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삼분지계(1) - 지도 >
오늘도 원은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곳저곳 둘러본 원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싸장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은쌍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헉헉댔다.
승강기가 없으니 5층까지 뛰어오느라 힘들었나 보다.
원은 그러려니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수저를 계속 움직였다.
"사장님. 도르곤의 팔기가 투항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마저 먹고 이야기하자."
어차피 도르곤이 도망갈 길은 없어 보였다.
정예화된 기마병이라도 한겨울에 보급도 없이 수천 리나 되는 몽골까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며칠 전, 산해관에 있던 육경 사령관 정용식으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
오소리를 사로잡기 위해 머리를 짜낸 후 최종 결정을 확정하기 전에 부족한 점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작전 내용을 듣고 난 원은 어렵게 짜낸 계획을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럴 필요 없다. 놈들이 오는 주변 마을에 소문만 퍼트리면 알아서 다 해결될 거다.'
정용식이 듣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장님이라도 이번에는 실수하시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계속 들어오는 정찰 보고를 받자 이해되었다.
정용식은 지체하지 않고 원이 말한 대로 행동에 옮겼다.
일반 백성으로 변장한 대원들을 즉시 내보내 소문을 퍼트렸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챙겨 급히 산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역시 사장님의 위대한 전사가 틀림없었다.
대륙에서 말하는 제갈공명이 헌신한 건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맛있게 늦은 점심을 먹은 원은 소금으로 양치질까지 하고 난 후에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기쁘지 않으십니까? 도르곤까지 생포했다고 합니다."
"예상했던 일이다."
"정말이십니까?"
며칠 전만 해도 도르곤을 생포하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예상했던 일이라니.
은쌍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이 보급도 없이 진군하면서 약탈하고 다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죠."
"그럼 민심이 어떻겠느냐?"
"아···. 저 같아도 도망가겠네요."
"그런데 도망가면서 그냥 가겠느냐?"
은쌍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아니죠. 이 엄동설한에 먹을 것부터 챙겨가겠죠."
"그럼 놈들이 어찌하겠느냐? 뒤에선 추격해 오는데 너 같으면 싸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배고프면 장사도 힘을 못 쓴다. 그러니 너도 든든하게 잘 챙겨 먹도록 해라. 곧 있으면 아버지가 될 텐데."
"그거야 쌍···. 아니 은진이가 알아서 하겠죠."
원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 안된다. 너 아이이니 너도 돌봐야 한다. 그래야 커서도 너를 잘 따를 테니까."
"그렇습니까? 근데, 아직 장가도 안 가셨는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원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보고 듣고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다."
"아···. 보고 듣고 생각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날 이후 은쌍식은 사람들이 실수하면 원과 똑같이 행동했다.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보고 듣고 생각 좀 해라'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 * *
한양은 물론 전국 팔도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었어?"
"보고 왔지."
"어, 자네도 방문을 봤구먼."
"그랬으니 이리 찾아온 게 아닌가. 이 좋은 날 술이나 한잔하세."
"좋지!"
저잣거리의 주막은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서로 술을 따라주는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만반도가 그러니까 우리 조선의 영토인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거라는 뜻이야?"
"그렇다고 방문에 적혀 있었네. 이번에 태자께서 청나라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산해관 이북 만주까지 점령했다고 하지 않는가."
역시 술자리는 허풍이 있어야 제맛이었다.
어느새 청나라 침략군의 규모는 백만 명으로 확정되었다.
"대단하구먼. 대단해."
"자네도 보지 않았나?"
"뭘?"
"아따, 이 사람 좀 보게. 척하면 착 알아들어야지. 조선전력공사 분점에 가면 대원들 있지 않은가?"
"아, 난 또 뭐라고. 그런데."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하게 생겼지 않던가?"
"그렇지. 다들 장군감이지."
술자리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의 찬양으로 이어졌다.
한겨울에도 쌀 막걸리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변해 버린 조선이기에 백성들 또한 여유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던가.
이때만 되면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이다.
그런데 막걸리에 통닭까지 곁들여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원이 심양에서 돌아온 후 5년 만에 세상이 변해도 너무나 변했다.
"태자 전하께선 하늘이 내려주신 부처님이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래도 부처님은 아니지. 우리에게는 부처님이나 다름없지만, 청나라 놈들에겐 저승사자 아닌가?"
"들어보니 자네 말이 맞구먼. 그럼 뭐라 해야 하는가? 뭐 좋은 말 없는가?"
"그냥 태자 전하라 하면 되지, 뭘 또 붙이려고 하는가. 조선전력공사 직원들은 모두 사장님이라 부른다고 하네. 다른 표현은 일절 쓰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네."
"그래?"
걸쭉하게 막걸리를 마시고 통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든 백성이 뭔가 떠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거 뭣이냐? 사람을 높이 부르는 건 좋은데 절대 신격화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 했네."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던가? 난 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이번 전쟁을 앞두고 말씀하셨다고 하더군."
"그랬나?"
"나도 대원들이 하는 말을 들었네. 혹시라도 그런 자가 나타나면 일단 배에 칼을 찔러보고 그래도 죽지 않으면 총으로 쏴보고 그래도 죽지 않으면 신격화해도 된다고 하셨다네."
"참말인가?"
"전쟁을 앞둔 대원들이 청나라 놈들에게 기가 죽을지 몰라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
그래서였다.
조선전력공사 경비 대원들이 메뚜기 떼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팔기군이 무서웠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쏘고 보았던 이유가.
'총을 맞아도 죽지 않으면 그때 도망가도 충분하다'는 원의 말이 있었기에 두려움을 감추고 싸울 수 있었다.
전쟁에서 사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은 처음 전쟁에 나가는 대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일단 쏘고 보라고 했다.
그런데 와전돼서 백성들 사이에 퍼져 버렸다.
앞으로 조선에서는 사이비 교주가 되려면 일단 칼이나 총부터 맞게 생겼다.
* * *
만반도 작전이 끝나고 석 달 후.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조선의 위대하신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신은 알아서 삼배구고두례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대신들이 대전에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효종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전쟁은 결코 우리 청 제국 황제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건 감출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니 그따위 말을 하려거든 돌아가서 기다리도록 하라."
효종의 말에 사신은 깜짝 놀랐다.
뜻을 따지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린 사신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황제께서 화해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받아 주십시오."
"필요 없다. 다시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라."
"폐하, 토고납신(吐故納新)이라 하였습니다. 지난 일을 털어버리고 청 제국과 조선이 사이좋게 지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앞날을 생각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사죄드리오니 부디 받아 주시길 간절히 요청합니다."
효종은 콧방귀를 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였다. 너희 청나라가 우리 조선 백성들을 핍박한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화해를 한단 말이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폐하! 전쟁이란 백성들을 어려움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노여움을 푸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단상을 내려온 효종이 사신 앞에 바로 섰다.
"천세일시(千歲一時)인데 어찌 멈춘다는 말이더냐. 청나라가 기회를 잡아 명나라를 무너트리지 않았더냐? 그러니 나 또한 그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폐하!"
청나라 사신은 흐느껴 울며 효종을 바라보았지만, 효종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대신들 또한 차가운 얼굴로 청나라 사신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예처로운 청나라 사신의 간절한 목소리만 대전을 가득 채웠다.
* * *
급히 오라는 효종의 서신을 받은 원은 가는 동안 생각이 많았다.
며칠 전 산처럼 많은 물품을 실은 마차 행렬이 청나라 사신 일행과 함께 산해관을 찾아왔다는 급보를 받았다.
산해관을 찾은 청나라 사신은 조선을 방문하여 효종을 뵙고 싶다고 했다.
이번 전쟁을 사죄하고 협상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마침 만리장성 동쪽 끝인 노룡두(老龍頭) 항구가 완성되었다.
청나라 포로들을 동원해서 급히 만든 항구였지만, 조경 2호선이 정박하기에는 그런대로 쓸 만했다.
보급품과 교체 근무할 대원들이 내린 후, 그동안 산해관을 지켰던 대원들이 탔다.
그런데 조경 2호선이 출항하려던 순간,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원은 고심 끝에 사신 일행을 조경 2호선에 태우고 오라고 명 했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
'까불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지.'
청나라 사신 일행은 거대한 조선의 철선을 보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승선해 있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은 하나같이 젊고 용맹해 보였다.
군기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감탄과 부러움,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청나라 정예인 상삼기 또한 강했지만, 비교될 수 없었다.
아무튼 한양에 도착한 원은 내시 나업을 따라 효종을 찾아갔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이 그대로 방치된 가운데 광해군 때 복원된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 효종이 홀로 서 있었다.
"강녕(康寧)하신 모습을 보니 소자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인사는 됐고 어서 이리 오너라."
효종은 원을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청나라 사신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건 옥새(玉璽)를 돌려 달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화해 협정을 맺자는 말이네요."
"그렇다. 어찌 청나라의 옥새를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필요 없으니 돌려주는 건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청을 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산해관에 도착한 도르곤의 팔기군은 옥새까지 바치며 항복했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의 위용을 보고 기가 죽어 버린 거였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도르곤이 깨어났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다시 잠이 들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에 지배당한 버일러들은 서둘러 무기를 버리고 즉시 투항했다.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도르곤이 다시 깨어난다면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아직 청을 멸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냐?"
"점령한 만주 땅을 정리하려면 인력과 자원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조선에는 그만한 인적 자원이 아직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정리해야 합니다."
"단지 그것뿐이더냐?"
"그보다는 화북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을 통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봅니다."
"청나라도 했는데 우리가 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느냐?"
"네, 아버지."
원은 단호하게 대답한 후, 이어 말했다.
"우리 조선의 문화가 대륙의 문화보다 앞선 상태가 아니면 점령하고 통치하더라도 잡아 먹힐 수 있습니다."
"그래? 흐음···."
효종은 깊은 심음을 내뱉었다.
볼모 시절, 북경까지 가본 적이 있기에 원이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한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북경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원은 효종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소자 생각을 해봤습니다. 일단 만주를 확보하고 내정을 확실히 한 다음 적당히 일을 꾸면서 협정을 파기하고 청을 치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효종이 입을 열려 했지만, 원은 바로 말을 이었다.
"또는 대륙을 삼국 시대처럼 삼분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흐음···."
효종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삼분지계라···!"
봄기운이 퍼진 하늘은 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