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01화 (101/275)

< 101. 대전쟁시대(4) >

마닐라 동쪽에는 서울시보다 더 넓은 라구나 호수(Laguna Lake)가 있다.

베이 호수라고도 부르는 이 호수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팍상한 폭포와도 연결되어 있다.

라구나 호수에서 시작된 파시그강은 마닐라를 관통하여 동에서 서로 흐른다.

마닐라만과 만나는 파시그강 하구에는 스페인 도적놈들이 지어 놓은 산티아고 요새가 마닐라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불타고 있었다.

그것도 활활!

수차례에 걸친 네덜란드의 침공에도 끄떡없었던 산티아고 요새는 조경 3호선의 함포 사격을 견디지 못했다.

폭발하지 않는 포탄이라고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 온 포탄으로 해안 포대가 박살 나버렸다.

발생한 유폭으로 둘레가 620m밖에 안 되는 작은 산티아고 요새는 초토화되면서 불바다가 되었다.

"으악···!"

메케한 연기와 함께 타오르는 요새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사, 사령관님께서···."

운이 좋았는지 쉴 새 없이 날아온 포탄에도 생명을 건진 총독의 비서 유스타시오는 할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선전 포고 서신을 받은 후 네덜란드 함대를 기다렸지만, 10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단순한 협박이라 단정 지은 로렌조 총사령관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8일 동안 밤낮으로 네덜란드 놈들의 공격을 기다리다 보니 모두가 지쳐버린 탓이다.

로렌조의 허락이 떨어지자, 광란의 밤이 시작되었다.

마을에서 원주민 처녀들을 데려오고 오크통을 열어서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조경 3호선의 함포 사격과 함께 광란의 축제는 막을 내렸다.

요새 안에서 파고들어 온 포탄은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던 놈들을 친절히 저승길로 안내했다.

총사령관 로렌조 또한 얼굴만 남겨 놓고 요새와 함께 파묻혀 버렸다.

유스타시오는 망가져 버린 로렌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헉!"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짚자 놀란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살려··· 줘."

왼쪽 어깨 아래가 사라져 버린 병사가 눈앞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

병사는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흑!"

두려움이 몸을 지배하는지, 살아남은 유스타시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스페인 병사들과 함께 원주민들을 죽일 때는 희열을 느끼며 짜릿했지만, 당하는 처지라 느낌이 달랐다.

전신을 휩싸이며 퍼져나가는 자릿함은 공포였다.

-후두둑. 퍽!

불에 타서 무너지는 목조건물 사이에서 기둥이 삐져나와 눈앞에 떨어지며 불꽃을 튀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스타시오는 소리쳐 울부짖으며 요새 남쪽으로 달려갔다.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한쪽이 무너진 총독 관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참사가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지 파하르도 총독은 관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쾅! 쾅! 쾅!

"총독님! 총독님! 문 좀 열어 보십시오. 큰일 났습니다."

파하르도는 자신이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원주민 여자들을 끼고 넓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원주민 여인 중 한 명이 쿵쾅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초점이 흐릿했다.

약을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넘실거리는 불빛에 정신을 차린 여인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흐느적거리는 팔을 움직여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총독을 깨웠다.

"일어나··· 보세요. ···총독님."

하지만 파하르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시체나 다름없이 늘어져 있었다.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여인은 힘을 내 일어나 옥으로 만든 물잔에 물을 가득 따라 파하르도 얼굴에 부었다.

"뭐, 뭐야!"

차가운 느낌에 잠에서 깨어난 파하르도는 물잔을 들고 있는 여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손을 휘둘렀다.

고개가 휙 돌아갈 정도로 얻어맞은 여인은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꽝! 꽝! 꽝!

창밖에서 밀려오는 열기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파하르도는 여인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크흠···."

여인의 행동이 자신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았지만, 파하르도는 사과 따위의 말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난 거야?"

답은 알고 있었다.

"놈들이 쳐들어왔군. 개만도 못한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이를 뜨듯 갈고 난 파하르도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도 쿵쾅거리고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열린 문을 통해 눈앞에 공포에 질린 비서 유스타시오가 보였다.

"어찌 된 일이냐?"

"총독님, 큰일 났습니다. 네덜란드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피해 상황은?"

"보시다시피 요새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크흠···."

파하르도는 인지부조화를 겪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총독님!"

비서가 어깨를 잡고 흔들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파하르도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불길이 산티아고 요새를 집어삼키고 있는 모습이 파하르도의 눈동자에 맺혔다.

"이런! 빌어먹을!"

꽉 깨문 파하르도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동안 초긴장 상태였다.

다두 왕국을 앞세워서 네덜란드가 쳐들어올 거로 생각했기에 잠시도 쉬지 못했다.

그런데 10일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어젯밤 과음을 하고 약에 취해서 광란의 밤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띵하니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피신하셔야 합니다."

"크흠. 물! 물 좀 다오."

파하르도는 숙취인지 약취인지 모르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병째 물을 들이켰다.

하지만 숙취가 가시지 않는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총독님, 어서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응? ···알았다."

잠시 지체한 사이에 총독 관저에도 불이 옮아 붙었고 빠르게 번져 나갔다.

총독은 가운만 걸친 채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관저에서 벗어났다.

적의 포격으로 인해 요새의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다가 주저앉았다.

'천운이구나.'

총독 관저 또한 반쪽이 무너져 있었다.

성호를 그리고 난 파하르도는 자신의 운이 감사했다.

"로렌조는?"

"총사령관님께서는···."

"크흠···."

어찌 됐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남더라도 치욕을 당할 게 분명하다.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화된 스페인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앙헬레스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닐라에서 80km 북쪽에 있는 앙헬레스에는 그곳을 지키는 스페인 병사들이 있다.

용병들도 있으니 살아남기에는 최상의 장소였다.

"가자!"

"네, 총독님."

파하르도와 비서는 급히 마닐라를 벗어나 북쪽으로 도망갔다.

* * *

난장판이 된 파시그강 하구에 서서히 해가 떠올랐다.

멀리서 갤리온 5척이 산티아고 요새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하, 바로 상륙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한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다.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포격 후 상륙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조선전력공사 해경 대원들에게 교육받은 대로 전사들이 함포 사격을 준비하자, 견시병이 깃발을 흔들었다.

-쿠앙! 쿠앙!

처참하게 무너진 산티아고 요새가 또다시 피격을 받으며 돌이 튀고 흙먼지가 휘날리면서 간간이 불꽃이 피어올랐다.

파시그강 어귀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는 이슬람교도의 학살자라고 알려진 스페인의 수호성인 하메스(Saint James)의 이름을 따서 지은 요새이다.

삼각형 형태로 만들어진 산티아고 요새는 작은 성이지만, 탑이 없다.

대신 삼면에 산타바바라, 산 페르난도, 산 미구엘이라 불리는 포대가 있었다.

하지만 써보지도 못하고 포대는 사라져 버렸다.

한 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분당 5발을 쏠 수 있는 조303 대포 4문이 품어대는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또다시 다두 왕국의 갤리온들이 포격을 시작하자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화산 응회암으로 단단히 지어졌다고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포탄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카마찻 왕은 손바닥을 활짝 펴서 들어 올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만 사격을 중지하고 상륙하라!"

"네, 전하."

파시그강 하구로 들어온 갤리온들은 산티아고 요새 바로 옆에 정박했다.

동시에 다두 왕국의 전사들이 갤리온에서 쏟아져 내렸다.

"무기를 든 놈은 가차 없이 죽여라!"

"""충성!"""

조선에서 지원한 수석총을 든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마닐라 곳곳으로 흩어져 점령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싸움이 벌어졌지만, 2천 명이 넘는 다두 왕국의 전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체테(Machete)라 부르는 정글 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원주민들이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갤리온의 높은 곳에 올라가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마찻 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믿을 수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다두 왕국 장군은 카마찻 왕과 마닐라 시내를 번갈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노예나 다름없는 원주민들의 저항은 극심했다.

"지배를 받는데도 어찌 저리 충성한단 말인가?"

"종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음···."

카마찻 왕은 자신들과 다른 필리핀 원주민들의 저항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끄는 다두 왕국은 네덜란드 도적놈들에게 13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의 원주민들은 달랐다.

연은 대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을수에게 말했다.

'마닐라 원주민들은 다두 왕국 원주민들과 다를 거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들은 스페인 도적놈들을 위해 싸울 게 틀림없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저항이 극심할지 모르니 카마찻 왕에게 꼭 전해 주거라.'

연은 기억 속에 남은 오래전 일을 상기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연구원 시절 국제협력 차원에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랐다.

필리핀 민족의 영웅 라푸라푸 추장과 침략자 마젤란의 동상이 함께 추앙받고 있었다.

마젤란 기념비에는 '영광의 스페인(GLORIAS ESPANOLAS)'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마젤란을 기리는 제단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안내를 맡은 가이드에게 물어봤다.

그때 들은 가이드의 설명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필리핀 국민의 83%가 가톨릭을 믿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을 전파한 마젤란을 영웅으로 떠받든다고 하네요.'

스페인과 네덜란드 전쟁에서 원주민들이 스페인군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 막탄섬과 달리 마닐라에는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Jose Rizal)을 위한 공원도 있으니 가보세요. 그곳은 다를 겁니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연은 을수에게 필리핀 원주민들을 절대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 * *

효종 4년(1652) 10월 27일.

다두 왕국이 마닐라에서 스페인 도적놈들을 몰아내고 있는 가운데 연은 효종의 부름을 받았다.

"전번 달에 삼남에서 지진이 발생하더니 이번에는 천둥 번개가 심하구나. 어제는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하니 무슨 일이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백성들이 불안해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지구가 둥글고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믿는 효종이라도 영성(靈星)으로 부르는 천전성(天田星)이 달에 먹히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안 했지만, 연이 몽골을 치고 서역까지 진출할 것 때문이라는 소문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아버지, 자연 현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러시다가 병이 날까 두렵습니다."

"음···. 매일 같이 네가 말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으니 나는 괜찮다. 그런데 지진과 천둥, 번개, 영성이 달에 먹혔다며 음의 기운이 팽배해졌다고 난리구나."

"일본이라면 몰라도 조선에서 지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둥과 번개는 기압의 차가 다른 대기가 만나면 발생합니다. 당연한 기상 현상이니 이 또한 무시하셔도 됩니다.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이 별빛을 가리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은 다시 한번 천체의 운행에 관해 효종에게 설명했다.

아버지인 효종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연필로 그려가며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찻주전자와 찻잔까지 동원하여 보여 주자 효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효종의 모습을 보고 의아했다.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은데···.'

효종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음···. 요즘 들어 관상감(觀象監) 관리들이 유난을 떠는구나."

그러면서 시작된 효종의 말에 연은 분노가 치밀었다.

국가정보원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조서원은 외국 정보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가정보원과 마찰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대만에 있는 다두 왕국이 조선의 속국이 되었다는 말이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퍼져나갔다.

게다가 다두 왕국을 지원해 마닐라에 있는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자 한다는 것까지 알려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군이 서역(西域, 둔황)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일까지 알려지자,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어째 21세기나 똑같냐.'

아직 전화조차 보급되지 않는 조선이지만, 소문은 빛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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