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준가르(2) >
인간이 말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예맥 기병 대원이 휘두를 채찍에 놈은 그대로 넘어졌다.
"이럇!"
대원은 채찍을 말 안장을 이용해서 걸고 그대로 달렸다.
채찍에 두 다리가 묶인 채 한참을 끌려 간 놈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었다.
"네놈이 준가르의 감시자였구나."
"크흑···."
땅에 쓸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놈은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잘했다. 역시 눈치가 대단해."
"아닙니다. 대대장님."
"돌아가면 포상을 받도록 해주겠다."
"고맙습니다. 대대장님."
포상이란 말에 대원은 두 주먹을 움켜 주며 힘을 주었다.
역시 군인에겐 포상만큼 좋은 것이 없는 듯했다.
이런 일이 준가르 세력권인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일어났다.
* * *
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준가르가 지배하는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건이 좋은데 왜 따르지 않는 거지?"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다."
유목민들에게 내건 제일 첫 번째 조건은 천연두에서 해방해 주겠다는 거였다.
'그게 문젠가?'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걸리면 둘 중 하나는 죽거나 곰보가 되는 것이 천연두다.
그만큼 무서운 천연두에서 해방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세금이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단 한 푼의 세금도 걷지 않겠다고 했다.
예맥의 땅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지원해줘야 하지만, 굳이 유목민들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몇 푼 안 되는 세금을 받기도 그랬다.
'이것도 아닌데···.'
세금을 걷지 않는다는 건 백성들에게는 무조건 좋은 거였다.
'무기 때문인가?'
몽골 초원에는 맹수인 불곰이나 늑대가 많이 살기 때문에 활이나 칼 같은 무기는 등록 신청만 하면 바로 허가해 준다고 했다.
게다가 조선말과 조선 글인 한글을 익히면 조선인으로 대우해주고 각종 혜택까지 준다고 했다.
고민 끝에 원은 옆에서 알짱거리는 은쌍식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우리를 따르려 하지 않는 거지?"
"'그거야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닙니까."
"뭐? 우리가 뭐가 무서워.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의 자유도 보장하고 도대체 우리를 무서워할 이유가 뭐가 있냐?"
"우리 말고 준가르가 무서운 거겠지요."
"응?"
원은 은쌍식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뭔가 느낌이 있었다.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보다 10살이 많은 은쌍식은 청나라 팔기군이 했던 짓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은 수로 대륙을 정복하고 관리하던 청나라 팔기군은 나치의 게슈타포처럼 한인팔기와 몽골팔기는 물론 백성들을 감시했다.
이처럼 준가르도 넓게 퍼져 사는 유목민들을 감시하고 세금을 걷고 있었다.
'지랄이네. 탈레반들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전통이 있었구나.'
원은 즉시 명을 내렸다.
"유목민 중에 준가르의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자부터 찾아내라."
원은 백성을 감시하는 짓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사고가 경직되지.'
그래서 원은 세조 때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폐지하자고 효종에게 말했다.
"아버지,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폭정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 백성들끼리 감시하게 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합니다."
효종은 읽고 있던 책을 놓고 원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직된 사회로 변해버립니다. 경직된 사회의 백성들은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기에 심적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다 보면 분노가 쌓이게 되고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오가작통법을 폐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흐음···."
효종은 청나라의 볼모로 있으면서 한시라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다.
아버지인 인조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다.
만약 원이 힘을 가지지 않았다면 대신들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네 말이 맞다. 감시하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대책은 있어야 한다."
"의금부와 비변사가 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긴 하지만, 그들은 믿을 수가 없구나."
조선 시대 첩보기관인 비변사는 북쪽 여진족과 남쪽 왜구의 활동을 감시하고 이들의 침략을 막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하지만 양란을 막지 못했다.
그러니 효종이 믿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계책이라도 있느냐?"
효종의 물음에 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
'여기서 입을 잘못 놀리면 죽도 밥도 안되지.'
아무리 자신을 믿고 지원해주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조서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 지금 조선은 내정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것 아니냐?"
"그래서 말인데···. 능력도 없는 비변사는 해체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대사성 김익희(金益熙)가 비변사를 폐지하자고 말하더구나."
순간 원의 머릿속이 광속으로 돌아갔다.
김익희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희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제라고 들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음···."
원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여기서 효종의 마음을 확실히 결정짓게 해야 했다.
"양난 이후 비변사의 권한이 확대 강화되었습니다. 행정, 정치, 경제, 외교, 문화까지 협의 결정하면서 의정부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비변사를 폐지하시고 성균관에서 능력을 썩히고 있는 김익희를 수장으로 새로운 정보기관을 만드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새로운 정보기관이라···, 그리고 수장으로 김익희를 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원은 21세기 국가 정보기관을 예로 들어 아는 대로 말했다.
"네 말은 안과 밖으로 나누어서 정보기관을 운영하자는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지금 조선군은 방어에 치중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토를 넓히고 진출하는 일은 경비대가 맡고 있고요."
"음···."
효종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천천히 흔들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럼 비변사를 해체하고 새로 정보 조직을 만든다면 어떤 이름이 좋겠느냐?"
"말 그대로 하면 좋을 듯합니다. 나라도 작게 보면 하나의 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 '국(國)'자와 집 '가(家)'자를 써서 '국가정보원'이 어떻겠습니까?"
"국가정보원이라···."
"집에서 가장이 하는 일이 뭐겠습니까? 옆집이 어떻게 사는 것도 알아야 하지만, 자기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 좋구나!"
이로써 새로운 정보기관인 '조선 국가정보원'이 탄생 되었다.
쓸데없이 비대해져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비변사는 폐지하기로 했다.
그동안 비변사는 전직 정승부터 5조 판서와 참판,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니 의금부가 힘을 쓰지 못했다.
효종은 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 국가정보원의 조직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1청이 하는 일은 조선의 왕실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조선에서 왕이란 하나의 정점이었다.
왕이 없다면 조선이란 나라가 성립되지 않았다.
왕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야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1청은 조선 국가정보원에서 가장 중요했다.
역모와 반란을 막고 조선 왕실을 보필하는 제1청의 임무는 막중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었다.
제2청이 하는 일은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백성들의 삶을 살펴 보호하고 관리하는 일이 주 임무였다.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고, 불온한 세력이 민란을 일으키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이번에 제거한 검계 같은 폭력조직이 다시는 싹이 트지 못하게 감시하는 일도 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제3청은 주변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일이었다.
또한 사신과 사절을 파견할 때, 보호하는 임무도 맡기로 했다.
"앞으로 세상은 좁아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기차가 다니면서 신의주에서 전주까지 하루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철도가 예맥의 땅 서쪽 끝인 서맥까지 놓인다면 며칠 만에 수만 리 길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서역과 교류는 활발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 그래서 세상이 좁아진다는 말이구나. 그렇게 된다면 국가정보원이 할 일이 더욱 많아지겠구나."
"맞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제3청의 관리들은 외국어를 익혀야 합니다."
"음···. 알겠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아니다. 내가 고맙구나. 이리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백성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네 덕분이구나."
효종은 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도 잘 컸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의 곁을 떠나 조선을 위해 돈을 번다고 옹진반도에서 종이와 연필을 만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인 인조는 그런 원을 그냥 두었다.
'아마 돈 때문이었겠지.'
그때 조선은 너무나 가난했다.
손톱만 한 은덩이 한 조각이라도 필요했다.
그런 상황이라 어린 아들이 홀로 떨어져 사는 데도 아무 말도 못 했다.
힘이 없어 어릴 때부터 고생만 시킨 아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원이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싶었다.
심양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 자신의 품 안에서 조그마한 원이 했던 말이 모두 이루어졌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구나.'
비록 청나라를 완전히 멸하지는 못했지만, 청나라의 발원지인 북녘땅을 점령하고 그곳에 사는 여진족을 조선의 백성으로 끌어안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서역까지 진출하다니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지만, 신기하고 놀라웠다.
"연(棩)아."
효종은 원의 아명 대신 휘(諱)를 불렀다.
휘는 원이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이다.
이제 혼인했기에 효종은 원이라 하지 않고 진짜 이름인 연이라 불렀다.
"네, 아버지."
"비(妃)는 마음에 들더냐?"
"네?! 네."
이제 조선은 대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굳이 빈(嬪)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그래서 효종은 비라 불었다.
연은 그런 예법을 잘 몰랐기에 잠시 당황했다.
"네가 종묘사직을 원한다면서 한 말대로 태자비를 택하라고 전했는데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구나."
"고맙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였습니다."
효종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역시 자신이 생각한 게 맞았나 보다.
이제 아명을 버리고 정식 이름을 갖게 된 연은 평생 같이 살 자신의 아내인 태자비를 보고 무척이나 기뻤다.
연은 아직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이라 첫날 밤을 그냥 보냈다.
손만 잡고.
'진짜 손만 잡았지.'
* * *
효종 4년(1652년) 7월 말.
신의주에서 출발한 조선군 제15사단은 1만 리 길을 걸어서 4개월이 넘어서야 티베트의 수도 라싸(拉萨)에 도착했다.
11사단부터 편성된 조선군은 모두 5개 사단이었다.
그중 13사단과 14사단은 서역 남로와 북로를 이동하며 도로를 건설하고 요새를 지으면서 서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12사단은 만주와 예맥의 땅 동쪽으로.
11사단은 한반도 곳곳에 배정되었다.
남은 15사단이 이번 티베트 사신 방문을 맡았다.
기동력이 있는 예맥 1개 기병 연대가 15사단을 보호하면 뒤를 따랐다.
하지만 티베트고원으로 접근하면서 따라 올 수 없었다.
말조차 다니기 힘든 험지이기도 하지만, 말먹일 풀이 없었다.
그래서 예맥 기병대는 고원 아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네요?"
"그럼, 함경도에도 사람이 사는데."
"에이, 함경도와 이곳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산길을 걷고 있자니 짜증이 난 제15사단장 걸웅이는 참모를 째려봤다.
"내가 함경도 출신인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제가 한 번도 함경도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걸웅이는 단지 비가 내려서 짜증이 난 게 아니었다.
오는 내내 준가르 놈들이 찝쩍거려서 예상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것 때문이었다.
"우기 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우기 한가운데 들어서 버렸네."
"그러게 말입니다. 앗! 저기 보입니다."
고개를 넘어서자 멀리 푸른 초원 위에 하얀 성벽이 보였다.
성벽 위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채가 있었는데 달라이라마가 산다는 포탈라궁이 틀림없었다.
"사단장님, 다 왔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단단히 경계하라 이르고 호수 앞에 진을 친다."
"멸!"
드디어 준가르의 본거지에 도착했다.
'좋게 끝내면 좋으련만···.'
어차피 명분을 얻기 위해 온 것이니, 어떻게 끝나도 상관은 없다.
그렇지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조선군 제15사단장인 걸웅이 또한 힘없는 백성 출신이었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속속 도착하는 조선군을 보고 포탈라궁 주변 마을은 혼란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