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81화 (81/275)

< 81. 정화(4) >

효종 3년(1651) 3월 1일.

원래라면 영의정이 된 김육이 수도 없이 사직을 청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김육은 70세가 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자신이 원했던 백성을 위해 뜻을 펼칠 수 있으니 노년의 몸이지만, 쉬지 않았다.

효종은 김육에게 의자를 내주어 앉게 했다.

"오늘부터 호구 조사를 시행한다고 하는데 경은 어찌 생각하오."

"태자가 만든 새로운 신분패는 위조나 변조할 수 없어 보입니다. 또한 신분패가 없다면 조선 땅에서 움직일 수 없게 한다고 하니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전과 같은 일이라···, 호패를 말하는 것이오?"

"네, 폐하. 호패를 받으면 군역과 노역에 동원되니 꺼렸지만, 신분패는 이득이 되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받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일이군요."

효종은 자신의 손가락 지문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경강 다리로 가면서 원은 새로운 신분패에 관해 설명하며 호구 조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사람의 손가락 끝에 그려진 지문이란 것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니 신기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원은 어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한두 번이어야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자식이기에 표정만 보고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신기한 지식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경이 생각하기에 태자는 어떤 것 같소?"

"태자가 하는 일은 저도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범인이 어찌 하늘에서 내려준 천재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흠···,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적당히 운을 띄운 효종은 김육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나랏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을 신하에게 말하려고 하니 왠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경에게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폐하. 폐하께서 내리시는 어명이라면 소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르겠습니다."

"하하, 그러건 아니니 제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경이 없다면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누가 한단 말이오. 그러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 바라오."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폐하."

젊은 왕과 노년의 신하가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껄끄러운 말이라 효종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오."

"제가 오해할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무엇인지 모르나 경청하겠습니다."

"흠···."

효종은 입을 열려다가 멈추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고심 끝에 효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에게 올해로 열 살이 된 손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네, 폐하. 둘째의 여식이 이제 열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아시는지···."

장남도 아닌 차남의 여식에 대해 효종이 말하자 김육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영의정이라고 하지만, 신하의 손녀를 거론했기에 김육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경도 알다시피 짐에게는 홀로 남은 어린 조카가 한 명 있소."

"회(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소. 삼형제 중에 모두 죽고 어린 회만 남았소. 그래서 부탁을 하고 싶소이다."

"하명(下命) 바랍니다. 폐하."

"경의 손녀가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다고 들었소. 그래서 말인데 경의 손녀와 회를 엮어 주고 싶소. 경의 손녀사위라면 회도 안심하고 살 수 있지 않겠소이까?"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로써 원이 가장 걱정했던 명성왕후 김씨는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慶安君) 이회의 아내가 되었다.

원은 경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효종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동안 가장 문제가 되었던 명성왕후 김씨 문제를 처리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회에게는 미안하지만, 종묘사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유전인지 아니면 보고 자라서인지 알 수 없다.

성격 좋기로 소문난 현종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지랄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대가 끊겨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원은 결심했다.

원은 종묘사직이라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절대 후궁을 두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이제 11살이 된 원은 세자빈을 간택하고 결혼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직 결혼에 대해 조금도 생각이 없었지만, 적당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있다가는 엮일 것만 같았다.

똑똑하다고 소문난 김육의 손녀가 지랄 같은 성격이란 건 알고 있다.

그 성격이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대마저 끊어진다.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고 있는 자신의 조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은 미리 손을 쓰기로 했다.

효종의 보살핌으로 잘살고 있는 사촌 동생 회에게 명성왕후를 떠넘기기로 했다.

'폐하, 회는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 회가 아직 어리지만, 장안에 똑똑하다고 소문난 김육 대감의 손녀와 혼인을 시키면 좋을 듯합니다.'

'너무 어리지 않느냐?'

'어리기 때문에 보살필 사람이 필요합니다. 김육 대감의 가문이라면 회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듯합니다.'

어차피 김육 대감의 후손은 세도 정치로 나라를 망쳤기에 미안한 마음이 별로 없었다.

효종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소현, 봉림, 인평 세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그중 첫째인 소현세자가 명을 달리하고 두 아들 또한 세상을 떠났다.

각별했던 사이기에 마지막 남은 형의 아들인 회를 보살피고 있지만, 친부모만은 못할 것 같았다.

효종은 그런 회에게 든든한 처가라도 붙여 준다면 마음이 놓일 듯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김육이 바로 받아들였다.

효종의 명에 의해서 왕의 사위나 처가도 이제는 관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효종의 직계가 아닌 경안군이라면 영의정 김육에게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 *

소식을 들은 원은 온종일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고 다녔다.

옆에서 지켜보던 은쌍식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암, 좋고말고. 정말 좋은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인데 저도 알면 안 되겠습니까?"

"이 나라 조선의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잘 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그렇습니까?"

조선전력공사의 이인자인 은쌍식이지만, 더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이 댕강댕강 잘리는 곳이 궁궐이라 알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화제(話題)를 바로 돌렸다.

"의식이가 그러는데 설파제는 이제 출시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 잘 됐구나."

그동안 설파제 개발을 끝냈지만, 바로 생산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체중이나 체질이 다르기에 다양한 경우를 예상하고 임상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 과민반응 같은 부작용이 적고 효능이 좋은 이상적인 용량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제 광범위 항균제인 설파제를 생산해 판매할 수 있겠구나.'

원은 떼돈을 벌 수 있는 상품이 하나 더 추가되자 눈앞에 황금빛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아기들의 우렁찬 울음소리도 귀에 들려왔다.

"앞으로 조선의 인구가 더욱 많이 늘어나겠구나."

"인구가 늘어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 도르곤도 설파제를 먹고 병이 나았다. 못에 찔려 살이 썩어가는데도 설파제를 먹고 회복됐다."

"그거와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원은 옆에 앉아 있는 은쌍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세히 설명해줘야 할 것 같았다.

"설파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을 사라지게 만든다. 산모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세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파제가 있으니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아, 산모가 죽지 않으면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다."

"뭐···. 그렇다."

원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지만, 은쌍식이 대충 알아먹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나저나 유럽에 비싸게 팔아먹어야 하는데 이거 참 곤란하군.'

흑사병으로 약 2,5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사라진 유럽은 지금 매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또 죽어가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해서 천연두로 원주민을 몰살시키고 얻어 온 것은 금덩이와 은덩이만이 아니었다.

무서운 전염병인 매독을 몸에 장착하고 왔다.

1473년 콜럼버스 원정대가 유럽으로 귀환한 이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부터 매독은 확산되었다.

전염병인 매독은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중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퍼지며 뿌리를 내렸다.

두 나라는 매독을 '프랑스 병' 또는 '나폴리 병'이라 부르며 상대를 비하했다.

매독은 무서운 전염병이다.

장기 내부를 훼손하고, 중추신경계, 눈, 심장, 대혈관, 간, 뼈, 관절까지 매독균이 침범하기에 치매 같은 정신이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이 아돌프 히틀러를 보고 '히틀러 자식, 매독으로 미쳐버린 게 틀림없어!'라며 자주 말했다고 한다.

처칠의 아버지도 매독에 걸려 미쳐 날뛰며 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 유럽에서 매독 치료는 수은 증기를 이용한 방법뿐이다.

그런데 수은은 알다시피 독이나 다름없다.

그에 비해 설파제는 획기적으로 매독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이다.

또한 흑사병이라 부르는 페스트에도 효과가 있다.

'떼돈 벌 기회인데 문제네···.'

비싸게 팔아도 사갈 것이 틀림없지만, 조선에서 싸게 판다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설파제 판매 수익으로 병원을 지으려고 했는데, 일단 병원부터 지어야겠구나.'

선후 관계가 바뀌었지만, 조선의 백성들에게 설파제를 비싸게 팔 수는 없다.

또한 항균제인 설파제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무분별하게 복용하다 보면 내성을 지닌 새로운 균도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원은 병원부터 지어서 진단 후 설파제 치료를 하기로 했다.

"쌍식아, 지금 짓고 있는 병원 말고 면 단위 이상 마을에도 병원을 짓도록 해라?"

"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10배나 많아집니다."

"작게 지으면 될 것 아니냐?"

"그렇더라도 병원에서 일한 의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젠장."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일한 사람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전문 분야에서 일할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특히 의학을 다루는 의원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혜민서만 하더라도 제조는 2인이었고 배우는 학생들은 3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를 늘렸지만,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의무 대원들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의무 대원?"

"네, 사장님. 의무 대원은 침놓는 방법은 모르지만, 응급처치나 살을 꿰매는 정도는 모두 잘 하지 않습니까?"

"맞다! 네 말이 맞아."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 중 의무병 역할을 하는 의무 대원은 소대마다 한 명씩 있다.

원은 이들에게 알고 있는 응급처치 방법을 모두 알려 주었다.

알코올로 소독하고, 붕대로 감고, 찢어진 피부를 명주실로 꿰매고, 부러진 뼈를 고정하는 정도는 의무 대원이라면 기본적으로 배운다.

또한.

'믿을 수 있지.'

아직 어려서인지 아니면 옹진반도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경비대원들은 돈보다 명예를 중시한다.

그들을 병원으로 보내 설파제를 이용한 세균 감염 치료를 하게 한다면 헐값에 외국으로 유출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당분간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

"그럴 일도 없지만, 일어난다고 해도 의무 대원이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병원과 의원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은쌍식은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똑똑했다.

"그래, 내가 용식이에게 말해 놓을 터이니 가장 실력 있는 의무 대원을 선발해서 병원이 지어지는 대로 보내라. 그리고 그들을 의사(醫師)라 부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궁궐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무서워하는 은쌍식이 화제를 돌리려 꺼낸 말로 원은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설파제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원이 준 서양 의학 서적을 공부하는 의무 대원들을 의사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의무 대원을 거친 사람만 의사가 될 수 있게 하는 게 좋겠어. 명의(名醫) 일수록 다양한 진료 경험이 많지.'

경비대에서 병사들을 상대로 다양한 진료 경험을 쌓는 의무 대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의무 대원 출신이라면 돈만 보고 과잉 진료를 하지 않을 거다.

물론 어디서나 말썽을 부리는 이는 있기 마련이지만, 강한 처벌과 보상을 충분히 한다면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쌍식아, 앞으로 의무 대원들을 더 많이 뽑아서 교육하고 실력이 좋은 순으로 의사로 임명하거라. 또한 의사가 되면 임금을 하루 10문씩 준다고 말하거라."

"네? 10문이요?"

"그렇다.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면 더욱 노력하지 않겠느냐?"

"그렇긴 하지만, 너무 많습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일인데 많이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원은 생각난 김에 이번 기회에 전 국민 의료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조선의 인구를 늘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과 의술이야. 먹을 것은 해결했으니 이젠 의술 차례지.'

더는 돈이 없어서 아파 죽는 백성이 없게 할 생각이다.

또한 의료 보험료도 받지 않을 거다.

'국가(國家)라는 게 참 웃기는 것이지.'

일정한 영토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라는 것이 사람들의 권력을 거두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다스린다.

그로 인해 안심하고 국민이 살 수 있다지만, 대부분 의무만 요구하고 권력은 얼마 안 되는 수뇌부 몇몇만이 휘두른다.

'내가 원하는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야.'

원은 말을 하기도 전부터 테크트리를 구상하면서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하는 나라는···.'

"사장님, 다 왔습니다."

"응?"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벙, 벙, 벙, 벙.

커다란 창고 안에서 규칙적인 빠른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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