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대전쟁시대(12) >
효종 5년(1653) 1월 1일 새벽.
한양에서 서쪽으로 약 6,000km 떨어진 서맥 요새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경계병 구성 또한 평상시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경계병은 육경 대원 1명과 조선군 4명으로 구성된다.
요새에 주둔 중인 대원과 병사의 비율 차이도 있지만, 전투 경험이 있는 대원이 병사들을 훈련할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 대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눈발이 간간이 내리는 통에 써늘한 보초탑 안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선임이 딴짓을 하는 후임을 다그쳤다.
"너희들 눈 똑바로 뜨고 감시 안 할래!"
"죄송합니다. 선배님."
선임의 말에 후임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며칠 전 첩보가 입수되었다.
일련의 기마병들이 볼가강을 넘어 이곳 서맥 요새로 오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 인원은 약 100여 명.
즉시 예맥 기병대가 출동했다.
그와 동시에 경비태세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도 들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조선군 병사들이었다.
이곳에 이제 막 도착한 조선군 병사들을 위해 사령관 기수가 특별조치를 내렸다.
'새해 첫날은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은 조선군 병사들을 위해 대원들이 대신 경계를 서기로 했다. 그러니 그날은 모두 편하게 쉬도록 하라.'
원래부터 방위군 성격으로 훈련된 조선군은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막사를 짓고 정비하느라 쉬지 못했다.
또한 새해 첫날은 조선방송공사에서 라디오방송을 시작하는 날이었기에 편의를 봐준 거였다.
아무튼 며칠 전부터 병사들은 들떠 있었다.
엄청난 수의 적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조선군 병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다.
조선의 우수한 무기를 믿고 기고만장한 거였다.
보고를 받은 기수는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볼가강을 넘어 온 인원은 소규모라 루스 차르국이나 아니면 폴란드에서 보낸 정찰병이 틀림없었다.
기수는 예맥 기병대를 내보내면서 강하게 명령했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멸!'''
갑자기 예맥 기병대가 요새 밖으로 나가는 돼도 병사들은 '멸'을 연달아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에게 있어 경비대원과 예맥 기병대는 우상이나 다름없었기에 적을 멸하는 건 일도 아니라 생각했다.
경비대원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 막사 안은 들떠있었다.
따듯한 막사 안에서 병사들은 한곳에 모여 귀를 기울였다.
"정말 저기서 소리가 나오는 거야?"
"맞다니까 그러네. 무전기처럼 나온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아니 오시(낯 12시) 정각에 방송한다고 그랬는데 벌써 나온다고 하니까 그러지."
"이런 멍청이를 봤나! 시간 기점인 백령도와 이곳의 시차가 5시간이나 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이해를 못 하네."
"그 시차라는 게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
"우리가 사는 지구가 둥글어서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런 갑다 해."
두 조선군 병사가 떠들고 있는 사이에 현지 시각으로 오전 7시가 되었다.
"모두 조용히 해라!"
소대장을 맡은 병사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지지직~!
"나, 나온다!"
"아이, 씨! 조용히 좀 안 할래!"
모두가 들떠있는 가운데 시끄럽게 떠드는 병사를 보고 짜증이 났는지 누군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 또한 오늘 방송을 듣기 위해 며칠 전부터 들떠 있긴 마찬가지였다.
-지지직, 안녕하십니다. 조선방송공사에서 현재 시각을 알려드립니다.
베개만큼 커다란 라디오에서 '땡!' 소리와 함께 간단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와···!"""
잡음이 엄청 많이 들렸지만, 틀림없는 사람의 말소리였다.
그것도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선식이였다.
"조용! 조용! 조용히 하란 말이야!"
소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째려보자 병사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소인은 조선방송공사의 사장이자 만담꾼인 선식이입니다.
-폐하와 전하께서 지원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라디오방송을 시작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선식이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합창하듯 외치는 목소리도 따라 흘러나왔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병사들도 그 소리를 듣고 함께 엎드려 외쳤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참으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미리부터 무전기를 접했기에 라디오라는 것이 신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선식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흥분했는지 입을 열고 싶어 환장했다.
하지만 소대장의 살벌한 눈초리 때문에 입을 열순 없었다.
대시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거렸다.
-다음으로 조선의 명창 예은이의 노래를 감상하시겠습니다.
"""와···!""""
예은이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진 못했지만, 독특한 가락에 빠른 노래는 젊은 병사들의 우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은 자신이 알고 있던 뽕짝을 선식이에게 알려주고 적당한 가수를 선정해 부르게 했다.
그게 바로 예은이었다.
병사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예은이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이 씨, 참말로. 다들 죽고 싶어!"
"소대장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어···, 미안하다."
습관대로 꺼낸 소대장의 말에 병사 한 명이 딴지를 걸었고, 소대장은 바로 사과했다.
이제 조선에서는 '죽이겠다'는 말은 범죄에 속하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나자 선식이의 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방청객이라 불리는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를 듣는데 배꼽이 빠질 것 같았다.
찌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최초의 라디오방송은 출력이 무려 200kw나 되었다.
엄청난 출력이지만, 6,000km 나 떨어진 3곳의 요새에서는 잡음 반 소리 반으로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즐거워했다.
-다음은 멀리 서쪽에서 조선의 영토를 지키는 조선군 병사들을 위해 군가를 들려주겠습니다.
-모두 일발 장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식이의 말에 병사들은 막사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흔들면서 따라 불렀다.
그 후로도 선식이의 재미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 *
옹진반도 출신 예맥 기병 연대장 방두는 여진족 출신 대대장들에게 작전을 하달했다.
"손방이 너는 놈들이 지나가거든 대대를 이끌고 후미를 막아라."
"멸!"
"공환이는 나와 이곳에 남아 놈들의 정면을 친다."
"멸!"
"용오는 대대 병력을 둘로 나눠 양쪽에 대기하라."
"멸!"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보안 참모는 상인으로 변장하고 수시로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입수한 정보를 휴대용 무전기를 사용해 보고했다.
알칼리 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방두가 명을 내린 지 4시간 후.
멀리 숲에서 특이한 복장을 한 기마병이 빠져나왔다.
"저건?"
"맞습니다. 폴란드 놈들입니다."
어깨에 커다란 날개를 붙이고 가슴을 판금으로 보호한 놈들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몰았다.
망원경으로 놈들을 살피던 참모가 입을 열었다.
"놈들도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상황을 살피던 방두가 명령을 하달했다.
"총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놈들 100m 안으로 다가가지 말고 대기하라."
"넵!"
"혹시라도 놈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무조건 쏘고!"
"넵!"
"가자!"
"""멸!"""
방두가 이끄는 예맥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벌판에서 갑자기 말들이 튀어나오자 놈들은 당황했는지 급히 말을 멈추었다.
초원 지역이라 곳곳에 웅덩이가 있었고, 그곳은 천 명이나 되는 기병대를 감추기에 충분했다.
놈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리 많은 기병이 나타날지 몰랐다.
서둘러 말을 돌린 놈들은 빠져나온 숲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곳에도 예맥 기병대가 조3 소총을 겨누면서 나타났다.
전후좌우 모든 곳이 포위된 놈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지 말을 타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방두가 앞으로 나가더니 권총을 꺼내 하늘을 겨냥했다.
-탕!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총소리에 놀란 놈들은 도주를 포기하고 말에서 내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맥 기병대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쪽수에서 우위에 있기에 바로 달려가 치도곤을 칠 수도 있었지만, 괜한 일로 상처를 입었다간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자제했다.
-탕!
다시 공중으로 권총을 발사한 방두는 손짓으로 무기를 버리고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울긋불긋한 복장에 날개까지 달려서인지 놈들의 무장 상태를 멀리서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고작 100여 명 정도 되는 놈들은 수많은 기병에게 포위당한 상태인 것을 인지하고 겁을 먹었는지 순순히 따랐다.
* * *
은동리에서 연과 은쌍식은 흐뭇한 표정으로 선식이의 라디오방송을 듣고 있었다.
매일 정오부터 1시간 동안 방송되는 선식이의 라디오방송은 점심 후 즐기기에 딱 좋았다.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은이는 숫기가 없지만, 마이크만 잡으면 열창을 하지 않느냐?"
"선식이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놈은 평시에도 떠들어 댄다."
"그건 그렇죠."
"한데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혼자 조용히 있더라."
"아···, 선식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흥이 나는 거군요."
선식이의 라디오방송이 끝나자 은쌍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연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정찰을 계속 보내는 것 같습니다. 벌써 요새 3곳에서 잡아들인 놈들만 800명이 넘습니다."
"당분간 계속 그럴 것 같으니 경계를 누추치 말라고 전해라."
"네, 사장님. 그런데 그러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아마 가장 약한 곳을 찾으려 하는 걸 거다."
"현두 요새가 치기에는 제일 좋은 곳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짚어 보지 않겠느냐?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연은 사파비 제국의 사신이 돌아간 후, 연락이 없는 게 걱정되었다.
조선의 수석총을 주고 오스만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혹시, 놈들이 다른 곳과 연합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큰일 아닙니까?"
"···."
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은쌍식의 눈이 커졌다.
"이런···!"
"걱정하지 말아라.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보낸 것이니."
"그래도···."
연은 아무래도 사파비 제국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예맥해 남쪽 3 제국 중 가장 약한 곳이라 생각하고 사파비 제국을 아군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었다.
걱정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은쌍식과 달리 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다들 말박이의 후손들이란 말이지."
역사를 잘 알지 못하여 그동안 착각을 했었다.
그런데 조서원의 보고를 살핀 후 알고 보니 그쪽 세상은 모두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칸'이나 '한'으로 발음되는 놈들은 나라는 모두 약탈과 씨뿌리기를 좋아하는 몽골족들이 세운 거였다.
어찌하다 이슬람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슬람 교리와 달리 호전적이었다.
물론 그러지 않는 나라가 없는 세상이다.
연은 지도를 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 못 생각했군."
21세기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국이니 인권이니 침략은 나쁜 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세상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식민지로 삼고 약탈하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국사도 중요하지만, 세계사도 배워야 해."
연은 세상의 관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 짱박혀 살았던 한민족.
세상의 중심은 대륙이었고, 찢어 죽일 원수는 바다 건너 왜놈들이었다.
그런데 x선비들로 구성된 지도층이 문제였다.
대륙에 사대하고 섬기기 바빴다.
시도 때도 없이 바다를 건너와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의 침략이 있었지만, 응징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끝내 정복당했다.
21세기에서도 이런 시류는 변하지 않았다.
대륙은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노렸다.
왜구들은 한반도를 삼키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친중파, 친일파 놈들은 중국과 일본을 찬양하며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은 원래 세상이 그런 거라는 걸 알지 못하고 분노만 하고 있었다.
연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다.
"쌍식아."
"네, 사장님."
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은쌍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섰다.
"우리 조선을 넘보는 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이 필요 없습니다. 다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 당연한 건데 내가 몰랐구나."
"아, 아닙니다."
오늘따라 연의 모습이 생소했다.
그래서인지 은쌍식은 고개를 내 저었다.
"너도 아는 것을 내가 몰랐다. 하지만!"
연은 몸을 돌려 은쌍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13살이 된 연은 은쌍식과 키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은쌍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가끔 볼 수 있는 이런 눈빛을 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떨렸다.
"덤비는 놈들은 그냥 둘 수 없다."
"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니, 용식이와 은진이를 불러와라. 다시 작전을 짜야겠다."
"넵!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