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대전쟁시대(2) >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인 파하르도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됐다.
"도대체 뭣들 하는데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비서인 유스타시오가 나간 지 하루가 지났건만, 그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스페인령 필리핀 총사령관인 로렌조(Lorenzo de Orella Y Ugalde)를 찾아 나선 비서조차 나타나지 않자 파하르도는 초조함을 넘어 불안감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벌써 당한 거 아닌가?'
전에도 네덜란드 놈들이 마닐라 남쪽에서 반란을 주동했지만, 한동안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넓었고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파하르도는 원주민 시종에게 화를 냈다.
"당장 꺼지거라! 미개한 것들 같으니라고."
파하르도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원주민이지만, 네덜란드와 전쟁에서는 그들이 도왔다.
그는 그런 사실을 잊었는지 들고 있던 채찍으로 황급히 나가는 시종의 등짝을 갈겼다.
그때 누군가 들어 왔다.
"늦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해 눈이 뻘게진 파하르도 앞에 로렌조 장군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요? 연락한 지 이틀이나 지났소."
"죄송합니다. 총독님. 앙헬레스에 있었습니다."
"크흠."
파하르도는 짜증이 났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덜란드 놈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일 때문에 늦었다니 안심이 되었다.
총사령관 로렌조는 원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수시로 순찰하고 있었다.
"즉시 회의를 시작합시다."
"네, 총독님."
장군과 장교들이 모이자 총독은 즉시 전쟁 회의(Council of war)를 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흥분한 파하르도는 네덜란드를 비방하며 욕 찌꺼기를 내뱉었다.
"간악한 네덜란드 놈들이 미개한 다두 왕국 이름으로 선전포고문을 보내왔다. 이는 정면으로 로마 가톨릭의 선언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둬선 안 된다."
1647년 4월 6일, 도미니카 교부 총독 디에고 로드리게스 신부는 수도회를 대신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했다.
1년 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필리핀에서 벌인 5차례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이긴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마닐라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두 나라의 전쟁에서 스페인군은 전투조차 할 수 없는 낡은 배 2척을 가지고 병사 15명만 죽고 승리를 거뒀다는 이유였다.
다시 말해 스페인의 승리는 하나님의 뜻이란 거다.
"맞습니다. 총독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놈들은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합니다!"
총사령관 로렌조 장군은 탁자를 내리치며 거칠게 외쳤다.
"그래서 장군에게 부탁하오. 우리가 10일 안에 떠나지 않으면 침공한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소. 그러니 당장 오늘부터 전시 상태로 전환하고 놈들을 환영할 준비를 해주시오."
"네! 총독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앞으로 8일 남았소."
"서두르겠습니다."
로렌조 장군은 즉시 흩어져 있던 병사들을 소집했다.
그 안에는 필리핀 원주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원주민들은 정복자인 스페인을 따랐다.
전에도 네덜란드와 치렀던 전쟁에서 원주민들이 단단히 한몫해냈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 *
선전포고 서신을 받은 후, 정확히 11일이 지난 새벽.
조경 2호선과 3호선이 선두에 나서고 뒤에는 갤리온 5척이 이끌려 따라왔다.
산토도밍고 요새를 공격한 후 네덜란드가 남긴 갤리온은 10척이나 되었다.
하지만 쓸만한 배는 5척뿐이었다.
다두 왕국의 카마찻 왕은 나머지도 수리하고 싶었지만, 대만에서는 티크 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마닐라를 정복하면 지천으로 널린 티크 목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인지 카마찻 왕은 들떠 있었다.
30~34문의 포를 가진 갤리온 10척이면 동남아시아에서 강자가 될 게 틀림없었다.
연은 알아서 숙이고 들어온 다두 왕국에 전리품인 갤리온을 모두 주었다.
나무로 만든 범선인 갤리온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조선 최초의 속국이자 우방국인 다두 왕국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조경 2호선에는 함장인 을수와 박문식, 카마찻 왕이 함교에 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꺼낸 이는 을수였다.
이번 작전의 총지휘는 을수가 맡았다.
"전하의 전사들이 시간에 맞춰 산티아고 요새의 포대와 함선이 있는 곳에 불을 밝히면, 우리는 그곳을 박살 내고 빠질 겁니다."
"알겠소.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단단히 주지시켜 놓겠소."
카마찻 왕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 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닐라는 자신의 왕국이 될 곳이다.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자신과 자산의 전사들이 나서야 한다.
"갤리온의 적정인원은 200명 정도인데 현재 500명이 넘게 승선해 있습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마시고 멀리서 포격한 후에 안전이 확인되면 상륙하십시오."
"당연하지요.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오. 그러니 안심하시오."
그동안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갤리온을 타고 대만에서 해남도를 오가며 훈련을 수행했다.
그 결과 전사들은 믿을 수 없는 정예화되었다.
마닐라만 서쪽 입구에 도착한 조선-다두 함대는 운행을 멈추었다.
멀리 떨어진 코레히도르섬을 바라보며 을수는 카마찻 왕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이곳에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한데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소. 내 전사들이 싸우는데 지켜만 볼 순 없소."
"그러시다면 이것을 걸칠 싶시오. 총알을 막진 못하지만, 칼이나 활은 막을 수 있고 바다에 빠져도 가라 앉지 않으니 전하의 안전을 지켜 줄 겁니다."
"고맙소."
을수는 모든 해경 대원이 착용하고 있는 방검복 겸 구명조끼를 카마찻 왕에게 주었다.
구명조끼를 걸친 카마찻 왕은 단정(短艇)을 타고 자신의 갤리온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을수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조이, 조삼 나와라. 이상."
-치지직, 조삼 신호 양호하다. 말하라. 이상.
"즉시, 작전대로 시행한다. 이상."
-알았다. 이상.
무전을 끝낸 조경 3호선 함장 병수는 즉시 함선을 출발시켰다.
"파시그강(Pasig River)에서 5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라."
"네, 함장님."
마닐라만은 엄청나게 넓었다.
좁은 곳도 38km가 넘었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밤에도 조경 3호선은 안전하게 만 안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군항으로 쓰기에는 최적의 장소구나."
마닐라만 깊숙한 곳에 있는 마닐라는 천연의 항구이자 요새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조경 2호선과 동시에 들어가도 되지만, 이번에는 조경 3호선 단독으로 공격한 후, 빠지기로 작전을 세웠다.
새로운 무기를 탑재했기에 3호선 한 척으로도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 요새를 공격하면서 조경 2호선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조경 3호선에 이끌려 옹진반도에 도착한 2호선은 즉시 수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급한 대로 수리를 마쳤지만, 내부 곳곳이 불에 타버려 전과 같지 않았다.
연은 실의에 빠진 을수를 격려했다.
'포기하고 새로 만들고 있는 함선이 완성될 때까지 쉬거라.'
'아닙니다. 사장님. 제 첫 함선인데 함께 하고 싶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알았다. 그래도 건조하고 있는 함선이 완성될 때까지 만이다.'
'네, 사장님.'
새로운 함선이 완성되면 그때 옮기기로 하고 을수는 조경 2호선을 타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만용이나 다름없는 용기를 용맹이라 잘못 알고 있는 다두 왕국 전사들을 자신이 직접 훈련하고 싶어서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조경 3호선을 보고 을수는 선전을 기원했다.
이번에 새로 탑재된 대포가 있기에 걱정할 일은 없지만, 백령도에서 함께 자라왔던 해경 대원들이 다치지 말기를 바랐다.
공격에 나선 조경 3호선의 대원들.
후방을 맡기로 한 조경 2호선 대원들.
마닐라에 상륙하여 점령전을 치러야 할 다두 왕국의 전사들 모두 초조함 따위는 없었다.
그만큼 이번 마닐라 점령을 위해 훈련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
조경 3호선이 마닐라만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섬을 지나 카비테 항구로 빠르게 다가갔다.
코레히도르섬은 나중에 요새로 탈바꿈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가 확정되고, 다두 왕국이 마닐라를 점령하면 조선에서 코레히도르섬과 근처에 있는 작은 섬들을 영구 조차하기로 했다.
마닐라만 입구 가운데에 있는 코레히도르섬은 전략적 요충지로 쓰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잘 키워 놓았는데 망해버리면 아까워서 안 되지.'
코레히도르섬 남쪽 해협의 길이는 12km 나 된다.
마닐라를 점령한다 해도 다두 왕국으로서는 쳐들어오는 함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포트 드럼처럼 요새화하면 침몰하지 않는 무적의 군함이 될 거야.'
연은 필리핀을 획득한 미군이 한 것처럼 마닐라만 입국에 있는 코레히도르, 카발로, 카라바오, 엘 프레일 섬을 요새화 활 계획을 세웠다.
어떤 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마닐라만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물리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두운 밤이라 들킬 염려는 없지만, 마닐라와 가까워지자 조경 3호선은 출력을 최대한 낮추고 천천히 카비테 항구와 파시그강 어귀 사이로 접근했다.
"거리는?"
"약 5km 전입니다."
"정지하라."
"멸!"
조경 3호선은 마닐라 앞바다에 떠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 시간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전쟁을 앞둬서 그런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조금 늦는데?"
"그러네요. 예상보다 5분이 지났습니다."
함장 병수의 말에 작전 참모가 함교에 설치된 시계를 보고 말했다.
그 순간.
"함장님, 저기 보십시오. 신호입니다."
"그래?"
을수는 망원경을 꺼내 곳곳에 나타난 불빛을 살펴보았다.
"음···. 잘하고 있군."
미리 침투한 다두 왕국 전사들이 불을 지른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불길이 커지거나 작아져야 하는데, 바다를 향한 반사판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은 일정했다.
혹독한 훈련을 마친 다두 왕국 전사들이 이번에는 착오 없이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언제 꺼질지 모르니 위치 기억하고 즉시 함포 사격을 시작하라!"
"멸!"
이미 선전포고를 했기에 경고 사격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작전 참모는 즉시 마이크를 잡고 지휘에 들어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명령에 따라 해경 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측거의(測距儀)를 이용해 목표 지점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했다.
"거리 4.8km. 풍속 양호."
관측 대원이 거리와 풍속을 외치자 포탑 안에 대기하고 있던 대원은 정신없이 손을 돌렸다.
전기 모터를 이용해 포탑을 가동해도 되지만, 산토도밍고에서 당한 기억이 있기에 수동으로 포탑을 돌렸다.
포탑에 튀어나온 포신들이 불빛들을 향해 이동했다.
조준선과 일치된 것을 확인한 대원들은 대포에 부착된 손잡이를 돌려 포신을 들어 올렸다.
포탑에 장착된 조303 대포가 목표를 항해 고개를 쳐들었다.
"일발 장전!"
"일발 장전!"
조경 3호선 앞 갑판과 뒤 갑판에 설치된 4개의 포탑에서 선임대원의 명령에 따라 후임대원이 반복해 외쳤다.
후임대원은 길쭉한 포탄을 대포 구멍에 쑤셔 넣고 손잡이를 잡아당겨 대포의 후미를 걸어 잠갔다.
폴리프로필렌으로 감싸진 75mm 포탄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탄피에 끼워져 있었다.
"장전 완료!"
"발사!"
"발사!"
후임대원이 대포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자.
-펑!
소리와 함께 포탄이 발사됐다.
주퇴복좌기 일체형인 조303 대포의 반동은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탑 안에 있는 대원들은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사격이 끝나자 후임대원은 대포에 달린 손잡이를 젖혔다.
텅 빈 황동 탄피가 뒤로 튀어나오며 옅은 연기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다시 포탄을 장착하고 줄을 당기는 작업이 빠르게 반복되었다.
발사된 포탄들은 초속 400m 넘는 속도로 파시그강 하구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와 카비테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함선으로 날아갔다.
쉬지 않고 발사된 포탄에 의해서 멀리 떨어진 양쪽에서 불이 붙었는지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타오르는 불빛으로 적진이 훤히 보이자 관측병의 입은 쉬지 않고 열렸다 닫혔다.
"좌로 두 바퀴 반."
"좌로 두 바퀴 반."
관측병의 말에 따라 계산을 끝낸 선임대원이 외치자 후임대원이 조303 대포 뒤에 달린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장착된 포탄이 발사되었다.
조경 3호선 설치된 4개의 포탑에서 조303 대포가 쉬지 않고 불을 품었다.
-펑! 펑! 펑! 펑!
조303 대포는 후미 장전식 대포이다.
산토도밍고에서 유폭 사고를 겪고 난 후, 연은 모든 함선의 대포를 후미 장전식으로 교체했다.
터릿을 씌워 대포와 대원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연은 후미 장전식 대포를 개발하면서 2번이나 사양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