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예맥 기병대(6) >
러시아인은 바이킹의 후손이라고 한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온 노르딕 인이 러시아인의 원류라는 게 기본적인 학설이다.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로 들어온 바이킹들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해 볼가강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때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민족 개념이 없었다.
키예프, 노브고로드, 수즈달, 블라디미르라는 공국이 있었지만, 3만 명도 채 안 된 조그만 독립 도시국가였다.
아기자기하게 살던 이들에게 어느 날 천재지변보다 더 무서운 일이 닥쳤다.
그건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12세기부터 시작한 몽골의 침략은 13세기에도 다시 발생했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후방에 불안 요소를 두지 않는다'면서 러시아를 초토화해버렸다.
그리고 세운 나라가 킵차크한국이었다.
킵차크한국은 러시아 정도는 간접 지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 떠오르고 있던 모스크바 공국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킵차크한국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던 모스크바 공국이 커져 버렸다.
대리자가 된 모스크바 공국은 주변 도시를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여 킵차크한국에 받치면서 힘을 키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말박이 유목민이 세운 킵차크한국은 내부에서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라도 한 것처럼 칸까지 암살하고 권신까지 등장해 수도 없이 칸을 갈아치웠다.
흑사병의 영향도 있었지만, 망할 징조가 틀림없었다.
1380년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주변 공국들과 연합하여 끝내 킵차크한국을 쫓아냈다.
그래서 생긴 최초의 러시아 왕조가 류리크였다.
루스 또는 루시라는 러시아를 칭하는 말은 이때 만들어진 류리크 왕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은동리 본사에서 원은 한 노인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반 3세가 차르라 불러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루스 차르국이 되었단 말입니까?"
"네, 전하.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 건 아니지만 틀림없을 겁니다."
"흠···."
'바위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사마르칸트까지 수색에 나선 예맥 기병대는 그곳에서 고려인 출신 학자를 만났다.
그 고려인 학자는 현재 원 앞에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원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판단하려면 현지 정세에 밝은 자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모셔온 고려인 출신 학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겉모습이 고풍스러운 현자처럼 생긴 학자는 사마르칸트에서 유명한 학자였다.
"그대의 말에 의하면 지금 우리 조선의 영토인 예맥의 땅을 약탈하고 있는 자들이 노브고로드 공국이란 말이지요?"
"네, 맞습니다. 전하. 이반 4세의 명에 따라 시작된 일입니다."
"이반 4세라···."
그가 어떤 자인지 원은 알지 못했다.
뇌제(雷帝)라 부르는 이반 4세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다.
노년에 아내가 죽자 미쳐서 며느리 뱃속에 들어있는 손자를 유산시키고 아들 바실리를 몽둥이로 패 죽였다.
하지만 광활한 시베리아에 진출한 업적 때문에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두 요새에서 잡힌 에르마크가 노브고로드 공국의 앞잡이라는 말입니까?"
"네, 전하. 그는 하수인일 뿐입니다."
"음···."
학자의 말을 듣다 보니 러시아가 어떻게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는지 원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럼 지금 토볼스크라는 곳에 있는 자들은 뭡니까? 그 추운 곳에서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던데."
"에르마크가 시비르한국을 점령하면서 남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5월부터 9월까지는 토볼스크도 살만한 곳이라 알고 있습니다."
원은 예맥 기병대에게 최소 대대 단위 이상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예맥의 땅에 남아있는 코사크 용병들이 겁도 없이 기습했기 때문이다.
또한 토볼스크라는 곳에 흩어져 살던 시비르한국 잔당들도 문제였다.
큰 피해 없이 물리치긴 했지만, 모피를 노리고 온 도둑놈들이라 모두 소탕하라고 명 했다.
'역시 몽골이 문제였어.'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단지 정복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수많은 씨를 뿌리고 다녔다.
그래서 '러시아인의 얼굴을 한 꺼풀만 벗기면 몽골인의 모습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발정 난 개새끼들이 세상을 휩쓸었군.'
예맥의 땅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수많은 몽골의 후예들과 부닥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로잡으라 했지만, 이제는 보는 족족 사살하라 명 했다.
'더는 대원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원은 대만에서 일이 터진 후로 아군의 피해 없이 원하는 일을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렇다 해도 최대한 아군의 사상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원은 예맥의 땅이든지, 몽골초원이든지, 비단길 주변에서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은 가차 없이 사살하라 명 했다.
'더는 일본에 보내지 않아도 돼.'
이미 일본으로 보낸 몽골 젊은 남자들이 10만 명이 넘었다.
20만 명을 채우려 했지만, 더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발정 난 새끼들끼리 알아서 잘하겠지.'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씨를 뿌렸던 몽골족과 성진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이 알아서 할 일이라 생각한 원은 당분간 열도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건 바로 몽골의 후손이 남아있는 중앙아시아였다.
*
기수가 이끄는 조선전력공사 기병대는 우르구(울란바토르)를 거쳐 예맥 호수(바이칼 호수)로 넘어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예맥 기병대는 21세기에 노보시비르스크라 부르는 곳까지 문제없이 이동했다.
그런데 오비강을 건넌 후부터 많은 일이 발생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기병대 사령관 기수는 안전을 최우선시 했다.
기병대가 이동하기 전에 다수의 정찰대를 내보냈다.
그랬기에 우르구에서 예맥 호수로 넘어가는 협곡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찰대는 5명으로 구성했다.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에 노출되어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에 정찰대 뒤에는 50명으로 구성된 소대 지원 병력이 뒤를 따랐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대대 단위로 나눈 예맥 기병대를 감히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은 중앙아시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사방이 확 트인 초원에서 예맥 기병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초원 곳곳에 파여있는 물웅덩이에 숨어있다 공격하고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말 타는 것에 자신 있는 여진족이지만, 기습하고 바로 도망치는 놈을 잡기는 어려웠다.
함정을 파고 기다릴지 모르기에 계속 추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몇 놈을 잡고자 대군의 이동을 멈출 수도 없었다.
아무튼 낮이고 밤이고 수시로 치고 빠지는 기습이 있었다.
다행히 기병대원 모두 플라스틱으로 된 방검복을 입고 있었기에 급습에도 사망한 대원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기수는 더 많은 정찰대를 내보냈다.
"이동 경로 주변을 보호하고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
그러던 중 정찰 대원 중 한 명이 뒷일을 보다가 습격을 당했다.
가지고 있던 총을 빼앗겼다.
다행히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군모를 쓰고 있었기에 정찰 대원의 머리는 깨지지 않았다.
비명을 듣고 달려 온 정찰 대원들이 바로 추적에 나섰지만, 잡지 못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기에 멀리까지 추적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기수는 처음에는 코사크 용병을 의심했다.
하지만 총이 아닌 활과 칼이라는 말에 생각을 달리했다.
"아무래도 몽골 놈들 같습니다."
"이곳까지 몽골의 세력권인가?"
"이쪽 전체가 몽골의 피를 이어받는 놈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동안 괴롭혀 온 놈들의 실체를 파악한 기수의 두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즉시 중대 단위로 흩어져 수색하라! 무기를 가지고 있는 놈이나 반항하는 놈은 무조건 사살하라! 잃어버린 총을 찾을 때까지 수색을 멈추지 말아라!"
"""멸!"""
탈취당했다고 하지만, 조3 소총은 쉽게 복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당했는데 이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에 들어간 예맥 경비대는 중앙아시아 서쪽 지역 전체를 휩쓸었다.
갑자기 나타난 중대 단위의 기마병들을 보고 소규모로 살던 유목민들은 기겁했다.
"우리는 조선에서 온 조선전력공사 기병대다. 우리 대원이 기습을 받고 크게 다쳤다. 너희들 중 총을 가지고 있는 자를 본 적이 있다면 말하라. 큰 보상을 하겠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손짓·발짓으로 표현했다.
그와 중에 고려인 출신 학자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진짜 원흉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서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준가르(準噶爾)였다.
17~18세기에 신장(新疆), 외몽골, 내몽골,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남부의 광활한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은 모두 준가르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말이 왕국이지 유목민의 특성상 일정한 정착지가 없기에 놈들의 본거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알마티가 놈들의 본거지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모두 도망간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반도의 몇 배나 되는 지역을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때 고심에 빠진 기수에게 고려인 학자가 말을 꺼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티베트로 가야 합니다."
"뭐라고 하셨소? 티베트라니···."
"오이라트 출신의 부족 연합체인 준가르가 티베트도 점령하고 그곳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티베트에 가서 해결하여야 합니다."
조선전력공사의 기병대가 몽골을 지나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은 준가르의 칸인 호토고친은 즉시 부하들을 내보냈다.
비단길 천산 북로를 이용해 미리 와 있던 호토고친의 부하들은 본대에서 멀리 떨어진 정찰 대원들을 노렸다.
"티베트라···."
전모를 파악한 기수는 티베트까지 쳐들어갈까 생각했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장님께서 명령하신 일이 더 중요해.'
어차피 비단길을 따라 조선군이 이동하면서 도로를 만들고 요새를 짓고 있다.
하지만 당한 만큼 복수는 해야 한다.
"주변의 젊은 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멸!"""
명을 내린 후, 기수는 목적지인 무수(악토베)로 향했고, 예맥 기병대는 주변을 휩쓸었다.
*
모든 내용을 파악한 원은 한동안 고심에 빠졌다.
'티베트를 쳐야 하나?'
건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힘이 지배하는 시대야. 우습게 보이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어.'
생각을 마친 원은 고려인 학자에게 물었다.
"티베트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소."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나는 그대의 생각을 알고 싶소."
학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록 조선말을 할 줄 아는 고려인이라고 하지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준가르 부족을 공격하는데 찬성할 순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학자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 사절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절이라니···, 무얼 때문입니까?"
"저는 선친의 고향이 이렇게 큰 나라가 된 게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조선이란 나라와 전하께서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분 없이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약탈하거나 죽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티베트를 공격하시면 그곳에 사는 힘없는 백성들은 어찌합니까? 제 생각에는 원한이 쌓일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이번에 일을 벌인 자들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그때 전하께서 생각하신 대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음···."
고려인 학자는 이곳까지 오면서 많이 놀랐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름이 알려진 학자라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경험이 많았다.
그런데도 조선 땅이 가까워지자 처음 본 신기한 기물들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차라는 것을 타고 옹진반도까지 오면서 그동안 자신이 봐왔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조선이란 선친의 고향은 별천지였다.
"조선의 힘이라면 티베트 정도야 정복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공격하신다면 원한이 쌓일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하신 대로 명분을 쌓고 움직이신다면, 미천한 저의 생각으론 더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소. 말해 줄 수 있겠소. 성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오."
학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원이 생각하기로는 '왕' 씨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름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선친께서 제게 물려준 이름은 지봉(知捧)입니다."
"지봉, 그대에게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전하."
"그대가 내 사절이 되어 티베트를 방문해 주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한 겨울이라 원은 날이 풀리는 대로 지봉을 티베트에 사절로 보내기로 했다.
원은 사람이 살기 힘든 고원인 티베트는 관심도 없고 조선의 영토에 포함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