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정화(6) >
대동강 모래밭에 칼을 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었다.
황동으로 반짝거리는 조3 소총을 든 옹진십팔동인들이 강변 한쪽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인들 앞에는 뒤로 손이 묶여 꿇어앉아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가관이었다.
멀쩡한 자들도 있었지만,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판다처럼 시퍼런 멍이 눈두덩이를 형성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모두가 모래밭에 있는 두 사람을 주시했다.
"약조는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난 네놈같이 쓰레기가 아니다. 이 양아치 새끼야."
"개소리는 그만하시오. 이기면 죄를 묻지 않고 살려준다고 한 약조나 지키시오."
"흥! 떼거지가 아니면 힘도 못 쓰는 놈이 검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이오."
"그래서 내 아우에게 집단으로 칼질을 했더냐?"
"그건 우발적 사고였소."
"잔소리 말고 들어오거라. 내 처음은 양보하겠다."
"고맙소."
평양 일대에서 적수가 없다는 검계의 우두머리 주표철이 발끝에 힘을 주고 번개처럼 튀어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눈앞에 있던 원의 제1 호위대 대장인 검수는 희미한 흔적만 남기로 사라져 버렸다.
"잘 보고 휘두르거라. 양아치 새끼야."
"헉!"
빠르게 뒤로 돌아선 주표철은 손목을 유연하게 꺾어 아래에서 위로 칼을 휘둘렀다.
-퍽!
순간 목울대에 고통이 느껴지자 주표철은 주자 앉으며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주표철은 극심한 고통에 이어 숨조차 쉬기 힘들어졌다.
"크크커컥."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난 주표철은 검수를 노려봤다.
"다시 덤벼봐라. 살려면 젓 먹는 힘까지 내야 할 것이다. 이 쓰레기 양아치 새끼야."
"그 말은 그만하시오. 내 어찌 양아치란 말이오."
"남 밑에 빌어먹고 사는 놈이 양아치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할 말이 없어진 주표철은 이를 부드득 깨문 뒤 모든 힘을 다해 필살기를 휘둘렀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자신이 팔 끝에는 칼이 아니라 붉은 피가 뻗어나가고 있었다.
"크아아!"
-서걱!
"으아악!"
이번에는 손가락이었다.
한쪽 손목이 잘리고 남은 손의 손가락까지 사라지자 주표철은 불에 덴 듯한 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검수를 노려봤다.
"살려는 주마. 이놈을 살려라!"
"네?"
검수는 옹진반도에 초청된 무술가들이 극찬한 무술의 천재였다.
주먹질부터 다양한 무기를 잘 사용했지만, 그중 조선의 검인 환도(環刀)를 사용할 때는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순방이를 죽인 놈을 살려두고 싶지 않지만, 약조했으니 살려서 끌고 가자."
"네, 대장님."
호위 대원은 재빨리 뛰어가 주표철의 손목을 압박하고 피가 나오는 것을 막았다.
또 다른 대원은 횃불을 들고 가 그대로 주표철의 손목을 지져 버렸다.
"크으아악!"
너무나 고통스러운지 주표철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 누구냐? 자신이 양아치가 아니라 진짜 검객이라 자부한다면 덤벼라. 이기면 모든 죄를 사하고 살려주겠다."
이미 검수의 실력을 본 검계 놈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주영으로부터 호위 대원인 순방이를 죽인 검계 조직을 알아낸 검수는 대원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급히 왔다.
놈들의 본거지 중 하나인 기방을 급습해 반항하는 자는 병신으로 만들거나 죽여버렸다.
굳이 총을 쏠 필요도 다른 대원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스승조차도 검수의 무예를 인정할 정도였으니 그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
원은 그런 검수에게 '수'자 돌림 이름을 내려주고 효종의 호위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효종이 거부했다.
효종 또한 적수가 없는 장수급 무장 아닌가.
자신보다 아들의 안전이 더 걱정되었던 거다.
"모두 끌고 이만 가자."
"네, 대장."
정신을 잃은 주표철은 말에 얹혀 실렸고, 나머지는 튼튼한 폴리에틸렌으로 만든 밧줄에 묶여 끌려갔다.
대동강 변을 벗어난 일행은 새로 지어진 평양 포도청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진영(鎭營) 또는 토포청(討捕廳)이라 불리는 곳이었지만, 효종의 명에 의해 전부 포도청으로 이름을 바꿨다.
"오, 오셨습니까?"
평양 포도청의 수장이 놀란 눈으로 뛰어나와 검수와 마주했다.
"알아보셨습니까?"
"그게···."
"어명입니다. 청장님."
"증거가 없어서···."
"그러겠지요. 없을 수밖에 없겠지요."
말을 마친 검수의 손이 순간 번쩍거렸다.
발검과 동시에 착검을 마친 검수의 손에는 마패가 들여있었다.
그와 동시에 평양 포도청장의 전립이 갈라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짓···."
"이자를 체포하라. 죄명은 범죄조직의 뒤를 봐주고 뇌물을 받은 것이다."
"네, 대장."
원은 효종으로부터 마패를 하나 받아 왔다.
경비대 창설을 인조로부터 허락받을 때 조선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 검계를 잡으러 가려면 마패가 필요했다.
검수는 기방에서 평양 검계 일당을 검거하고 주표철과 내기를 했다.
이기면 죄를 묻지 않고 살려주지만, 지면 뒤를 봐주는 자를 모두 불기로.
그래서 일부러 쓰레기니, 양아치니, 도발했다.
양아치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주표철에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줬다.
'양아치는 동냥아치보다 천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스님들이 동령(動鈴)을 흔들며 탁발하는 것을 멸시하면서 동냥아치란 말이 생겼는데 그보다 더 천하다는 양아치란 소리에 주표철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양아치가 아니라고 큰소리치는 주표철은 자신의 뒤를 봐주는 놈들의 이름을 적어 품 안에 넣고 검수와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는 좀 전과 같았다.
검수의 지휘하에 평양 또한 혼란에 휩싸였다.
평안 감사도 한 수 접는다는 만석꾼부터 줄줄이 포도청으로 잡혀 들어왔다.
이런 일은 삼남에서도 벌어졌다.
그동안 고관이나 거부들의 손발이 되어 백성들을 죽이고 착취했던 검계, 건달, 무뢰배, 불한당, 왈패, 왈짜들이 검거되었다.
몇몇은 산으로 도망을 쳤지만, 이미 체포령이 떨어졌기에 도로나 장터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원은 신분패에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호적등록번호를 입력해 놓았다.
발급 지역과 생일이 있는 호적등록번호 14자리 때문에 수배자 목록은 빠르게 전달되었다.
범죄를 밥 먹듯이 하는 놈들이 일부 도망쳤지만, 앞날은 뻔했다.
위조할 수 없는 신분패라 평생 산속에서 산다면 몰라도 마을로 내려오거나 도로를 이용한다면 바로 잡힐 게 분명했다.
신분패 발급 이후 전국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검거 작업은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다음 달부터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없어진다며?"
"그렇다고 하더라고. 폐하께서 나쁜 놈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더는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폐기하기로 하셨다는구먼."
"잘됐네. 그동안 일이 있어도 밤에는 나갈 수가 없었는데. 정말 잘됐어."
조선에서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태종 1년(1401)에 처음 실행되었다.
'초경3점(初更三點) 이후 5경3점(五更三點) 이전에 행순을 범하는 자는 모두 체포한다.'
오후 8시부터 오전 4시 반경까지 통행을 금지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세조 4년(1458)에 두 시간을 줄여서 2경부터 4경(오후 10시∼오전 3시)으로 바꾸었다.
다시 2경 후 5경(오후 10시~오전 4시)으로 변경되었지만, 이번에 아예 전면 폐지되었다.
상업을 활성화하려면 통행금지 제도를 없애는 것이 좋다는 원을 말에 따라 효종이 명을 내린 거였다.
물론 대안을 준비했다.
신분패를 발행하면서 뒷골목에서 기생하던 양아치들을 모두 검거해 탄광으로 보내 버렸다.
또한 어두운 밤에 범죄를 저지르다 걸리면 가중처벌로 2배 또는 사형을 시킨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바로 무기 허가증 제도를 시행했다.
앞으로 조선에서 무기 허가증 없이 무기를 차고 다니면 곤혹(困惑)을 면할 수 없을 터이다.
효종 3년(1651) 5월.
어김없이 가뭄이 지속되었지만, 그동안 만들어 놓은 저수지 덕분에 모내기는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앞으로 농사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좋구먼."
"그러지 말고 만주로 가면 어떤가? 거기 가면 10결이나 되는 땅을 준다고 하던데."
"에이, 나는 그냥 이곳에 살라네. 이곳도 이제 3결까지 농지를 빌릴 수 있지 않은가.'
양난 이후 농지는 늘어났지만, 농사를 지을 백성들은 줄어만 갔다.
야망이 있는 젊은이들은 짐을 싸서 큰 마을이나 고울 또는 만주로 떠나버렸다.
그 통에 전처럼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넓은 농토를 가지고 많은 노비를 부리며 땅 없는 백성들을 착취하던 이들의 마음고생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소유한 노비들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넓은 농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농지를 빌리려는 백성은 없었다.
결국 노비들을 시켜 농사를 짓게 했지만,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인심이 좋지 않은 지주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조세 제도는 수확량과 상관없이 농지의 질을 보고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다.
또한 산동반도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쌀 때문에 사재기로 비싸게 쌀을 팔 수도 없었다.
썩을 쌀을 주고 고율의 이자를 붙여서 햅쌀로 받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인 경자유전의 원칙(耕者有田-原則, Land to the Tiller)이 자연스럽게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 * *
조선을 밑바닥부터 정화하는 작업을 끝낸 원은 다시 북으로 눈을 돌렸다.
"사장님 저도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이곳을 맡길 만한 이가 마땅치 않다."
"양순이가 있지 않습니까?"
"양순이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저보다도 한 수 위입니다."
"그게 문제다. 딱 너와 양순이 중간이면 최상인데···. 아쉽구나."
덤벙대는 은쌍식과 야무지게 일을 처리하는 양순이의 중간을 찾고 있지만, 마땅한 이가 없었다.
순한 양 같은 양순이가 언제부터 변했는지 모르지만, 가끔이 아니라 이젠 섬뜩할 때가 더 많았다.
'모두 내 잘못이지.'
양순이 있는대서 은쌍식이랑 잔머리를 굴렸는데 배웠나 보다.
원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양순이를 보고 옹진반도에서는 야차(夜叉)라 부르고 있었다.
'어쩜 생긴 건 보살 같은데 하는 짓은 인정머리가 없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게 생겼는데 용서가 없어요. 용서가.'
양순이가 떴다 하면 모두 긴장했다.
잘못한 것이 없나 다시 살펴봐도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에게 서슴없이 다가와 질문하는 연구원들조차도 양순이 모습이 보이면 입을 다물었다.
"양순이 좀 불러와라."
"네, 사장님."
잠시 후 양순이가 오자 원은 최대한 표정을 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양순아, 좀···."
뭐라 말해야 할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양순이가 너무 일을 잘하는 건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원의 표정을 보고 양순이가 곱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응?"
"전에 카바이드 때문에 아까운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많이 울었습니다.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 그랬구나."
"그러면서 사장님과 실장님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역시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더 난처했다.
"사장님과 실장님은 선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옹진반도 사람들을 위해 나섰습니다. 조선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래서 저도 욕을 먹더라도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음···. 고맙구나."
원은 양순이가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후세에 욕을 먹더라도 모두가 잘사는 조선을 위한다며 못된 짓을 거침없이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조금은 너그럽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은 양순이를 보고 밝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미안했다.
밑에서 일하느라 혼기를 놓쳤지만,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줄을 쓸 게 틀림없을 정도로 양순이는 고왔다.
하지만 모두가 무서워했기에 그 누구도 양순이와 가까워하지 않으려 했다.
양순이는 오직 한 사람 은진이와 친했다.
"내일 쌍식이를 데리고 북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너도 알겠지만, 예맥 기병대 졸업식 날이다. 그러니 이곳을 너에게 맡기려 한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래,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석돌이에게 말하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장님."
여진족으로 구성된 예맥 기병대는 원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하다.
예맥의 땅을 개척하는데 이들이 꼭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지.'
같은 예맥 사람이라 말하고, 부대 이름까지 예맥 기병대라 지워 줬기에 첫 졸업식에는 꼭 가야만 한다.
'시베리아를 개척하기에 앞서 먼저 몽골을 쳐야 해.'
그동안 몽골을 그냥 두었다.
만리장성이 조선의 손에 있기에 몽골과 청나라가 붙어먹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원나라 때 당한 것을 만 배로 갚아 줘야지.'
또한 몽골은 우랄산맥 남쪽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예카 뭐였는데···. 얼마나 먼지 모르지만, 그곳을 빨리 점령해야 해.'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원이지만, 그곳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스쳐 지나가듯 지도에서 본 지명인데 이름이 너무 길어 자세히 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