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예맥 기병대(4) >
효종 3년(1651) 8월.
원이 속속 도착하는 정보를 토대로 만든 예맥의 땅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한양에서는 태자빈에 대한 논의가 불이 붙었다.
조선 시대에서 왕은 대부분 10세 전후로 나이가 비슷한 처자와 혼례를 올렸다.
원의 나이 11살.
이제 결혼을 미룰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차후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서인지 태자빈의 자리를 놓고 가문마다 사활을 걸었다.
자신의 가문에서 태자빈이 나온다면 앞날이 보장될 거란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거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원이 구상하고 있는 조선은 외척 가문 같은 권문세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버지인 효종에게 왕족에게도 입신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시라고 말했다.
"폐하, 태자의 나이가 혼기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니 간택령(揀擇令)을 내리셔서 태자빈을 맞이해야 합니다."
대신의 말에 효종은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원에게 들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택령이라니 옳지 않소."
"폐하 어찌 간택령을 부정하십니까? 예로부터 간택령은···."
"논란이 많았지요."
"예?"
대신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효종을 놀라 바라보았다.
간택은 대대로 내려오는 왕가의 중요한 행사인데 논란이 많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간택이란 악습일 뿐이오."
"그렇게 보시는 연유를 소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이 모른다고 하니 짐도 이해할 수 없구려."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지한 소신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효종은 단상에서 내려와 대신의 탁자 앞에 섰다.
이제 조선은 정전(正殿)에서도 신하들이 탁자를 두고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장시간 국사를 논하는데 계속 서 있게 하는 건 좋지 못하다는 원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은 경복궁이 불타버린 통에 대신 사용하는 정전이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지만, 마당에는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었다.
또한 유리창과 전구가 설치되어 있어 전과 다르게 밝고 환했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 온 햇살이 두툼한 근육질로 된 효종의 어깨를 비추며 묘한 신비감을 조성했다.
그 모습을 본 대신은 움찔하니 놀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효종은 정전을 거닐면서 입을 열었다.
"간택은 흉악한 원나라 몽골 놈들이 처녀 조공을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오. 이제 망해버린 명나라도 수시로 처녀 조공을 요구해왔었소. 그래서 고려 때부터 성품을 보지 않고 단지 인물만 보고 뽑는 게 간택이었소."
"폐하!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간택은 대대로 내려온 중요한 행사입니다."
대신의 말에 효종은 몸을 확 돌렸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요. 인물만 보고 뽑는 간택은 폐단이 많았소.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생긴 간택령 때문에 혼기가 꽉 찬 조선의 처자들은 어찌할 것이요? 간택령은 문제가 많으니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오."
"예? 폐, 폐기를 하다니오. 폐하, 재고하시길 간청드립니다."
"세종께서 간택을 통해 3년간 고르고 골라 맞아들인 휘빈 김씨를 2년 만에 투기 죄로 이혼시킨 사실을 모르오?"
"망극하옵니다. 폐하."
효종은 선왕들의 예를 들며 간택의 폐단을 역설하였다.
알고 있던 대신들은 입안이 쓴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처음 듣는 대신들은 의아해하며 예조판서 조경을 바라보았다.
조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효종의 말이 맞다는 뜻이다.
"간택으로 가법이 올바르며 인자하고 현명한 이의 딸을 태자빈으로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단지 인물만 보고 뽑는 간택이니 폐기하도록 하시오."
쓸만한 신하들만 남은 정전이지만, 일생일대의 기회라 생각했는지 효종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앞으로 간택 제도를 버리고 중매를 통해 명문의 숙녀를 널리 구하고자 하오. 그러니 경들은 서운해하지 말고 인척이 있다면 전하여 알아보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간택이 아니라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신하들은 합창하듯 외쳤다.
조선 시대 세자빈을 뽑는 간택은 어처구니없었다.
어느 집안 처자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하늘이 정해주는 것에 따라 얼굴만 보고 뽑았던 거였다.
이런 간택 제도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세종 이후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은 자신에게 닥친 혼사를 대충 처리할 마음이 없었다.
'전생까지 통하여 처음 하는 건데 심사숙고해야지.'
비록 정해준 처자와 혼인을 해야 하는 처지지만, 마님을 모시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내가 생각한 미모가 아니야.'
처음 간택이 미모를 보고 뽑는다는 것을 알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 미모라는 게 21세기 기준으로는 그냥 복스러운 마님이었다.
놀란 원은 예조판서 조경을 찾아가 간택 제도에 관해 물어보고 효종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버지, 간택령이 내려지면 조선의 인구 증가에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응? 왜?'
'간택령이 내려지면 끝날 때까지 혼기에 들어선 모든 처자들이 혼인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게···. 아, 그렇구나.'
'그래서 소자 생각해 봤습니다.'
'말해 보거라.'
'이번 기회에 간택 제도를 폐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간택은 원나라······."
원은 예조판서 조경에게 들은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음···. 그런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악습이니 폐기하는 것이 좋겠다.'
'맞습니다. 아버지. 이제 몽골 땅도 점령했는데 굳이 좋지 않은 악습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도 예맥 기병대가 몽골 초원을 뒤져서 성인 남자들을 잡아 오고 있었다.
곳곳에 자신이 칸이라고 우기며 초원의 왕을 자처하던 자들도 예외 없이 산해관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네 안해가 될 사람인데 괜찮겠느냐?'
'소자, 이 나라 조선을 위하는 일이라면 상관없습니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튼튼한 안해를 맞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의미는 아버지께서 잘 아실 겁니다.'
'알지만, 후회하지 않겠느냐?'
'종묘사직이 번창하는 일인데 어찌 후회하겠습니까?'
효종은 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들인 원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처자의 모습이 있을 것 아니냐?'
'···소자,'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원은 쓸 적 말을 비틀었다.
'소자, 눈이 쌍꺼풀이라도, 입이 크더라도, 얼굴이 달덩이가 아니더라도, 키가 크고 말랐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습니다.'
궁궐을 거닐다 보면 이제 11살인 원보다 큰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원은 키를 강조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의 키는 160cm 가 넘었다.
옹진반도에서 자란 여자들도 대부분 150cm 가 넘었다.
하지만 조선 백성은 그보다 한참 작았다.
양난의 영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못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하!'
원은 효종이 크게 웃자 당황했다.
본심이 들킨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웠다.
웃고 난 효종은 원의 마음이 상할까 봐 좋게 말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자식 맘 모르는 부모도 없다.
'생각한 것이 남다르더니 보는 눈도 다르구나. 내 알겠다. 네 어머니에게 말해 놓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버지.'
다르게 말했는데도 효종이 눈치챘다는 걸 알고 원은 기쁜지 활짝 웃었다.
원이 생각하기에 다른 건 몰라도 쌍꺼풀이 있는 처자라면 성격이 좋을 듯했다.
'오냐오냐하며 큰 사람치고 성격 좋은 사람 없지.'
가름하고 입 큰 현대 미인은 조선에서 미인이 아니었다.
쌍꺼풀까지 있다면 팔자가 세다느니, 두 집 살림할 팔자니 하면서 기피의 대상이었다.
21세기 기준으로 미인인 처자는 평생 예쁘다는 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자랐을 게 틀림없었다.
'뭐, 이쁘면 이쁜 짓 한다는 데 나나 문식이는 모르는 일이지.'
둘에게 말대꾸라도 해준 후배들은 미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원은 조선에서 미인이 아닌 조건을 비틀어 효종에게 말했다.
원이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아챈 효종은 아들이 원하는 처자가 어떤 모습인지 감을 잡았다.
어릴 때부터 남과 달랐던 원이라 보는 눈도 다를 수 있다고 이해했다.
문제가 많은 간택 제도는 폐기하는 게 맞다고 봤다.
또한 내명부에서 말하는 아이를 잘 낳는다는 것과 효종이 생각하는 건강은 달랐다.
매일 같이 창을 들고 수련하고 있기에 어떤 사람이 건강한지 효종은 잘 알고 있었다.
* * *
점점 가까워지는 결혼을 앞두고도 원은 다른 일 때문에 정식이 없었다.
"2천 리나 떨어져 있었구나. 바로 밑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님."
은쌍식은 자를 들고 지도를 이리저리 재보는 원을 보고 눈을 껌벅였다.
30분 넘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2천 리라니, 궁금했다.
"예맥산맥 아래 현두 요새를 짓고 있는 건 알지?"
원은 우랄산맥을 예맥산맥으로 이름 지었다.
'예맥의 땅 서쪽 끝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니 예맥산맥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그동안 자기 편할 대로 이름을 지었던 원이다.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다.
세계 최대 크롬 산지인 악토베를 '녹이 없다'는 의미인 무수(無銹)로 명명했다.
"그럼요. 현두 요새는 벌써 다 지어졌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아무튼 그 밑으로 2천 리 떨어진 곳에 내가 찾고 있는 크롬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요?"
원은 코사크 용병들에게 압수한 지도를 보고 크롬이 매장된 지역을 유추해 냈다.
아직 정찰도 해보지 않는 곳이지만, 원이 말하면 다들 그러려니 했다.
원은 악토베(무수)를 잘 알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국제 협력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쌍식아, 이리 와서 여기 좀 봐봐라."
"네, 사장님."
"이곳에 요새를 짓고 조선의 영토로 삼아야겠다."
은쌍식은 자로 거리를 재보더니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멉니다. 점령하는 건 문제 될 일이 없지만, 관리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유목민들도 없다고 하니 미리 점령하고 요새를 지어 국경선을 확정 지어야겠다."
은쌍식은 원이 빨간색으로 그려 놓은 지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있는 예맥 기병대로 만주부터 저곳까지 모두 관리하기는 힘들 겁니다."
"만주는 굳이 예맥 기병대가 관리할 필요가 없다. 이미 조선의 땅이고 조선의 백성들이니 포도청을 짓고 관리하면 된다. 또한 몽골에는 조선군을 주둔시켜 놓을 놓으면 충분하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도 땅이 너무 넓습니다."
"그러긴 하지만, 이곳만 틀어막으면 안쪽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원이 생각해도 자신이 그려 놓은 경계선은 엄청나게 넓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지킬 자신이.
"어차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땅이다. 그러니 요새만 단단히 지어 놓고 방어만 하면 될 것 같구나."
"그 정도라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은쌍식은 예맥산맥에서 카스피해까지 이어진 경계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예맥산맥에서 카스피해로 이어진 서맥강(우랄강)까지 있으니 국경선을 확정 짓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이곳 서맥강 하구를 서맥(西脈)이라 부르고 요새를 짓고 교역 장소를 만들라고 전해라."
"네?"
조선의 경제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만든 상품을 4개로 쪼개진 대륙과 혼란에 빠진 일본에 팔면서 벌어들인 금덩이와 은덩이가 무한정 쌓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챙길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병신 짓이지.'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서양의 범선들이 대마도 자유무역 도시까지 오고 있다.
하지만 그 물량 가지고는 서유럽에 풀기도 부족했다.
'동유럽도 있지만, 남쪽도 무시 못 하지.'
스페인은 남미를 약탈하여 부를 이루었지만, 원은 정식으로 물건을 팔고 부를 쌓을 생각이다.
'더 중요한 땅도 있고.'
원은 굳이 동남아를 거쳐 서쪽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었다.
조선의 땅으로 확정된 길을 따라 서역으로 진출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원이 지도를 보고 히죽히죽 웃자 은쌍식은 걱정되었는지 한마디 했다.
"너무 과하신 것 아닙니까?"
"과해도 해야 할 일이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땅도 땅이지만, 그 아래 감추어진 자원이다. 자원이야말로 진짜 보물이니 아무도 모를 때 챙겨 놓아야 한다."
원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의주에서 크롬 광맥이 몰려 있는 무수(악토베)까지는 직선거리로 5,000km나 된다.
서맥이라 명명한 카스피해 북쪽 도시는 더 멀었다.
"이미 현두 요새를 확보했는데 예맥해까지 진출해야지. 그래야 안전할 것 같다."
"그래 보이긴 합니다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동안 우리는 명분 없이는 한 번도 남을 땅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원은 명분 없이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대원들에게 수시로 말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게 틀림없으니 함부로 남의 영토에 침범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코사크들이 사는 땅으로 진격하자고 하니 은쌍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에겐 충분한 명분이 있다."
"네? 명분이 있어요?"
"코사크 놈들이 우리 땅까지 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죽이지 않았느냐?"
"아···, 네. 맞습니다. 그놈들은 다 죽여야 합니다."
원의 말에 넘어가기 시작한 은쌍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니 이곳에 요새를 짓고 주변에 알리거라. 앞으로 이곳을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경고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용식이에게 단단히 말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