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96화 (96/275)

< 96. 오스만, 사파비, 무굴(3) >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마당에는 흰 바탕에 물결치듯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연은 새로운 본사를 지으면서 정선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왕궁 곳곳을 단장했다.

강력한 물줄기를 이용해 반듯하게 절단한 대리석은 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비가 오면 미끄러워서 모래를 쏘아 표면 처리를 해야만 했다.

광택이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인정전 입구에 발을 딛은 세 제국의 사신은 깜짝 놀랐다.

대리석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저분은 조선의 태자이시니 예를 올리십시오."

이곳까지 안내를 맡았던 예조 관리의 말에 세 제국의 사신은 당황한 표정으로 관리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진짜 저분이 조선의 태자란 말입니까?"

"조선의 태자는 이제 12살 정도라는데 사실입니까?"

말랐지만, 성인 만큼 큰 연을 보고 믿을 수 없는지 사신들은 연과 관리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맞습니다. 저분은 틀림없는 조선의 태자이십니다."

세 제국의 사신은 빠른 걸음으로 연 앞에 다가가 동시에 합창하듯 예를 올렸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를 대신하여 대조선의 태자를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사파비 제국 질룰라 압바스 2세를 대신하여 대조선의 태자를 뵙게 되니 이는 모두 알라의 뜻인가 봅니다."

"무굴제국 파디샤 자한을 대신하여 조선의 태자를 뵙습니다."

연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사신들을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말로만 듣던 조선의 태자를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태자 전하를 뵐 수 있다면 세상 끝이라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질룰라께서 흠모하는 태자 전하의 훤칠하신 모습을 보니 대조선의 앞날이 기대됩니다."

정신없는 사신들의 찬양에 연은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아니었다.

'시발! 내 이럴 줄 알았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인정전 앞에서 사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도 다툴 게 뻔해 보이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그동안 조서원을 통해서 이들의 행동을 듣고 있었다.

서맥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은 문제가 없었다.

제국별로 분리된 사신 일행은 대대 병력의 호위를 받고 오느라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사신관 안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사신관 입구에서 멱살까지 잡고 욕설까지 내뱉으며 다투었다.

'무지한 놈들이 아버지 심기를 건드릴지도 몰라.'

사신들과 인사를 나눈 연은 손에 들고 있던 동그란 통을 앞으로 내보였다.

"""그것이 무엇입니다."""

"폐하를 동시에 뵙는 것은 서로가 원치 않을 것 같아서 준비해 왔습니다."

연은 원통에서 똑같이 생긴 막대 3개를 꺼내 들었다.

"여기 보시면 숫자가 쓰여 있습니다."

막대 끝에는 1, 2, 3이란 아라비아 숫자가 각기 쓰여 있었다.

"아···, 순서를 정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막대를 뽑아 순서대로 폐하를 뵙는 것이 공정할 것 같아서 준비해 왔습니다."

세 제국의 사신은 이번에도 동시에 연을 칭송했다.

"역시 파디샤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재가 틀림없으십니다."

"질룰라께서 말씀하시길 조선의 태자는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무굴제국의 술타네스 셀라틴께서 조선의 태자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든지 우리 제국을 방문해 주십시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역관들이 표현하는 세 제국 황제의 칭호는 다양했다.

'이슬람 황제는 다 술탄이 아니었나?'

술탄이란 표현은 대공(大公, Grand Duke)에 해당하는 황자에게 붙이는 표현이다.

현대의 상식을 가진 연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대들의 파디샤, 질룰라, 술타네스 셀라틴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우리 무굴제국을 방문해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우리 제국에는 미녀들이 많습니다."

"우리 제국의 미녀들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우리 제국을 꼭 방문해 주십시오."

"세상에 제일가는 미녀는 지중해의 모든 곳을 영토로 가진 오스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스만 제국을 방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파디샤께서 전하를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또다시 합창하듯 동시에 떠드는 사신들의 말에 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아무튼 연은 막대를 다시 원통 안에 넣고 흔들었다.

세 제국의 사신은 서쪽을 향해 기도를 올린 후 막대를 뽑았다.

"역시 우리 오스만이 가장 위대한 제국임이 틀림없습니다."

1번 막대를 뽑은 오스만 제국의 사신이 밝게 웃으며 연에게 예를 올린 후 먼저 정전으로 들어갔다.

남은 두 제국의 사신은 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서로를 노려보며 인상만 쓰고 있었다.

"햇볕이 따갑습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가을에 들어섰지만,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정전 안쪽에 마련된 유리로 둘러싸인 정자로 들어서자 두 제국의 사신은 움찔했다.

"이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찬 바람이 나오다니 어찌 이런 일이."

"냉방기라 합니다. 공기를 차갑게 해주는 기물이지요."

"아···. 신기합니다."

사파비 제국의 사신이 감탄하는 사이 무굴제국 사신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이것도 전기로 작동하는 기물입니까?"

"맞습니다. 전기를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무굴제국 사신은 말을 하려다가 사파비 제국 사신을 보더니 멈추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옆 나라 사신이 있는 곳에서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거다.

두 제국 사신이 서로를 견제하며 말을 삼가는 가운데 예조 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알았다. 들어가 보시지요."

연은 2번을 뽑은 무굴제국 사신이 떠나자 사파비 제국 사신을 보며 달갑게 미소 지었다.

"그대가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사파비 제국 사신은 3번을 뽑아 기분이 언짢았는데 운이 좋다는 연의 말에 눈만 깜박였다.

"따라오시겠습니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네."

사실 운이 좋은 건 연이었다.

사신관 입구를 하나만 만든 통에 사파비 제국 사신을 따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제비뽑기를 준비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만나고자 했던 사파비 제국 사신이 홀로 남자 연은 그를 데리고 정전을 벗어났다.

창덕궁 부용정으로 사신을 데려간 연은 차를 내주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대의 제국이 다른 두 제국보다 백성의 수가 가장 적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만, 우리 사파비 제국의 힘은 밀리지 않습니다."

들은 정보로는 사파비 제국은 사방에 둘러싸인 적들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사실을 논할 수는 없는 일.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양쪽에 강한 제국을 두고 있으니 편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미천하고 둔하여 태자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사파비 제국의 사신은 말을 돌렸다.

그동안 여러 번 요구에도 만나지 못했던 조선의 태자가 자신을 은밀히 데리고 온 이유가 분명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은 방긋 웃더니 한쪽에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건···."

"맞습니다. 사파비 제국의 지도입니다."

"그런데 이걸 꺼내시는 이유가···."

"상의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갑자기 자국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를 펴자 사신은 숨을 죽이고 연을 바라보았다.

"조선은 이곳까지 진출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까?"

"조선의 영토를 침략해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죽인 루스 차르국 도적놈들을 쫓다가 이곳까지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원해서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 아닙니다."

"아···. 그렇게 되었군요. 동쪽 끝에 있는 조선이 왜 이곳까지 영토를 넓혔는지 모두의 관심사였습니다. 그게 바로 루스 차르국의 도적놈들 때문이었군요."

"맞습니다."

연은 사파비 제국의 사신을 만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했다.

그 지역에 파견된 요원들이 돈을 뿌려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내용을 간추리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21세기와 달리 테헤란이 사파비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고, 주변 또한 건조한 황무지가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답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주변은 풍요로웠다.

"사파비 제국이 '세계의 절반'이라 말하는 수도 이스파한은 아름답고 멋진 곳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엘브르즈산맥 넘어까지 관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연의 말에 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륙에 자리한 사파비 제국 수도인 이스파한에서 예맥해까지는 400km가 넘는다.

험준한 엘브르즈산맥은 예맥해 남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염분이 별로 없다는 예맥해지만, 남쪽은 아니었고, 21세기보다 해수면이 높았다.

한마디로 예맥해 남쪽은 평지가 거의 없는 똥 땅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곳을 조선에 넘기시는 것은 어떨지요?"

"네?! 그건···."

사신은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힘이 지배하는 시대라 강력한 총으로 무장된 조선이 침공하더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파비 제국이 물러난다면 그에 따른 보상을 충분히 하겠습니다."

보상이란 말에 구미가 당기는지 사신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물었다.

"어떤 보상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대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조선에서 총을 구입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맞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태자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지는 않지만···, 그대의 제국이 처한 상황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연의 말에 사신의 표정은 근심이 가득했다.

사신의 표정을 살핀 연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조선은 명분 없이는 타국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루스 차르국 도적놈들을 그냥 둘 순 없습니다. 루스 차르국을 응징하기 전에 이곳 바다를 온전히 조선의 손에 넣고 싶어 제안하는 겁니다. 이건 사파비 제국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맞지만···."

이번에도 사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조선이란 나라가 명분 없이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그런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언제든지 명분을 만들어 침략하면 그만 아닌가.

대제국 사이에 끼어있는 사파비 제국으로서는 조선까지 쳐들어온다면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했다.

"그대의 질룰라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이곳을 양도하고 산맥을 따라 국경을 정한다면 그 대가로 총과 화약을 제공하고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모든 적을 막아 주겠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파비 제국의 북쪽은 우리 조선의 영토인데 우리를 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대의 제국을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은 그대의 제국과 좋은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전하. 하면 오스만과 무굴의 침략에도···."

연은 손바닥을 들어 올려 사신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건 안 됩니다. 조선은 타국을 침략하지 않지만, 타국의 일에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나라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도록 총과 화약을 무상으로 주겠습니다."

"영토에 대한 대가로 총과 화약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얼마나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연은 손가락 10개를 활짝 폈다.

"모두가 탐내는 조선의 수석총 10만 정과 100발을 쏠 수 있는 화약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1만 정씩 3년 동안 주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연의 말에 사신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의 수석총 10만 정으로 무장된 병력이면 오스만과 무굴이 동시에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강력한 무기를 무상으로 준다니 관리하기 힘든 땅을 포기하고 오스만에게 빼앗긴 아나톨리아 동부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질룰라께서도 좋아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적정한 가격에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제가 꼭 설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사파비 제국과 잘 지냈으면 합니다."

잠재적 고객을 만든 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사신 또한 원하던 일이 성취되자 연신 감사를 표했다.

"오늘 내용은 절대 다른 제국에 말하면 안 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제 입은 억만금보다 무거우니 염려 놓으십시오."

어차피 무쇠로 만든 강선이 없는 수석총은 100발을 쏘면 망가지게 된다.

그러니 아낌없이 줘도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사파비 제국의 사신을 돌려보낸 후 연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들어 온 정보로는 무굴제국에서 원하는 건 총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잘하고 계시나 모르겠네.'

연이 화기애애한 상황에서 고객상담을 마친 동안 효종은 머리를 싸매며 골치를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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