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65화 (65/275)

< 65. 북해도 >

효종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가뭄이 들어 고민이 많았는데 식량이 충분하다는 말을 들으니 그동안 쌓였던 긴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를 본 원이 넌지시 요구 사항을 꺼냈다.

"아버지, 소자. 간청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뭐든 말해 보거라."

걱정이 없어진 효종은 무척이나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효종이 생각한 군주의 덕목은 한비자(韓非子)가 말한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한 첫 번째 덕목은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외세의 침략에 백성들이 고통받지만 않으면 된다'였다.

원의 도움으로 이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기쁠 수밖에 없었고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이번에 청나라와 싸우면서 전사한 대원들이 있습니다. 비록 조선군에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조선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니 나라에서 제공하는 묘지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싶습니다."

효종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들 또한 조선의 백성이고 조선을 위해 싸웠다. 당연히 나라에서 돌봐 줘야겠지만, 네가 알아서 할 거로 생각하고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네 뜻대로 하거라."

"고맙습니다. 아버지."

"내가 더 고맙구나."

원은 21세기 서울 동작동에 있는 현충원 산을 쓰겠다고 말했다.

"그곳이 좋은 자리라고 하더냐?"

"네, 아버지. 명당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도 모르고 믿지도 않았지만, 그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말했다.

"음···, 말해 놓을 터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와 있을 때는 예를 차릴 필요 없다."

"네,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릴 때 형인 소현세자를 따라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효종이기에 궁중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그런데 아버지. 그곳 이름을 현충원(顯忠院)이라 짓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현판을 써주신다면 백성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원은 단순히 글씨를 잘 쓴다고 알고 있었지만, 효종은 명필이었다.

효종이 심양에서 볼모로 있을 때 고달팠던 내용을 적은 작품은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타향에서 병들어 고생하거나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개인적인 심정이 담겨 있는 효종대왕오언시(孝宗大王 五言詩).

석봉체(石峯體)와 송설체(松雪體)를 적당히 구사한 날렵한 필력으로 유명한 효종어필첩(孝宗御筆帖) 등 수많은 작품은 사료적 가치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에 반에 원의 글씨는 '개발새발'이었다.

'알아먹기만 하면 되지.'

원은 책은 많이 읽었지만, 서예는 배우지 못했다.

조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옹진반도에 처박혀 있었기에 붓을 잡을 일도 배울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붓글씨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무튼 청나라와 전쟁에서 전사한 대원들을 현충원에 안치(安置)할 수 있게 되었다.

* * *

본격적인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천기가 요동쳤다.

그동안 가뭄이었는데 9월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다.

다행히 저수지와 수로를 정비해 놓았기에 수해를 입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강 다리 또한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홍수로 인해 일거리를 덜었다.

교각을 만들기 위해 막아 놓은 나무 울타리와 쌓아 놓은 흙더미가 엄청난 물살에 모두 쓸려가 버렸다.

남은 콘크리트 교각은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사장님."

"그러게, 말이다. 병사들에게 상을 내려야겠다."

곳곳에 홍수가 났다는 말을 듣고 원은 걱정이 되어 용산까지 왔다.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만 명이 넘는 훈련도감 병사들과 상륙정으로 쓸 나무 철선들을 이용해 작업했기에 교각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흙을 쌓은 후, 가운데를 파서 H빔과 철근을 수동식 기중기로 땅속 깊이 박아 넣었다.

콘크리트를 붓고 굳히고, 붓고 굳히고 반복해서 높이 쌓아 올렸다.

가뭄이라 공사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홍수로 교각 주변의 흙이 모두 쓸려 내려가 버렸다.

아직 교각이 원하는 높이까지 완성되지 않는 구간도 있었기에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흙을 쌓기도 그랬다.

부실이 없었는지 100m 간격으로 놓인 교각들이 잘 버티고 있었다.

"올해 안에 인도 한쪽만이라도 상판을 올릴 수 있겠지?"

"가능할 겁니다. 어제 알아봤는데 강철빔과 판은 모두 준비되었다고 했습니다."

"다행이구나."

원은 아버지 효종이 원했던 대로 될 수 있으면 올해 안에 경강 다리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다리 상판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21세기처럼 엄청난 무게를 견디는 철근 콘크리트 상반을 만들 수는 없었다.

대신 H빔 형태의 강철빔을 리벳으로 붙이고 강철판을 올리는 방법으로 설계했다.

현수교처럼 강철케이블로 상반을 고정하려고 시도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교각 사이를 강철케이블로 연결하고 그 위에 강철판을 올리고 작업하기로 했다.

먼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폭 2m 넓이의 철교를 올해 안에 완성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마차가 왕복 가능한 폭 7m짜리 철교를 만들기로 했다.

기차가 왕복으로 다닐 수 있는 복선 철도를 만들고 싶었지만, 일단 단선 철도만 계획했다.

추후 올리다 만 반대쪽에 교각을 붙여 철도, 도로, 인도 순으로 추가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교각의 밑기둥은 무척이나 넓었다.

"비계(飛階, Scaffolding)를 튼튼히 하면 교각 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판 공사는 위험하니 각별히 신경 쓰라고 꼭 전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명심하고 꼭 전달하겠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된 은쌍식은 원보다 더 안전에 신경을 썼다.

성도 있는데 이름을 멋지게 지으라고 했지만, 은쌍식과 은진이는 원이 만든 이름표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4월 10일에 태어났다고 '복민'이라 이름 지어진 은쌍식의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쌍식아?"

"네, 사장님."

"너는 이 길로 은동리로 돌아가거라. 난 폐하를 뵙고 갈 터이니."

"알겠습니다. 사장님."

전에는 옆에 붙어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던 은쌍식이었지만, 하루라도 아들을 못 보면 병이 나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좋으냐?"

"네?"

"아니다. 어서 가보거라."

"네, 사장님."

은쌍식을 돌려보낸 원은 그 길로 효종을 찾아갔다.

연일 비가 내리자 효종은 근심이 되는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이 오는 기척을 듣고 뒤로 돌아선 효종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방울도 내리지 않던 비가 이리 많이 오다니···. 어쩐 일이냐? 너도 걱정돼서 온 거냐?"

"네, 아버지. 경강에 짓고 있는 다리가 어찌 되었는지 보러 왔습니다."

"어떻더냐?"

"튼튼하게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어찌 되었는지 맘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은 어떠한지 아는 게 있느냐?"

"별다른 보고는 없었습니다. 곳곳에 저수지를 쌓고 수로를 보강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구나. 앉아라."

"네, 아버지."

원은 아버지 효종과 나란히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차를 마셨다.

효종은 대마도를 통해 수입한 커피를 마셨고, 원은 대륙에서 수입한 보이차를 마셨다.

그동안 쌀 말고는 대륙과 무역을 하지 않았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관계도 문제였다.

그런데 산해관 협정으로 대륙과 관계가 개선되자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대륙의 관문인 산해관과 산동반도에서 상시 무역 장이 개설되었다.

그러자 조선전력공사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이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또한 대륙에서 생산되는 화려한 비단과 술, 차 등이 수입되었다.

하지만 무역 불균형은 더욱 심해져 갔다.

열도에서 들어오는 은덩이도 모자라 대륙의 금덩이와 은덩이까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귀금속은 조선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인지 원은 그동안 참고 있었던 내면의 분노가 치솟았다.

'이제 묵혀두었던 과거를 해결해도 될 것 같은데···.'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이 이상한지 효종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숨 쉬는 것만 보고도 아들이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있기에 효종이 다정하게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원은 효종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왜를 정복해야겠습니다."

"흐음···."

찻잔을 들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효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가능하겠느냐?"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해 보거라."

"고맙습니다. 아버지."

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을 올렸다.

효종을 설득하기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경강 다리 놓는 일로 훈련도감 병사들을 엮으려 했던 일이 있었지만, 만류했기에 계략 쓰는 것을 싫어하실 줄만 알았다.

또한 전쟁이란 조선의 백성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허락해 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믿어주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이 나라 조선에 해가 되는 것들을 치우는 일은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원은 엎드린 상태로 머리를 조아렸다.

장수나 다름없는 몸을 가졌지만, 학문에 조예가 깊어 모략을 싫어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버지 효종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뿐이었던 거다.

'이런 분이 선비들 비유를 맞추며 살았으니 오래 사시지 못했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던 효종의 삶.

일부는 북벌 주장이 정치적이라 했지만, 원이 보기에는 진심이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

* * *

옹진반도로 돌아온 원은 조서원의 요원들을 긴급 소집했다.

집무실에는 조서원의 원장인 은진이도 있었다.

"모두 모였으니 말하겠다."

"""네, 사장님."""

"작전명 '열도정복'을 추진할 터이니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짜도록 하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돈을 써서 포섭해도 좋다."

열도라는 말을 모르는지 요원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열도란 조선의 동쪽에 있는 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바로 왜가 사는 곳을 뜻한다."

"""아···."""

원은 요원들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면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무력으로 단숨에 정복할 수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반항을 경험할 수도 있기에 내부 분란부터 조성하기로 했다.

분란 조성의 계책은 은진이에게서 나온 거였다.

배우지 않아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은진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조서원에 복귀하자마자 은진이는 그동안 있었던 일부터 파악해 나갔다.

원으로부터 일본을 정복하자는 말을 듣자.

'사장님. 10여 년 전에 일본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응? 그런 일이 있었어?'

'네, 사장님.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하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일본이 쇄국했구나.'

'네, 사장님. 요원들이 작성해 놓은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포르투갈과 국교를 단절하고 기리시탄을 탄압했지만, 그때 살아남은 기리시탄이 아직도 숨어 있다고 합니다.'

'네 말은 그들을 이용하자는 말이더냐?'

'네, 사장님.'

원은 망설였다.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거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느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은진이는 말 대신 양손을 들어 올려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수뇌부를 모두 죽여버리자는 말이더냐?'

입을 꾹 다문 은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원은 정보수집부터 나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이후로 일본은 세 번째이자 최후의 막부인 에도 시대로 들어섰다.

더는 대적할 상대가 없었기에 에도 막부는 252년 동안 지속됐다.

어차피 일본을 정복하려면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원은 은진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급할 필요는 없으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 한다. 우리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무력으로 일본을 점령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만주부터 개발해야 해.'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일대도 빠르게 변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정복한다고 해도 혼란만 가증될 뿐이다.

'먼저 흔들어 놓고 적당한 시점에 들어가면 돼. 명분은 차고 넘치니.'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치는 것은 간단하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선조 31년(1598)에 다시 일어난 정유재란만 따져 물으면 된다.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해.'

조선전력공사의 대원들은 당한 것이 있기에 청나라를 멸하자고 했지만, 원은 일본이 더 싫었다.

그래서 북해도(北海道)라 명명한 홋카이도에 1개 대대 병력을 보냈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먼저 선점해 놓아야지.'

원은 그곳을 점령하고 소부터 키울 생각이었다.

공식이가 살던 21세기에서 '시라오이 소'라 불리는 흑우(와규)는 기름기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별로라고 생각한 원은 한우인 조선 소를 데려다가 키울 생각이었다.

'비싼 한우를 원 없이 먹게 해주지.'

어차피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아이누인들이다.

그들에게 소를 키우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북해도 남쪽 해안에 거대한 흑선이 나타났다.

이곳을 지배하던 마쓰마에 번은 난리가 났다.

마쓰마에 번은 쌀도 재배할 수 없는 홋카이도 지배권을 막부로부터 공인받았다.

독점 무역권을 가진 마쓰마에 번의 생계 수단은 오직 열도 본섬과의 무역뿐이었다.

그래서 원주민인 아이누를 착취하며 살고 있었다.

전대 번주인 마쓰마에 우지하로가 죽고 이제 8살밖에 안 된 마쓰마에 다카히로가 번주가 되었다.

그래서 대신 통치하던 가키자키 도모히로와 가키자키 도시히로가 작은 어선을 타고 마중 나왔다.

흑선에 오른 두 사람.

겁이 나는지 몸을 움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양이(壤夷)만큼 덩치가 큰 이들 중에서 누군가 유창한 일본말을 하며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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