린 곳에 처박혔다.
그 위로 쓰러지듯 덮치는 말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놈은 하늘이 무너져라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컸는지 모골이 섬뜩할 정도였다.
하지만 천사 같은 총알이 놈의 고통을 없애주었다.
* * *
오늘도 어제와 같이 은동리 전략회의실에 수뇌부들이 모였다.
"투항한 카자크 농병들이 5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앞으로 조선인이 될 사람들이니 잘 돌보라고 해라."
"네,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현수 사단장이 먹을 것부터 챙겨 줬다고 합니다."
"잘했구나."
정용식의 보고에 연은 마음에 드는지 오랜만에 얼굴이 펴졌다.
아침에 악몽을 꾸고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초조했는데.
'꿈은 반대라더니, 다행이군.'
안심이 되었다.
역사를 따져봐야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원인을 찾자면 끝이 없다.
따라서 연은 굳이 민족을 구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봤다.
'조선에 충성하고 따르면 조선인이지.'
민족주의가 태동하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조선을 만들기에 적기(適期)였다.
"그럼 남은 놈들은 얼마나 되지?"
"그게···."
"왜? 뭐가 잘못됐나?"
"현수의 보고로는 3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10만 명 가까이 사라졌는데 30만 명이 그대로 있다고?"
"네, 사장님. 루스 차르국 놈들이 요새 남쪽으로 이동할 때 조사했는데 1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라진 막사의 수로 계산해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만 명이 훨씬 넘을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투항한 카자크 농병들을 조사한 결과도 비슷합니다."
"빌어먹을!"
고전적으로 적병의 규모를 파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많이 쓰는 방법은 밥을 먹기 위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판단한다.
진지에 설치된 막사의 수를 가지고 알아내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놈들은 농병들에게 막사조차 제공하지 않았던 거였다.
우크라이나 카자크인들은 폴란드 왕에게 충성했다.
루스 차르국을 믿고 자치를 외치며 봉기했다.
하지만 현두 요새까지 올 때는 보급품을 나르는 일꾼으로, 요새에 도착해서는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믿고 따르거나 반항하거나 똑같지.'
연은 역사 사이트에서 이상한 글을 자주 봤다.
일본에 대항하지 않고 합병에 찬성했다면 더 좋지 않았겠냐는 개소리가 심심하면 올라왔다.
헛소리라 생각하고 말았지만, 그런 말을 지껄이는 사회 저명인사도 많았다.
'찢어 죽일 개새끼들이지.'
갈수록 욕이 늘어가는 연은 다시 서맥 요새의 현황을 보고 받았다.
기병대 사령관 기수가 지키는 서맥 요새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워낙 거리가 멀기에 이제야 도착한 사파비-무굴 동맹군 놈들은 요새를 둘러싸고 흙을 쌓아 둔덕을 높이 만들고 있었다.
"기수의 말에 의하면 대포 공격을 준비하는 것 같답니다."
"그래봐야 사거리가 안 나올 건데?"
"그것 말고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음···."
연은 작전판을 보다가 뭔가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 정용식을 보며 물었다.
"혹시, 놈들이 수공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의심이 들어서 서맥강의 상류까지 정찰을 보내 조사 해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뭐지? 쓸데없는 둔덕은 왜 높이 쌓는 거야?"
"지금 파악 중이라고 합니다."
연은 몇 번이나 서맥 요새 주변 지도를 살펴봤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서맥 요새 주변은 평지나 다름없다.
더구나 요새를 따라 해자까지 파 놓았기에 수공은 물론 땅굴을 파기에도 용이치 않았다.
바로 남쪽에 예맥해가 있고, 주변 곳곳은 물웅덩이인 초원지대라 전기를 이용한 양수기가 없다면.
'가만있자. 놈들이 열식 발전기를 받아 갔지. 설마 그걸 바로 복제한 건 아니겠지.'
열식 발전기를 복제할 수 있다고 쳐도, 모터를 만들 수 없으면 땅굴을 파면서 물을 퍼 올릴 수는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뭐지?'
사파비-무굴 동맹군 놈들이 요새를 포위만 하고 둔덕을 쌓고 있다니 도무지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2.5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현두 요새이지만, 3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카자크 농병들이 들어오자 북적거렸다.
그들을 한곳에 몰아 놓고 관리하고 있지만, 식량과 물을 실어 날라 주느라 요새 안은 시끄러웠다.
요새 한쪽.
카자크 농병들이 임시로 만든 막사 안에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 기어 나왔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곳곳에서 전투식량을 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양질의 음식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너무나 말라 있었고 남루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현수는 착잡했다.
"개새끼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심양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던 시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
청나라 놈들이 잔인한 건 틀림없었지만, 노예라 해도 사람 취급 정도는 해줬다.
멀리 바라보았다.
죽을 받아먹고 있는 농병들이나 요새 밖에서 진을 치고 이곳을 노리는 놈들이나 모두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놈들은 사람 목숨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죽여버려야 해."
몇 시간 전, 백령도 사령부에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현수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작전 참모가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어제 충격이 컸나 봅니다. 놈들이 오늘은 조용합니다."
"다행이다. 이틀만 기다리면 지원군이 도착하니 그때 모조리 죽여 버리자."
"""멸!"""
현수의 말에 주위에 있던 장교들이 단호하게 외쳤다.
백령도 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도 있었지만, 대원들과 병사들이 죽은 마당에 놈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해가 뜨자.
놈들이 멀리서부터 땅을 파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