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삼분지계(2) - 지도 >
효종은 꿈은 단순했다.
봉림대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그의 꿈은 청을 멸하는 거였다.
하지만 원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군주다. 내 욕망보다는 조선의 이익과 앞날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원의 말이 맞아 보였다.
당장 청을 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후 발생할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아직 조선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생각을 마친 효종은 원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삼분은 '초한쟁패기' 때 한신의 모사 괴철이 말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더냐?"
"네, 아버지. 하지만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괴철이 말한 삼분지계는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로 만들면 삼국이 안정적으로 형세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자가 생각하는 삼분지계는 삼국이 서로 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크흠."
효종에게 원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아들이었다.
신기한 문물을 만들어 내는 재주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원에게 군권을 넘긴 거였다.
어릴 때부터 지기로 대하며 의견을 나누었기에 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인 원의 꿈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조선의 왕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갈수록 모략(謀略)이 심해졌다.
물론 조선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입장은 달랐다.
아직 10살뿐이 안 된 어린 아들이다.
그런데 책략(策略)을 쓰는 데 있어 거침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허나, 조선을 위한다면 아들이 한 말이 맞았다.
"준비는 끝내 놓았느냐?"
"네, 아버지."
효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아들의 행동을 보면 뭐든 계획 없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는데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생각하는 삼분지계를 자세히 말해 보거라."
"네, 아버지."
원은 삼국지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청을 위(魏)나라로, 남명을 오(吳)나라로 그리고 대명을 촉(蜀)나라처럼 만들어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한 최선입니다."
"그들이 서로 합심하면 어찌하겠느냐?"
"욕심이 많은 자들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알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은 사람의 욕심은 신도 어찌할 수 없다고 봤다.
욕심 많은 인간들이 벌인 어처구니없는 일은 한도 끝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현실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개연성은 더욱 없지.'
21세기에 살면서 수많은 소설과 영화를 봤지만, 뉴스보다 더 신박한 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확신을 두고 말했다.
깊은 생각에 빠진 효종은 후원을 한 바퀴 돌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리 아들을 믿는다지만 조선의 군주로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 조선의 이익이다. 나는 군주로서 조선의 이익을 따져봐야 한다.'
생각을 마친 효종이 원을 보고 물었다.
"그들이 서로 갈라져 싸운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세상은 너무나 넓습니다. 그 넓은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강한 힘을 가진 나라도 많습니다. 대륙에서 삼국이 서로 견제하며 싸우는 동안 우린 발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 어떤 세력에게도 굴하지 않고 조선이 당당해질 수 있다고 소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어···!"
효종은 허탈하니 웃고 말았다.
자신은 오직 청을 멸하는 것과 조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생각은 그 이상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서양 세력까지 생각하다니 참으로 대단했다.
"그럼, 이대로 협상해도 좋겠느냐?"
"이대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조선이 승전국인데 뭐라도 받아 내야 합니다."
"청나라에서 뭘 더 받아 낼 수 있단 말이냐? 사신이 가지고 온 금은보화만 하더라도 엄청난 양이다."
"땅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땅?"
"네, 땅이 필요합니다."
이미 조선의 영토인 한반도보다 몇 배나 거대한 만주를 차지했다.
그런데 또 무슨 땅을 말하는 건지 효종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를 말하는 거냐?"
"산동반도(山東半島)입니다. 그곳은 조선과 가깝기도 하지만 드넓은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산동반도만 확보한다면 우리 조선 백성들 모두가 먹고 남을 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말이냐?"
원의 말에 효종은 깜짝 놀랐다.
대륙이 넓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륙에서 동쪽으로 튀어나온 땅에서만 생산하는 쌀만으로도 조선 백성 전체가 먹고도 남는다니.
믿을 수 없는 말을 듣자 정신이 확 들었다.
효종은 입이 마른 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원은 씩 웃었다.
"네, 아버지. 청나라 사신에게 협상 조건으로 그곳을 우리에게 넘기고 물러가라 해야 합니다."
"물러가라 한다고 물러가겠느냐?"
"안 되면 되게 하면 됩니다."
"자신 있나 보구나?"
"네, 아버지. 소자 자신 있습니다."
"알았다. 당장 그렇게 하마."
효종은 쌀에 진심인 한민족의 왕이다.
그래서인지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마음이 급했던 거다.
"아버지!"
원의 외침에 효종이 뒤를 돌아보았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한 이 삼 일 기다렸다가 넌지시 제시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효종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서둘렀다는 것을 깨달자 계면쩍었다.
"알았다. 그리하도록 하마. 고맙구나. 원아."
"아닙니다. 아버지. 소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효종과 함께 저녁까지 먹고 난 원은 다음날 예조판서 조경(趙絅)을 만났다.
대표적인 척화론(斥和論)자였기에 효종과 뜻이 잘 맞아 이번에 예조판서가 된 이였다.
"태자 전하께서 어인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논의할 일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청나라 사신과 관련된 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원은 전날 효종과 나눴던 내용을 간략히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대감만 믿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자 전하. 이 나라 조선을 위한 일인데 제가 나서서 꼭 해내겠습니다."
"그럼 대감만 믿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제든지 이런 일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나라의 영토가 늘어나는 일인데 어찌 수고를 마다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대감."
조정에서 당쟁이나 일삼던 x선비들이 사라지고 참 선비들만 남았다.
그중에서도 조경은 특이했다.
죽을 때까지 청과 화해할 수 없다며 일본과 합심해 청을 치자는 주장까지 했다.
그 일로 곤욕을 치렀지만, 끝내 굽히지 않는 청백리였다.
물론 그 일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조선의 신하로서 소신만큼은 확실한 이었다.
원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청을 치자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 * *
원이 떠난 이틀 후.
창덕궁 대전에 대신들은 물론 중신들까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청나라 사신이 효종을 알현했다.
사신은 효종 앞에 엎드려 공손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조선의 폐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들라."
전과 다른 효종의 목소리에 사신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리 오라 부른 이유가 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이청득심(以聽得心) 하겠습니다."
"너의 간절한 정성에 탄복하여 청과 화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폐하!"
청나라 사신은 그대로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던 화해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동안 숙소에 머물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자신 같아도 힘이 있는데 화해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들어 줄 수는 없는 일. 자세한 건 예조판서와 상의 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청나라 사신은 무슨 조건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강력한 조선이 쳐들어오는 것만 막아도 할 일은 다 했다고 봤다.
조선의 무력이면 명나라가 망하듯 청나라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건주여진 출신인 사신은 여진족과 청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순치제와 지르가랑은 그런 그의 성품을 알고 특명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옥새를 받아오고 조선과 화해하라 명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대전에서 물러난 청나라 사신은 예조판서 조경과 따로 만났다.
잠시 환담을 나눈 후, 조경은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조경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이곳을 조선에 양도해 주시오."
"네?!"
사신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산동성을 넘기라고 하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산동성 전체가 아니라 산동반도만 조선에 넘기라는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어디까지···?"
사신을 한번 쓸 보고 난 예조판서 조경은 지도를 짚으며 설명했다.
"이곳 청주성(青州成)을 경계로 북으로는 황하(黃河)까지, 남으로는 일조(日照)까지 원합니다."
"크흠···."
청나라 사신은 침음을 내뱉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체 면적은 산동성의 1/3 정도였지만, 곡창지대로만 따지면 반이나 되었다.
"우리 조선은 전쟁 보상금으로 이곳을 원합니다. 따라서 화해 협정을 체결하고 싶다면 이곳을 조선에 양도하고 철수하길 바랍니다. 또한 노예로 끌고 간 조선의 백성들도 모두 이곳으로 돌려보내 주시오."
대답 없이 묵묵히 눈을 감고 있는 청나라 사신.
할 말을 꺼내 놓고 기다리는 예조판서 조경.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숨을 길게 들어 마신 청나라 사신은 북경을 떠나오기 전 일을 떠올렸다.
산해관이 조선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도르곤까지 생포되었다는 말이 북경에 퍼지자 난리가 났다.
혼란 속에 휩싸인 북경.
곧 조선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짐을 싸서 성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약탈과 방화까지 일어났다.
이제 12살밖에 안 된 청나라 제3대 황제 순치제는 즉시 지르가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누르하치의 손자인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은 그동안 양자강 전선에 있었다.
지르가랑은 숙친왕(肅親王) 호오거를 따르다가 도르곤에 의해 친왕에서 군왕으로 격하된 후 남명과 싸우는 전선으로 쫓겨난 거였다.
북경으로 돌아온 지르가랑은 즉시 황제의 직속 팔기인 양황기(鑲黃旗)와 정황기(正黃旗)를 지휘해 혼란을 잠재웠다.
또한 도르곤의 수하들을 찾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놓치고 말았다.
지르가랑이 발 빠르게 움직였지만, 도르곤의 형인 영친왕 아지거의 행동은 더 빨랐다.
홍타이지의 장남이었던 호오거가 도르곤에 의해 죽은 후 양백기(鑲白旗)는 도르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도르곤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양백기의 버일러들과 아지거가 압력을 행사하며 도르곤을 살리고자 했다.
그런데 지르가랑이 돌아오자 아지거는 재빠르게 양백기의 주둔지로 숨어버렸다.
생각보다 어린 순치제는 영악했고, 도르곤이 없는 상태에서 지르가랑을 상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지거를 놓친 지르가랑은 화가 났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기에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직속 팔기인 양황기와 정황기로 양백기를 치고 아지거를 잡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자멸을 뜻했다.
청나라는 소수의 인원으로 대륙 북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팔기 중 2기가 전멸하고 양우리의 팔기는 소식조차 끊겼다.
간단히 계산해봐도 이번 전쟁으로 전력의 1/3이 날아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군이 쳐들어온다면 막아 낼 수나 있을까.
아니었다.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명과 대치하고 있는 한인팔기가 반란이라도 한다면 어찌해야 할지 답조차 없었다.
청나라 황제와 대신들은 겁을 먹었는지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선과 화해를 해야 한다. 이 일은 우리 여진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청나라 사신은 지르가랑이 했던 말을 상기하며 눈을 떴다.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예조판서 조경은 차마 기쁜 마음을 표출하지 못했다.
이리 쉽게 그 넓은 곡창지대를 얻을 수 있다니 크게 웃고 싶었지만, 강직한 성격상 표정을 굳히고 나지막한 말로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힘든 결정을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청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이리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거대한 대륙의 곡창지대 일부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것도 주인조차 없는 기름진 옥토를 말이다.
조선과 청나라의 화해 협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사신은 별말 없이 산동반도를 넘기기로 했다.
북경으로 돌아가서 확인을 받은 후 산해관에서 다시 만나서 옥새를 받고 협정서를 체결하기로 결정됐다.
청나라 사신이 협정서의 초안을 가지고 북경으로 떠나는 날.
조경 2호선에는 박문식이 승선해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대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