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76화 (76/275)

< 76. 산토도밍고 요새(1) >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영 기업인 동인도 회사(VOC)는 다두 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네덜란드령 포르모사(Nederlands-Formosa)라 불렀다.

어쩌면 조선전력공사도 동인도 회사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게 많았다.

VOC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약탈하기 위해 세운 주식회사이지만, 조선전력공사는 원의 개인회사이고 약탈보다는 조선의 적을 무찌르고,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 백성을 잘살게 만들려는 이상적인 왕실 기업이었다.

아무튼 1624년부터 대만을 속국으로 삼았던 VOC는 1642년 대만에서 스페인을 몰아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VOC는 본거지를 옮겼다.

처음에는 대만 서남쪽 타이난에 자리를 잡았지만, 스페인과 전쟁에서 이긴 후 북부 타이베이로 이동한 거다.

타이난에 있는 질란디아 요새는 모래투성이 반도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 장소는 충분한 물을 얻을 수가 없었다.

또한 보급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국으로 삼은 다두 왕국을 관리하기에는 질란디아 요새가 더 좋았지만, 수시로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는 정성공이 이끄는 해적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질란디아 요새 바로 앞에 있는 팽호(澎湖) 섬은 해적들이 숨어 있기 좋은 장소였다.

이곳에서 수시로 공격해 오는 해적들을 피하고자 VOC는 스페인의 주둔지였던 북쪽 산토도밍고 요새로 자리를 옮겼다.

네덜란드령 포르모사를 지배하는 파울루스 트라우데니우스(Paulus Traudenius) 총독은 요새를 지키는 사령관을 불렀다.

요즘 들어 발생한 이상한 일들 때문에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총독님."

"어서 오게나 사령관."

둘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덕담을 나눈 후 최근 발생한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총독님, 아무래도 다두 왕국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러지 않아도 그런 정황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네.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싶네."

"쳐야겠습니다."

단호한 사령관의 말에 총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의 미개한 노예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탕과 고무를 얻는데 필요한 노예들을 죽이는 건 아까웠다.

"그래도 한 번쯤은 경고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카마찻 왕을 죽이고 다두 왕국을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음···."

침음을 내뱉은 총독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대만에 오기 전에도 다두 왕국은 반항이 심했다.

그래서 13개나 되는 마을을 파괴하고 속국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하던 다두 왕국이 요즘 들어 이상한 낌새가 속속 포착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알았네. 자네 뜻대로 함세. 왕이 사라지면 중심도 사라지니 더는 반란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좋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총독님."

총독의 허락을 받은 사령관은 준비를 끝내고 병사들을 배에 태웠다.

산토도밍고 요새에 있는 병사들은 2천 명이 넘었다.

그중 반이나 되는 천여 명의 병사들을 싣고 요새에서 출항했다.

4척의 갤리선은 항구를 빠져나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해류 때문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순풍이라 항해는 쾌적하게 진행되었다.

다두 왕국이 있는 타이중 앞바다에 도착한 4척의 대형 갤리선.

곧 있으면 벌어질 공격을 준비하느라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거대한 흑선이 타이중에서 나와 다가왔다.

"저건 뭐지?"

"혹시 조선전력공사의 함선 아니야?"

"맞는 것 같아. 조선전력공사의 함선은 돛도 없이 움직이는 크고 검은 배라고 했어."

"무슨 일이지?"

"왜 여기로 오는 거지?"

선원들이 떠드는 가운데 흑선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슈이잉!

소리와 함께 배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쿠아앙!

엄청난 폭음소리가 들리면서 나무로 만들어진 배는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다.

게다가 유폭(誘爆)까지 발생하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배도 있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흑선에서 쏟아지는 총탄은 대항이란 말이 소용없었다.

웬만한 포격에도 끄떡없는 대형 갤리선이지만, 총탄에 의해 두꺼운 나무가 파이며 비처럼 파편이 쏟아졌다.

가끔 들리는 대포 소리와 함께 갤리선 옆구리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아무런 반항 조차 하지 못하고 4척의 대형 갤리선은 흔적도 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약탈의 달콤함을 꿈꾸던 천여 명이나 되는 네덜란드 병사들은 타이중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조경2 호선에서 발사된 포탄과 기관총탄에 의해 너무나 빠르게 배들이 침몰해 버렸다.

아무리 포탄을 맞는다고 해도 나무로 된 배라 쉽게 가라앉지 않지만, 기관총 난사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리고 보름 후.

산토도밍고 요새 주변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무차별 사살되었다.

총소리를 듣고 놀란 VOC 병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저기서 나팔 소리가 들리며 병사들이 빠르게 요새의 중요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가운데도 요새 밖에 있는 네덜란드인들은 죽어갔다.

다급한 병사들의 외침에 트라우데니우스 총독은 소리쳐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총을 들고 쳐들어올 세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총독님 위험하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보름 전에 다두 왕국을 없애 버리라고 사령관과 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를 보냈다.

그런데 되려 공격을 받다니 총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설마?"

스페인 놈들이 다시 쳐들어온 건 아닌가.

의심하는 사이에 정황을 알아보려고 나갔던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의 표정만 봐도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스페인 놈들이더냐?"

"아닙니다. 총독님, 다두 왕국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놈들이 총을 어디서 났단 말이냐?"

"그건, 저도···."

"빨리 알아보고···. 아니다. 모두 죽여버려라."

감히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깝지만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네! 총독님."

힘차게 대답한 시종이 다시 나갔지만,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설마?"

커지는 총소리와 함께 총독의 머릿속은 온갖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한편.

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마찻 왕은 튀어 나가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고함을 쳤다.

"멈춰라! 기다려라! 뒤로 물러서라!"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수석총을 든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용맹하게 산토도밍고 요새로 향해 뛰어갔다.

"아···, 이걸 어찌하나!"

카마찻 왕은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몇 번이나 조선전력공사의 사신인 박문식이 경고를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지휘에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전사들에게 그 점을 꼭 인식시켜줘야 합니다.'

카마찻 왕 또한 대륙의 손자병법서를 탐독한 적이 있기에 박문식이 말하는 뜻을 잘 알았다.

왕은 전사들의 훈련 장소에 수시로 방문하여 경고 했다.

하지만 사기가 꺾일까 봐 전사들에게 징벌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자신의 전사들은 너무나 용맹했다.

그동안 당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물불 가리지 않고 총을 들고 거침없이 뛰어갔다.

하지만 요새로 접근할수록 사태는 심각해져 갔다.

아무리 VOC 병사들보다 좋은 수석총을 가지고 있다지만, 요새에 의지하여 대포를 쏘아대는 적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앞으로의 전쟁은 용맹하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박문식이 한 말은 그저 조선전력공사에 대항하지 말라는 말로만 알아들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았기에 대항할 마음은 좁쌀만큼도 없었기에 듣고도 그냥 넘겼다.

인제 와서 후회되지만, 모든 건 자신의 오판이라 생각되었다.

카마찻 왕은 고개를 돌려 박문식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소? 후퇴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으오."

"저도···, 대안이 없습니다."

"좀 더 강하게 나에게 말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소."

"저는 대왕의 조언자일 뿐입니다. 모든 결정은 대왕께서 하셔야 합니다."

"크흠···."

카마찻 왕은 박문식과 이번 작전을 계획했다.

박문식은 좀 더 기다린 후에 산토도밍고 요새를 공격하자고 했지만, 다두 왕국 전사들은 반대했다.

갑자기 힘이 생겨서인지 모두 자신만만했다.

게다가 타이중을 공격하러 온 VOC의 대형 갤리선 4척을 보고 흥분한 상태였다.

만약 조선전력공사의 전함이 없었다면, 타이중에서 엄청난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비록 조선전력공사가 제공해준 수석총이 있지만, 바다에서 공격하는 대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또다시 공격을 받기보다는 바로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는 산토도밍고 요새를 치자고 전사들이 요구했다.

카마찻 왕도 흥분 상태였다.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로 무서웠던 네덜란드를 단 한 척뿐인 조선전력공사의 함선이 순식간에 무찔렀다.

뒤가 든든하다고 생각한 카마찻 왕은 전사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왕께서 다시 한번 재고 하심이 어떨지요.'

박문식의 말에도 대왕은 그저 웃었다.

자신이 있었던 거다.

가난하고 조그마한 나라인 다두 왕국이라 갤리선같이 대포를 잔뜩 실은 대형 함선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육지에서라면 밀릴 일이 없다고 봤다.

더구나 4척이나 되는 대형 갤리선과 함께 네덜란드의 병사들이 수몰되었다.

'지금 산토도밍고 요새에 적의 병력은 별로 없을 것이오. 그러니 공격하여 점령하기에 쉬울 것 같소.'

'아닙니다. 대왕. 갤리선에 병사들을 다 싣고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슨 말이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적은 스페인입니다. 다두 왕국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크흠···.'

카마찻 왕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박문식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자신의 네덜란드 총독이라도 칼과 창을 들고 싸우는 다두 왕국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터이다.

칼이나 창조차도 별로 좋지 않은 소국을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하지만 묘한 감정이 꿈틀거리며 치솟았다.

'이번 기회에 나도 정성공같이 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능을 자극했다.

'도와주시오. 내 그대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대왕!'

'이번 한 번만 도움을 주시면 영원히 조선을 섬기겠소.'

'대왕···.'

'그대는 조선전력공사의 주인이자 조선의 태자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임을 알고 있소. 제발 부탁이오.'

'섣달만 기다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오."

카마찻 왕은 자신의 잘 못을 시인하고 박문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라면 지금이라도 전세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소. 염치없지만 부탁드리오."

"알겠습니다. 대왕."

박문식은 대왕의 간절한 표정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산토도밍고 요새는 무너트려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조선전력공사의 기지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태자께서 명령하신 내용이기에 더 늦기 전에 다두 왕국의 전사들을 도와야 했다.

'일이 참으로 곤란하게 됐군.'

박문식의 만류에도 카마찻 왕은 공격을 감행했다.

어쩔 수 없이 동참하게 된 박문식은 조경2 호선 함장인 을수와 상의해서 작전을 짰다.

카마찻 왕에게 함포 사격으로 요새를 부숴 놓을 테니 이후에 공격에 임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총이라는 무기를 가진 다두 왕국의 전사들이 흥분했는지 후퇴하라는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조선전력공사 해경 대원들은 총을 쏘는 법만 가르쳐줬다.

제식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다두 왕국이 따른다지만,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석총으로 무장한 다두 왕국의 전사들은 겁도 없이 요새를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무참히 쓰러져 갔다.

"제발 부탁합니다. 그대의 힘으로 나의 전사들을 살려주시오."

카마찻 왕은 생각 중이던 박문식을 재촉했다.

이 순간에도 요새에 의지해서 총격과 포격하는 네덜란드 병사들에 의해 다두 왕국의 전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기다려 보십시오."

지켜보던 박문식은 자신을 호위하는 경비대원을 보며 말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