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준가르(4) >
역사를 잘 모르는 연이지만, 문식이 때문에 대충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봤자 대붕이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대체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날고기는 덕후급 대붕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공식이 때 연은 보기만 하고 댓글조차 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잘 아는 것도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일에 관련된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연구소에 있었던 공식이는 국제 협력 차원에서 돌아다닌 곳이 많았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아무튼 연이 서둘렀던 이유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가 기반을 잡기 전에 다 쫓아내야 해.'
국제 협력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만 없다면 중앙아시아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비단길은 망해버렸다.
그래서인지 비단길을 점령하고 있던 티무르 왕조는 남쪽으로 내려가 무굴 제국을 세웠다.
호랑이 없는 산중에 늑대가 왕이라고 빈자리는 준가르가 차지하고 있었다.
'바토르'는 몽골어로 용사 또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망해버린 몽골을 제치고 중앙아시아 대륙의 수장이 준가르의 수장 '바토르 콩타이지' 호토고친은 난감했다.
티베트의 지교법왕인 토우르바이흐로부터 영웅이란 칭호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영웅행세를 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숙여야만 하는가?'
오이라트 부족의 발원지인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예맥해)까지.
동쪽으로는 몽골초원까지.
남쪽으로는 티베트고원까지 모두 자신이 지배하는 준가르 왕국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쳐들어온 조선군을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조선군은 용기와 병력 수만 믿고 덤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정신 차리자!'
성질대로 했다가는 청나라처럼 몰살당할 게 뻔했다.
호토고친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봉을 바라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몽골 제국을 멸망시킨 청나라를 가지고 놀았던 조선의 태자가 보낸 사절이다.
지봉이 자신이 지배하는 준가르 왕국 영역에서 살아왔다지만, 고려인 출신이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현자로 소문난 지봉이 옳고 그름을 안다는 거였다.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건가? 아니면 나에게 살 기회를 주는 건가?'
지금까지 지봉의 행동을 보면 자신과 준가르 부족을 살리려는 듯 보였지만, 그의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패자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인가?'
몽골이 망한 후 준가르 부족을 이끌고 초원의 새로운 패자로 우뚝 섰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비단길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다른 지역을 찾아봤지만,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서쪽으로 가자니 그곳에는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다.
북쪽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킵차크한국이 사라져버렸지만, 새로운 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루스 차르국이라는 총을 든 신진 세력이 문제였다.
남쪽은 무굴 제국이 버티고 있고, 동쪽은 대륙 놈들과 새로 나타난 조선이 있었다.
그동안 호토고친은 몽골 같은 대제국을 꿈꿔왔다.
하지만 사방팔방이 모두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다시 천산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오이라트의 발원지인 천산산맥에 있는 알마티와 준가르 분지, 사마르칸트 지역은 그래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있는 곳이다.
사마르칸트의 패자였던 티무르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무굴 제국을 세웠다.
덕분에 준가르가 사마르칸트까지 세력을 넓혔지만, 근본적으로 먹고살기 힘든 곳이라 힘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륙을 노리고 티베트로 왔는데···.'
조선이라는 무적의 세력이 등장했다.
"하···!"
호토고친은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사실 연 때문에 호토고친은 덕을 보고 있었다.
연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대가 끊기고 준가르 부족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거다.
원역사대로라면 호토고친의 둘째 아들인 갈단이 호쇼트 부족을 정복하고, 준가르 부족을 통합한다.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보쇽투 칸'이라는 칭호도 받는다.
힘을 키운 준가르 왕국은 청나라를 수시로 약탈한다.
그로 인해 20만 명이나 되는 청나라 대군이 몰려오지만,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말박이 종족 특징인 내분을 겪으며 약해지고 만다.
끝내 청나라의 건륭제에 의해 60~8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전 부족이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 당해 멸족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는 호토고친은 조선의 태자를 증오했다.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며 이를 악무는 순간 신하의 말이 떠올랐다.
'비굴하더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해.'
생각을 마친 호토고친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봉에게 다가갔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고 물었다.
"현자여, 만약 내가 다시 알마티로 돌아간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조선의 태자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아···."
역시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괜히 조선군을 건드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거친 말박이들 속에서 콩타이지까지 된 자신이 이대로는 무너질 수 없는 일이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켜면서 호토고친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 이곳에서 썩을 수는 없는 일이다.'
티베트에 묶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래로 내려갔다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들어 온 정보로는 조선의 태자는 단호했다.
명분만 있다면 거침없이 처리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비단길의 약탈자로 찍힌 몸.
명분은 충분했다.
고심 끝에 호토고친은 결단을 내렸다.
"현자여, 조선의 태자께 전해 주시오."
갑자기 공손해진 말투에 지봉을 고개를 들어 호토고친을 바라보았다.
"듣기로는 조선은 총을 대륙에 팔고 있다 하였소. 나 또한 조선의 총을 얻고 싶소."
"말씀은 전해 드릴 수 있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준가르 일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넘어가겠소. 이 조건이면 조선의 태자께서도 좋아하실 것이요."
"티베트를 떠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조선에서 총만 지원해준다면 산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가겠소. 또한 조선을 섬기고 따르겠소."
지봉은 호토고친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두 눈빛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칸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호토고친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에 지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조선의 태자인 연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만들고 있는 도로와 철도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봉은 연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길이 쇠퇴해 가면서 남은 유목민들은 약탈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냥 두면 말썽을 부릴 게 틀림없었다.
지봉이 돌아간 후에도 호토고친은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킵차크한국이 붕괴한 후 남은 유목민들은 예맥해를 거쳐 동쪽으로 이동하여 부하라한국과 히바한국을 세웠다.
하지만 오아시스에 성을 쌓고 살아가는 조그마한 마을 정도였다.
대항해시대의 영향으로 무주공산이 된 비단길을 준가르 부족이 차지했지만, 건조한 초원과 사막에서 생존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호토고친은 힘을 길러 대륙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이것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서양의 총보다 더 좋은 총을 대륙에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곳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가는 길뿐이었다.
* * *
효종 4년(1652) 8월. 3일.
서역에서 사신들이 한양에 도착한 날.
연은 조선전력공사 핵심 직원들을 은동리 본사로 불러들였다.
회의 중 은쌍식이 입을 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장님, 그러니까 준가르 부족의 수장이 무기를 지원해주면 떠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래서 말인데 조선군을 더 파견해야 할 것 같다."
"네, 조선군을 더 파견 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에게 무기를 팔겠다는 말입니까?"
연은 회의 탁자 가운데 놓은 작전 지도 판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원래 우리는 비단길을 따라서 서맥과 연결하는 통로만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준가르 부족이 떠난다고 하니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예맥해 남쪽까지 전부 조선의 영토로 만들고자 하는데 어떠냐?"
"네?"
연이 지휘봉으로 탁자 위로 병력 말판을 이동시키자 은쌍식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졌다.
"이곳에 요새를 짓고자 한다."
"그곳은 황모지 아닙니까? 필요도 없는 황무지를 얻어서 어디에 쓰시려고 합니까? 더구나 그곳에 조선군을 배치한다니 인력 낭비입니다."
은쌍식의 말에 연은 지휘봉으로 지도 판 한 곳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면서 은쌍식을 보며 씩 웃었다.
"이곳 예맥해에도 석유가 있을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예맥해를 조선의 바다로 만들고 싶다."
"석유요? 정말입니까?"
"그렇다. 이번에 그곳으로 간 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확실한 것 같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죠."
물론 그런 보고를 한 연구원은 없었다.
하지만 석유라는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발해만에서 체취하고 있는 원유가 얼마나 유용한지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원유가 예맥해에 있다니 어떻게 채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사장님과 연구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따라서 서맥부터 시작하여 예맥해 전체를 확보해야겠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은쌍식의 얼굴이 탐욕으로 빛났다.
연을 따라다니면서 검은 것은 모두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쌍식은 흑연, 석탄에 이어 이제는 석유가 더 유용하다는 것을 아는지, 탐욕을 감추지 못하고 제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말인데, 용식아."
"넵, 사장님."
"이번에 훈련을 마친 조선군 3개 사단을 이곳으로 보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지봉으로부터 무전 연락을 받은 연은 지도를 보고 또 봤다.
'예맥해는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해.'
1979년 서맥(아티라우) 동남쪽 텡기스 평원에서 대형 유전 발견 소식이 터졌다.
그 후로도 예맥해 주변에서 유전은 계속 발견되었고, 전체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공식이가 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 거대한 유전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였다.
연이 무리하여 서쪽으로 진출하려 했던 이유가.
대륙을 나누어 싸우게 만들고.
일본 열도를 혼란에 빠트리고.
동남아에 진출하는 것을 보류한 이유는 바로 거대 유전이 있는 예맥해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을 벌었어야 했지.'
무수를 점령하고 크롬을 채굴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건 가는 길을 줍는 수준이었다.
'지구 온난화고 뭐고 일단 내가 석유를 확보해 놓아야 해. 그래야 온난화도 늦출 수 있을 거야.'
생각 같아서는 바로 아라비아 사막까지 진출하고 싶었지만, 아직 능력이 되지 않았다.
'후손들이 편히 살려면 명분은 꼭 챙겨야겠지.'
이번에 지봉과 대화하면서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봤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라지만, 말박이 놈들처럼 명분도 없이 무차별 학살하고 약탈하면 무너지고 말 거야.'
역사를 잘 모르는 연이지만, 제국이 망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힘으로 일어난 말박이 놈들은 내부에서 힘자랑하다가 내란으로 멸망했지.'
연은 기마민족인 고구려도 힘을 숭상하는 말박이로 봤다.
'연개소문이라는 빌어먹을 잡것이 힘만 믿고 무신정권을 세우지만 않았어도 고구려가 망할 일이 없었어. 빌어먹을 놈이 그런 짓을 했기에 아들놈들도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망한 거야.'
기마민족이나 유목민족이나 하나같이 내분으로 망했다.
물론 청나라는 예외였다.
연은 보고 배우며 자라는 것이 인격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명분을 챙기려고 했다.
'명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연은 자신이 만든 '양아치론'을 수시로 역설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서 '양아치'는 가장 심한 모욕이자 욕이 되었다.
"사장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응?"
계속 탁자 위에 놓인 지도 판을 보고 있던 은진이가 연과 삼복이를 번 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