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대전쟁시대(1) >
사가(史家)들은 이 시대를 '대전쟁시대'라 말한다.
가장 먼저 일어난 전쟁은 영란전쟁(英蘭戰爭)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암보나이섬(암본섬)에서 네덜란드가 먼저 영국의 길드 사무소를 습격해 모두 죽였다.
영국이 비열하게 원주민들을 조정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동인도 회사는 합병 협상 중이었으나, 이 일로 결렬되었다.
영국은 당하고만 있을 나라가 아니었다.
1652년, 영국은 도버 해협을 막고 지나가는 네덜란드 선박을 공격하면서 두 나라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일어난 전쟁은 효종 4년(1652)에 필리핀에서 일어난 동양굴기전쟁(東洋崛起戰爭)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다두 왕국과 스페인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을 동양에서 서양을 몰아낸 최초의 사건으로 보았다.
필리핀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필리핀을 발견한 후, 1565년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顚落)되었다.
'바이바이인(Baybayin)'이라는 문자까지 사용했던 필리핀의 '톤도 왕국'은 나름대로 문명국가였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략자들로 인해 1589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있던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필리핀 세부섬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단순 목적이었다.
마젤란은 세부 부족 추장인 주아나 일족과 부족 800여 명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런데 도적놈이나 다름없는 마젤란은 만족하지 않았다.
마젤란은 세부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막탄섬으로 건너가 라푸라푸 부족들을 위협했다.
항해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막탄섬 부족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마젤란은 갑옷과 창, 화승총, 대포를 앞세워 마을을 불태우고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미 문명화된 원주민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결국 마젤란은 독화살을 맞고 죽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말박이들처럼 약탈로 살아가는 도적국가인 스페인은 필리핀을 집요하게 공격한 끝에 정복했다.
조선전력공사 사신인 박문식은 다두 왕국에서 국왕인 카마찻 왕과 함께 있었다.
"조선의 폐하와 전하께서는 도적놈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도적놈들을 물리치시고 망해버린 톤도 왕국을 대신하여 마닐라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그대와 조선의 가르침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소.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이 훈련한 우리 다두 왕국의 강한 전사들이 있으니 염려 놓으시오."
카마찻 왕은 가슴을 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전하와 전하의 전사들을 믿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믿으시오."
카마찻 왕의 눈빛과 몸은 전과 아주 달랐다.
강력한 눈빛과 단단한 몸으로 변한 카마찻 왕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산토도밍고 요새를 공격하면서 문제점이 많이 노출됐다.
어처구니없이 유폭으로 인해 조경 2호선이 파손되고 다수의 해경 대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은동리로 돌아온 박문식은 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저의 잘못으로 큰 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없도록 저를 일벌백계 삼아 죽여주십시오.'
'그만 일어나거라.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하···.'
연은 손을 들어 올려 박문식의 말을 중단시킨 후 이어 말했다.
'네가 죄가 있다면 나 또한 죄가 있다. 그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키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나이다. 그러니 이만 일어나도록 하라.'
'전하···.'
'잘 듣도록 하라. 지나간 일은 교훈 삼고,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 작전을 수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전하···.'
연은 이이제이를 아군에게도 적용했다.
성질이 사나운 다두 왕국의 전사들을 이용해 해남도를 공격했다.
연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경 대원들은 다두 왕국의 전사들에게 혹독하게 제식훈련을 시켰다.
"왼발! 왼발! 발 똑바로 못 맞추나!"
"우향앞으로가!"
"왼발! 왼발! 왼발오른발 왼발!"
처음에는 반항이 심했지만, 강한 자를 숭상하는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해경 대원들에게 얻어맞고 나서야 맹목적인 존경심을 보였다.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기거나 뛰어나간다면 뒤통수에 구멍이 날 줄 알아라!"
"불만 있는 놈은 언제든지 도전하라! 이기는 놈이 대장이다."
덩치 자체가 엄청난 차이를 보였고, 매일 같이 피티체조로 순발력과 근력을 단련시킨 해경 대원들을 이길 수 있는 다두 왕국의 전사는 없었다.
"이번에도 명령 없이 행동하는 놈이 있다면 모두 뒈질 줄 알아라. 알겠나!"
"""충성."""
다두 왕국 전사들이 조선말로 충성을 외쳤다.
훈련 용어는 모두 조선말로 진행되었다.
"오늘은 네놈들이 좋아하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낼까지 푹 쉬어라."
"질문 있습니다."
"말하라?"
"이번에도 해남도입니까?"
"그렇다."
"마닐라는 언제 갑니까?"
"해남도의 원주민조차 처리 못 하는 놈들이 어찌 마닐라를 넘보느냐? 이 상태로 마닐라로 간다면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다. 알았나!"
"""충성."""
연의 세 번째 계획은 다두 왕국을 이용해 필리핀에서 스페인 도적놈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다두 왕국을 세우는 거였다.
'대만을 온전히 차지하려면 다두 왕국을 필리핀으로 보내는 게 최상이지.'
같이 국경을 맞대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연은 잔머리를 굴렸다.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낸 후 남쪽에 있는 필리핀으로 다두 왕국 사람들을 모두 보내기로 계획했다.
'조선의 속국이 되기로 한 다두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 방법이 최상이야.'
연은 박문식과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산토도밍고 요새를 공격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 용맹해도 문제구나.'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식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연은 다두 왕국 전사들을 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언제 적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자 연은 생각을 바꿨다.
'해남도는 조선의 땅이다. 그러니 다두 왕국의 전사들을 보내 해남도에서 떠나지 않는 대륙 놈들을 모두 쫓아내라. 그러면서 훈련을 시켜라.'
연은 해남도에서 버티고 있는 대륙 놈들을 모두 쫓아내기로 했다.
'말도 안 듣고 따르지도 않는 놈들은 필요 없어.'
대륙 놈들이 두 번 다시 오지 못하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로 했다.
조선전력공사 해경 대원들이 수시로 해남도를 방문하여 경고하고 쫓아냈지만, 그때뿐이었다.
대륙과 해남도 사이의 해협은 20km도 안 되기에 대륙 놈들은 다시 건너왔다.
그래서 연은 해남도를 다두 왕국 전사들의 훈련 실습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하께서는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하셔야 합니다.'
박문식은 카마찻 왕에게 대왕이라 말하지 않았다.
자진해서 조선을 섬기겠다고 따르겠다고 사정하는 카마찻 왕의 뜻에 따라 다두 왕국을 조선의 속국으로 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더 큰 세상이라니.'
'남쪽에 있는 톤도 왕국이 망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곳은 현재 스페인 도적놈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놈들은 우리 다두 왕국도 침략한 놈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페인 도적놈들을 물리치시고 그곳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십시오.'
그때 카마찻 왕의 눈빛을 박문식은 잊을 수가 없었다.
열망과 야망과 탐욕이 섞인 카마찻 왕의 눈빛은 남명의 왕인 정성공이 보였던 눈빛과 같았다.
카마찻 왕은 대만보다 수 배나 넓고 풍족하고 넓은 평지가 있는 필리핀이 탐이 났다.
'상국인 조선의 명이라면 따라는 게 당연합니다.'
간단한 말 한마디로 카마찻 왕은 조선의 지원을 당연시했다.
몸만 좋아진 게 아니라 말주변도 늘었다.
박문식은 카마찻 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조선의 태자를 따르며 원하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박문식은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맡아서 하고 있기에 카마찻 왕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 카마찻 왕은 솔선수범해서 제식훈련을 받았다.
톤도 왕국이 지배했던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몸을 강하게 만들어야 하고, 조선의 군사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디에고 파하르도 샤콘(Diego Fajardo Chacón)은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이다.
스페인 벨레스 후작 가문의 자손이자, 전 필리핀 총독 알론소 파하르도 데 엔텐자의 조카이다.
막강한 가문의 힘으로 파하르도는 필리핀 총독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파하르도 총독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잔인한 자였다.
고집스럽고 가혹했으며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심한 형벌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마닐라 지하 감옥에는 죄수들이 누워 잘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21세기 필리핀 감옥도 같은 상황인데 아마 파하르도 때문에 이어진 전통이 아닌지 알 수 없다.
-똑똑.
파하르도는 자신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들어와라."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 온 비서 유스타시오(Eustacio)는 가지고 온 서신을 총독에게 넘겼다.
"총독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그러느냐?"
"그게···, 보시면 아실 겁니다."
비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서신을 받으면서 너무 기가 막힌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파하르도는 서신을 뜯다 말고 물었다.
"어디서 보낸 것이냐?"
"총독님도 잘 아실 겁니다. 다두 왕국이라고···."
"대만 섬에 사는 미개한 놈들 말이냐?"
"네, 맞습니다."
"그런데?"
"다두 왕국에서 보낸 선전포고(宣戰布告) 서신입니다."
"뭐! 선전포고라고?"
"네, 총독님."
총독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감히 선전포고라니 어처구니없었던 거다.
선전포고는 중세 봉건시대 유럽에서 시작됐다.
기사나 영주들이 싸우기 전에 상대에게 결투 신청을 날리던 것이 관습화된 것이다.
유럽 말고는 생소한 관습인 선전포고는 암묵적인 규정으로 정착되었다.
핵무기에 관한 나토(NATO) 조약 5조처럼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면 주변에서 모두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켜진 적이 없었다.
선전포고를 보낸 사례는 20% 도 되지 않았고,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더라도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봤다.
다두 왕국은 명분을 얻기 위해 마닐라에 있는 스페인 총독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 서신을 보냈다.
이 또한 연이 하라고 시킨 거였다.
잔인한 파하르도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검붉게 변했다.
극도로 화가 치민 거다.
"감히!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선전포고해!"
파하르도는 서신을 열고 읽어 보더니 구기다 말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멀뚱하게 서 있던 비서는 놀란 눈으로 총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총독님."
"어떻게 하긴 오는 족족 죽여버려야지. 혹시 네덜란드 놈들이 부린 수작이 아니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세상이라 네덜란드가 대만에서 사라진 지도 파하드로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겠지. 미개한 놈들이 어찌 감히···. 놈들이 이런 짓을 할 순 없다. 틀림없이 네덜란드 놈들이 뒤에서 사주한 거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1644년, 파하르도가 필리핀 총독으로 온 다음 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공격하여 대만에서 쫓아냈다.
그 후로도 네덜란드의 공격은 지속되었다.
1646년. 네덜란드는 18척의 전함을 이끌고 마닐라를 공격했다.
다행히 물리칠 수 있었다.
1647년에도 네덜란드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가 마닐라만 입구에 있는 카비테 항구를 공격했지만, 단단히 준비한 파하르도 총독은 승리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놈들이 또다시 나타나다니···.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구나."
사실 잠잠한 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네덜란드는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 민다나오 원주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뒤에서 민다나오 원주민들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결국 원주민들은 스페인에 항복했고, 교수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됐다.
그래서인지 다두 왕국이 필리핀 원주민들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따르지 않았다.
"본국에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 10일 안에 떠나지 않으면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는 데 소용이 있겠느냐?"
"네? 10일이요."
처음엔 다두 왕국의 미개인들이 미친 소리를 지껄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뒤에서 네덜란드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파하르도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파하르도는 사색이 된 낯빛으로 즉시 장교들을 소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