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대전쟁시대(14) >
은쌍식이 가리킨 곳은 아주 먼 곳이었다.
생각지도 못했고, 아직은 진출할 마음도 없던 곳이다.
'그보다 더 좋은 땅이 있는데 굳이···.'
물론 나중에라도 충분히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작전판과 은쌍식을 번갈아 봤지만, 은쌍식은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조경 함선을 보내서 뒤를 치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사장님."
계속되는 은쌍식의 주장에 연은 다시 지도를 살폈다.
"흠···, 나쁘지 않구나."
연은 자를 들어서 거리를 재봤다.
"12,000km 가 넘는군."
"맞습니다. 사장님. 지구의 4분의 1이 넘는 거리입니다."
연구원이나 공돌이가 아닌 은쌍식의 말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조선전력공사 직원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초등학교나 신병 교육을 받은 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연은 조선에 미터법을 도용하면서 이런 내용을 기본으로 가르쳤다.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km이다. 그러니 1초면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계산하셨습니까? 사장님.'
'낮과 밤이 같을 때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지기 전을 지구의 반으로 보고 2만km로 정했다.'
'사장님, 굳이 2만km로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하루도 12시간씩 두 번 있지 않으냐. 또한 백보다는 천이 낫고, 천보다는 만이 더 좋지 않으냐.'
근거도 없는 우격다짐이지만 세종대왕 다음으로 위대한 과학자인 사장님의 말씀이라 연구원들은 믿고 따랐다.
'따라서 지구의 둘레는 4만km이다.'
연이 대충 말한 것 같지만, 사실 미터법 자체가 이런 식으로 정의됐다.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정한 1m는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1만km로 정해 놓고 삼각함수를 이용해 정확한 1m 값을 구했다.
아무튼 은쌍식의 말에 연은 해경 사령관 해수를 보고 물었다.
"그곳까지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연의 물음에 해수는 한참 계산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닐라에서 한 차례 보급을 받고 간다고 해도 넉넉잡아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생각보다 엄청 빨랐다.
육상과 달리 수상이동은 24시간 움직일 수 있다.
그러기에 21세기에도 해상운송이 대세였다.
"정확한 해도가 없어도 괜찮겠느냐?"
"네덜란드와 스페인 놈들에게 입수한 해도를 분석해 봤습니다. 먼바다로 운항한다면 싱가푸라(Singapura)를 지난 때 말고는 문제 될만한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연은 막대를 들어 작전판의 말들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면서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은쌍식과 은진이, 삼복이, 정용식, 해수의 조언으로 작전은 새롭게 구상되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막대를 작전판 위에 내려놓은 연이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명심하도록 해라.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대원들과 병사들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모든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고 착오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사장님."""
정확하진 않지만, 알아낸 연합한 놈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아무리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지만, 사람 목숨 알기를 똥간의 막가지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놈들이다.
그러니 대비해야만 했다.
"놈들이 인해전술(人海戰術, Human Wave)을 쓸 게 틀림없다. 이를 명심하고 양순이는 무기 생산에 차질 없도록 해야 한다."
"네, 사장님. 그런데 인해전술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화살받이로 쓸 게 틀림없다는 말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양순이는 고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갑게 변해버렸지만, 그 누구보다 따듯한 심정을 가진 이가 바로 양순이었다.
작전을 새로 짜면서 연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다.
조선군 병사들에게 그들이 원했던 조2 소총을 쥐여 줬지만, 눈앞에서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육경 사령관인 정용식도 인지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신의주에서 싸울 때도 몇몇 대원들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미쳐 날뛴 적이 있었다.
그런 대원들은 전투가 끝난 후에 바로 후방으로 배치했다.
처참한 환경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는 아군은 적군보다 더 최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투 경험이 없는 조선군 중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그런 상황에 부닥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총알만 낭비할 수 있기에 지원자가 아니면 요새 방어에 투입하지 말라고 했다.
'총알도 문제고.'
1인당 300발을 쓸 수 있게 충분히 보내줬지만, 적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용식아!"
"네, 사장님."
"기수에게 연락해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요새만 사수하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해수 너는 새로 건조된 조경 함선을 타고 바로 출발하도록 하고."
"네, 사장님."
연은 전략회의실에 모인 조선전력공사 수뇌부들에게 일일이 임무를 할당했다.
* * *
거대한 호수를 끼고 건설된 현두 요새에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병력이 나타났다.
봄이 되자 자라기 시작한 무성한 풀과 나무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기에 놈들의 진지는 한 눈에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놈들은 요새에서 2km 나 떨어진 곳에 흙을 쌓고 그 뒤에 진을 치고 움직이지 않았다.
놈들이 예맥 산맥을 넘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군 15사단장 현수는 즉시 예맥 기병대를 내보냈다.
'절대 놈들 가까이 가지 말고 정찰병만 노려라! 사로잡아오면 좋지만, 위험하다 판단되면 바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알겠나?'
예맥 기병대와 놈들의 정찰병 사이에서 소규모 전투가 수도 없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죽지는 않았지만, 다친 기병대원들이 많았다.
울창한 숲으로 덮인 예맥산맥은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예맥 기병대원들에게도 힘든 곳이었다.
그래도 정찰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적이 언제 도착할지 예상을 해야 만이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고 대처할 수 있어서이다.
보초탑에서 멀리 떨어진 적의 진지를 보며 육경 대원과 지원에 나선 조선군 병사가 말을 주고받았다.
"와···! 엄청나게 많네요."
"너는 겁나지도 않냐?"
"겁나긴요. 이제야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짜식!"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조선군 병사를 보고 대원은 씩 웃어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지원자가 있었기에 보초탑 근무자는 지원자 중에 최고라 불리는 이만 올라 올 수 있었다.
그들 중 제일 약해 보이는 데도 의지만큼은 최상이었다.
"다행이다. 자신감이 있어서."
"고향에 가도 자랑거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죽지도 말고 다치지도 말고 꼭 살아서 고향에 가서 자랑해야 한다. 알았지?"
"멸!"
들떠 있는 병사의 보며 대원은 옅게 미소 지었다.
대원 또한 저런 시절이 있었다.
두현이는 심양에서 세상을 떠나버린 부모 대신에 옆집 사는 순덕이네 부모님과 함께 옹진반도로 왔다.
어릴 때부터 주먹 대장이라 불릴 정도로 주먹이 컸던 두현이는 경비대 모집에 지원했다.
순덕이네 집에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백령도 용기포에서 싸움에 휘말려 한동안 염전에서 젊은 혈기를 다스려야 했다.
장교가 되지 못하고 최고 선임대원으로 남은 두현이는 적진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총신이 견딜지 모르겠네.'
아무리 봐도 적이 너무나 많았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보초탑이기에 포탄에 직격을 당한다고 해도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다.
하지만 조101 기관총의 총신이 견딜지 의문이었다.
쉬지 않고 쏘다 보면 뻘겋게 달아오를 것이고 그때는 사용하면 안 된다.
'지원이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총알도 문제였다.
조선군이 오면서 가지고 온 총알은 300만 발이었다.
가지고 있는 총알까지 모두 계산해도 500만 발이 되지 않는다.
엄청난 양이지만, 적들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 때문에 보급 요청을 했지만, 앞으로 5일을 더 기다려야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턱대고 쏘지 말고 총알 아껴야 하는 거 알지?"
"네, 대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발에 한 놈씩 즉사시키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자신감 있는 병사의 말에 대원 또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효종 5년(1653) 4월 22일.
화성(火星)이 해와 별을 범하는 날.
아침부터 놈들이 몰려왔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놈들은 요새를 포위하고 무기 같지도 않은 것을 들고 다가왔다.
-겁먹지 마라!
-놈들은 총알받이일 뿐이다.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대기하라.
-발포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절대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놓지 마라.
스피커에서 명령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놈들은 어느덧 1km 안으로 들어왔다.
-대기하라!
-대기하라!
연신 대기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긴장되는지 병사들은 혀를 할 트며 총을 들어 적을 겨냥했다.
"와···! 엄청납니다."
다른 병사와 다르게 긴장이라고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창공이는 두현이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저놈들 신경 쓰지 말고 탄창 준비나 잘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대원님. 빵빵하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창공이는 50개들이 조101 기관총 탄창을 양손에 들고 흔들며 씩 웃었다.
최신 조103 기관총이 있었지만, 많은 문제로 인해 사용이 금지됐다.
휘날리는 먼지와 모래로 인해 작동 불량이 자주 일어났던 거였다.
또한 가스작동방식이라 쉽게 총구가 달아올랐고, 연사 속도도 빨라 총알 낭비가 심했다.
점점 다가오는 적들의 모습이 눈에 확인됐다.
"아무리 봐도 농민들 같습니다."
"맞아."
"참말입니까?"
"응."
두현의 말에 기관총 부사수인 창공이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그래서 지원자만 올라오라고 하지 않았냐."
"그랬었군요."
쟁기 같은 농기구를 손에 꼭 주고 걸어오는 적들 뒤로는 어깨에 날개를 단 놈들이 말을 타고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써댔다.
그러자 총알받이나 다름없는 농민처럼 보이는 병사들이 눈을 질끈 감더니 뛰어오기 시작했다.
"""우아아아···!"""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적으로 인해 넓은 현두 요새 안은 긴장감이 휩싸였다.
-기관총 사수는 몰려 있는 적부터 사격을 개시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두현이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냥한 후 옆에 달린 손잡이를 돌렸다.
-두두둥, 두두둥, 두두두두둥.
빗발치듯 날아가는 기관총탄에 아직 녹지 않는 땅이 들고 일어나면서 사방으로 흙이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총탄에 맞은 적들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창공이는 그 모습을 아예 보지 않고 탄창이 빌 때마다 새로운 탄창을 꽂아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병사 3명은 조2 소총을 꽉 잡고서 힘을 주었다.
"너희들도 대기해!"
"네? 네."
"알겠습니다."
"준비 끝났습니다."
기관총에 의해 무수히 스러져 가면서도 놈들은 100m 안까지 기어들어 왔다.
불을 질러 초목을 없애지만, 군데군데 남아있는 나무뿌리와 웅덩이를 이용해 놈들은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다가오는 놈들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으니.
-소총수들도 사격을 개시하라!
-전원 사격 개시!
-무턱대고 쏘지 말고 정확히 겨냥하라!
정신없이 땅에 엎드려 기어 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중에.
-팅! 퍽! 틱!
보초탑에도 적의 총알이 날아왔다.
총알받이로 내보낸 놈들 사이에 총을 든 놈들이 끼어든 것이다.
드디어 양쪽 모두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연사 속도가 빠른 후장식 소총과 일일이 화약과 탄약을 앞으로 집어넣고 발사하는 전장식 소총의 대결이 벌어졌다.
하지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철모 똑바로 써! 머리 내밀지 말고!"
"넵!"
-두두둥, 두둥둥.
-탕, 탕.
주고받는 공방 속에 대원들과 병사들도 부상을 입기 시작했다.
현두 요새 사령관을 맡고 있는 사단장 현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를 뿌듯 갈았다.
"놈들이 우릴 많이 연구했나 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정용식 사령관님께서도 이럴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정신없는 포화 속에서 작전참모는 정용식으로부터 하달된 명령을 떠올렸다.
'놈들은 우리가 소극적이란 걸 알고 다르게 대응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지원이 오기 전까지 버티면서 대기하라.'
군악을 울리고 북을 치며 총을 들고 걸어가면서 서로 쏘아대는 전열보병(戰列步兵, Line Infantry) 시대가 막 시작되었는데 전술이 바뀌었다.
바로 조선군 때문이었다.
교환비가 성립되지 않는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을 전열보병 따위로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놈들은 방법을 바꿨다.
해마다 수도 없이 전쟁을 치르고 약탈을 일삼았던 루스 차르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조선군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놈들은 자신들의 병사가 죽거나 다치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니 요새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놈들에겐 총알을 쏟아 내는 기관총이란 것이 있지 않소?'
'땅에 엎드려 기어가게 하면 됩니다.'
'그래도 사상자가 많이 나올 것 같은데···.'
'화살받이로 쓸 병사들을 먼저 보낸 후 병사들에게 신경 쓰는 사이 총 병을 내보내면 됩니다. 어차피 죽을 놈들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놈들에게는 밀떡 로켓이라는 가공할 무기가 있지 않소?'
'땅을 파고 숨어 있으면 피할 수 있습니다.'
'흠···.'
'수적으로는 우리가 10배가 넘습니다. 그것까지 소진되면 놈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적들은 철조망 근처까지 오지도 않았다.
80m쯤 남겨 놓고 흙을 파서 둔덕을 만들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기관총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젠장! 농기구를 들고 온 이유가 따로 있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즉시 대포를 쏴서 날려버려라!"
"넵! 사단장님."
드디어 현두 요새에서 대포가 발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