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오스만, 사파비, 무굴(2) >
연은 핵심 직원들과 앞으로 진행할 계획을 마무리한 후, 즉시 한양으로 떠났다.
태자비가 보고 싶어 간 건 아니었다.
조선의 왕인 효종에게 계획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한양에 도착한 연은 바로 효종을 찾았다.
"어쩐 일이냐? 한동안 찾아오지 않더니."
효종은 책을 보면서 약간 토라진 말투로 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아버지.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바쁘면 그럴 수도 있으니 개의치 마라."
연이 준가르 부족 문제로 바쁘다는 걸 효종이 왜 모르겠는가.
단지 혼인하고 나서 발걸음이 끊기자 심술이 났던 거다.
물론 태자비가 매일 같이 문안 인사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지우(之友)나 다름없는 연을 보지 못하자 섭섭함과 동시에 심심했다.
연은 효종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를 꺼냈다.
"아버지, 소자 보여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두루마리를 본 효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서역 정세에 관한 지도입니다."
"그래?"
"네, 아버지."
효종은 책을 덮고 바로 앉았다.
연이 보여 준 것 치고 신기하지 않았던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음···,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나 넓다니 놀랍구나."
"이 지도에 표시된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맞다. 네가 금화 오른편에 그려 넣은 세상이 또 있었지."
"그렇습니다. 아버지."
효종은 지도를 보려다 말고 뭔가 생각이 난 듯 연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쌀은 물론 모든 것이 풍부하다고 했는데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쪽보다는 그쪽이 훨씬 좋을 것 같구나."
산동반도를 얻으면서 이제 쌀은 남아돌았다.
그런데도 쌀을 생각하는 것 보니 역시 효종은 쌀에 진심인 한민족의 왕다웠다.
"송구합니다. 아버지.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네가 한 말이 있으니 나는 기다릴 것이다."
"소자, 명심하겠습니다."
연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백성이 살길에 대해 효종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신대륙에 관한 이야기도 꺼낸 적이 있었다.
'과장을 좀 심하게 했나?'
아무튼 그때 연의 말을 들은 효종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 눈빛은 효종에게 볼 수 없었던 탐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지도를 가지고 온 연유를 들어 보자."
"네, 아버지."
연은 지도를 펴고 일일이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효종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통일한 명나라만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넓은 세상과 나라들이 많았다.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기름진 농토가 널려 있습니다."
"너의 스승인 아담 샬이 온 곳을 말하는 것이더냐?"
"네, 아버지."
"그곳도 이처럼 넓은 영토를 가지 제국이란 말이지?"
"그건 아닙니다. 땅이 기름진 만큼 수많은 나라로 쪼개져 있습니다."
"음···."
연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효종의 고심은 깊어갔다.
만주를 확보하고 몽골을 친다고 할 때만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던 효종이다.
그런데 몽골을 넘어서 서역까지 진출한다고 하자 걱정이 되었다.
쓸모도 없는 동토, 황무지, 사막이 대부분인 그곳으로 왜 진출하려고 하는지 효종은 연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필요한 광물과 석유가 있다고 하니 조심하라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명이나 청나라만큼이나 큰 제국이 이렇게나 많다니 놀랍구나."
"그러긴 하지만, 이곳 무굴제국 말고는 조선을 위협할 만한 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네가 준가르 부족에게 총을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냐?"
"네, 이버지."
연은 자신을 믿어주고 지원해주는 아버지에게 항상 숨김없이 모든 것이 털어놓았다.
물론 지식의 원천이나 조서원에 관한 것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 넓은 땅을 유지 할 수 있단 말이냐? 신기하구나."
"조선처럼 모든 것을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봉건제(封建制)를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흐음···. 미개한 곳이구나."
조선처럼 중앙에서 전체를 관리하는 나라는 아직 드물었다.
대항해시대가 열린 지 100년이 넘었지만, 내륙 이동은 제한되어 있었다.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대부분 혈연이나 쌍무적 계약 관계로 통제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아직 교통(交通)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아니 안다고 해도 우리처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맞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조선도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다."
효종은 연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조선의 길은 엉망진창이었다.
연이 밀떡 폭탄을 만들어 산을 뚫고, 시멘트로 길을 내고, 콘크리트로 저수지와 댐을 만들지 않았다면 아직도 조선은 먹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였구나. 네가 무리하면서까지 도로와 철도를 계속 만드는 이유가."
"네, 아버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조선의 영토는 넓어도 너무나 넓었다.
효종이 생각하기에는 그 넓은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연을 보면 천하태평(天下泰平)이었다.
"알겠다. 내 너만 믿겠다."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그동안 근심에 쌓여있던 효종이 아주 밝게 미소 지었다.
도로와 철도가 놓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라는 것을 이용해 통신까지 하고 있으니 반란이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나저나 사신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구나."
효종은 제국에서 왔다는 사신들이 탐탁지 않았다.
사신들이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그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다.
서로 견제하며 싸우는 통에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대신 연을 믿고 기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적당히 대한 후 돌려보내면 됩니다."
"그들이 그냥 가겠느냐? 뭔가 요구할 게 있으니 왔을 터인데."
"그렇다고 들어줄 순 없습니다."
"미개한 자들이라 무슨 일을 벌일지 걱정되는구나."
연의 설명을 들으면서 효종은 많이 놀랐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있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굴제국만 하더라도 1억이 훨씬 넘는 백성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제국에서 조선을 침략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몽골 말박이 후손들이라 미개하기 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히 조선의 영토를 넘보지 못할 겁니다."
"자신 있느냐?"
"네, 아버지."
"그렇다면 너만 믿겠다. 그런데 말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말 타고 다니면서 박 터지게 싸우는 놈들이란 뜻입니다."
연은 세 제국이 몽골의 후손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 효종에게 앞으로 할 말을 미화하기 위해서 그냥 싸잡아 저렴하게 표현했다.
"음···, 네가 만든 총이 있으니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구나. 그런데 들어 보니 같은 종교를 믿는다면서 왜 그리 싸운다고 하더냐? 이해할 수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제가 전에 드린 말처럼 종교는 자유롭게 선택하게 놔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 종교만 믿게 한다면 이들처럼 갈라질 게 틀림없습니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조선에도 기독교가 들어와 퍼지고 있었다.
특히 옹진반도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령도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예수회의 무역선에는 선교사도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연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세상에 나쁜 종교는 없어. 종교를 이용한 나쁜 사람은 있어도.'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점점 퍼져나가자 효종이 연을 불렀다.
'요즘 조선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퍼지고 있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본은 가리시탄을 탄압한다는데.'
'그냥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라 나쁠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고려 때 불교처럼 이상하게 변하지 말아야 할 텐데···.'
고려 때 난잡했던 불교라 조선을 건국하면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폈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조선의 백성은 너무나 많았다.
고려 때와 달리 양난을 겪으면서 고승들이 나라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불교를 탄압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종교도 필요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의 종교만 있으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 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게 하면 서로 더 좋은 종교가 되려고 노력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나.'
효종은 한참 생각을 하더니 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이런 것을 아느냐?'
'알지 못합니다. 단지 중용(中庸)을 지키는 게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용이라···, 좋은 뜻이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저술한 중용은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이다.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 또는 감정표현에 있어 적절함을 지키라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연은 중용의 예를 들어 종교에 관섭하지 말고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이곳까지 진출하면 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어찌할 생각이냐?"
"그들은 지금도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중용에 따라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말이 균형이지 서로 싸우면서 어느 한쪽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거였다.
연은 가장 강력한 무굴제국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을 이용할 방법을 설명했다.
"사파비 제국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가장 힘이 약한데 가운데 끼어 있으니···."
"그래서 상의드리려고 왔습니다."
종교에 이어 중용까지 뜸을 들인 연은 이제야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효종이 누구인가.
아들인 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버지다.
"사파비 제국에만 총을 팔 생각이구나?"
"네, 아버지.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습니까?"
"음···."
효종은 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네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
"바로 이곳입니다."
연은 예맥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곳은 이미 진출한 곳이 아니냐?"
"남쪽은 아닙니다. 그래서 완전히 얻고자 사파비 제국에 총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겠느냐?"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그 어느 나라에도 조선의 무기를 팔 수 없다고만 해주시면 됩니다."
'알았다. 그리하도록 하마."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부자는 서로를 바라보면 밝게 미소 지었다.
* * *
효종은 서역에서 온 사신들을 동시에 만나겠다고 뜻을 전했다.
그동안 서로 먼저 접견하겠다고 설치는 통에 어느 한 곳을 먼저 만날 수가 없었다.
연은 경강 대로와 주변을 개발하면서 이태원에 경강 다리가 잘 보이는 곳에 사신관을 여럿 지으라고 했다.
'발전된 조선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사신관을 여럿 짓고 안전을 위해 입구는 하나만 내도록 해라.'
말이 안전을 위한 것이지 딴짓을 못 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넓은 대지에 지어진 사신관이지만, 줄줄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입구가 하나뿐이 없다 보니 세 제국의 수행원들이 사신관 입구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제국의 사신은 사신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배정된 사신관 안에서 경강 대로를 따라 발전된 한양의 모습과 밤이 되면 아름답게 빛나는 경강 다리를 보며 감탄만 하고 있었다.
별천지나 다름없는 한양의 모습에 그들은 더욱 안달이 났다.
어찌하든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고 단독으로 조선에서 총과 화약을 사고자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제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효종의 부름을 받고 동시에 입궐한 사신들은 생각보다 소박한 궁궐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조선의 저력을 무시할 순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조선의 기물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궁궐은 소박했지만, 철로 만든 마차가 철길을 다니는 조선이다.
무슨 재주로 밤에 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는지 모르지만, 사신관은 물론 내려다보는 용산방과 경강 다리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인구는 생각한 것만큼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도 아니었다.
무굴제국이야 1억이 넘는 백성을 통치하는 대제국이기에 무굴제국의 사신은 조선을 깔보는 빛이 역력했지만, 오스만과 사파비는 그렇지 않았다.
창덕궁 정전 앞에 들어선 세 제국의 사신들은 말로만 듣던 조선의 태자인 연을 보자 동시에 예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