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작전명 만반도(5) >
도르곤은 죽을 맛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처절한 패배가 비수가 되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무려 10만이나 되는 청나라 팔기군을 동원해 어둠을 틈타 공격에 들어갔다.
양쪽에서 신의주를 일시에 공격했으나 처참히 발렸다.
게다가 보급과 후방을 맡기로 한 양우리의 팔기군은 어찌 되었는지 소식조차 없었다.
기대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도르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은 하늘이 날 버리시는 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도르곤의 눈빛은 절망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달빛조차 어두운 밤에 기습하면 능히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하늘에 무언가가 떠오르더니 하얗게 빛을 발했다.
대낮처럼 변해버린 세상에서 도르곤이 예상했던 기습은 통하지 않았다.
막강한 적의 화력 무기는 무서울 정도로 청나라의 팔기군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지금까지 져본 적이 없었던 도르곤의 팔기군은 하얀 눈밭을 붉게 채색하며 쓰러져 갔다.
도르곤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퇴각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병사들은 돌격했고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언제나 직언하는 심복이나 다름없는 버일러가 탈주하자고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도망조차 어려울 뻔했다.
착잡한 심정에 주의를 둘러본 도르곤은 심복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전하···."
"몇 명이나 살아남았냐고 물었다."
"···다행히 우리 만주 팔기의 전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머지는?"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37,500명이 되는 정백기 구사 5기와 수석총으로 무장한 한인팔기와 조선팔기까지 대동하고 총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이곳까지 도망쳐 온 병사는 단 1기뿐이라니···.
울화가 치민 도르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사이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정람기는?"
"죄송합니다. 전하. 급히···, 후퇴하느라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크흠."
정람기까지 모두 당했다면, 9할이 넘는 팔기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힌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추운 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그래도 강한 병사들입니다. 틀림없이 살아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고 옥체를 보존하시길···."
"크헉!"
시뻘건 각혈을 뱉어낸 도르곤은 손으로 입을 훔쳤다.
놀란 버일러들이 다가왔지만, 도르곤은 손을 틀어막았다.
"괜찮다."
이전에 명나라와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도르곤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자주 각혈을 토해냈다.
그런데도 조선을 응징하고자 진격했는데···.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가자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 말린 이유가 있었구나.'
설마 했다.
조선의 화력이 이 정도로 막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양에서 일어난 보고를 받고도 믿지 않았다.
처참히 깨진 후에야 후회가 들었다.
도르곤은 친왕들과 대신들이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이 우리 만주족을 버리시는 건가?'
세상에 그런 신무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명나라와 싸울 때도, 조선을 칠 때도, 그까짓 대포와 조총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 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꽃과 연기를 내뿜는 수많은 화살이 날아와 터져 나갔다.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하던 몽골팔기 기마병들이 분해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떠올린 도르곤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최후 공격을 준비하던 자신의 팔기군이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몸이 아픈 도르곤은 마음마저 약해졌는지 무서웠다.
혹시 몰라 안시성을 피해 우회하여 도망쳤다.
도르곤은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엄습하자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힘든 길을 택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안시성에 대기하고 있던 기수의 기병대에 잡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도르곤이라 감이 대단했다.
"이대로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돌아간다."
"네, 전하. 하지만 산해관까지···."
"재수 없는 말은 꺼내지도 말 거라.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산해관은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해군이 강한 조선이다.
혹시나 배를 타고 산해관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도르곤은 머리를 흔들어 불안감을 떨쳐냈다.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분노조차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모두 출발 준비를 시켜라. 서둘러 가야 한다. 꽁무니를 잡히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네, 전하···."""
초췌한 모골을 한 버일러들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방에서 보내온 매(隼, Falcon)를 이용한 보고로는 조선도 기마병이 있다고 했다.
여진족만큼 말을 잘 탈 수는 없지만, 모를 일이다.
빨리 산해관을 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만주팔기는 푸들거리는 말들을 달래며 다시 출발했다.
도르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서둘러 말을 몰았다.
어머니가 순장 당하고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놓였던 어린 시절.
그 이후로 처음 느낀 두려움은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했다.
* * *
신의주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전력공사 제4 기병 연대는 해가 뜨기 전에 추적에 나섰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팔기군을 쫓아 수많은 청나라 병사들을 사살하고 안시성에 도착했다.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도르곤을 놓쳤습니다."
"괜찮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일단 쉬도록 해라. 도르곤을 추적하는 일은 제1 기병 연대가 맡을 것이다."
"넵! 사령관님."
기병대 사령관 기수는 직접 도르곤을 추적하고 싶었지만, 원으로부터 받은 특명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안시성 서쪽 평야 지대와 무순(抚顺)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반진 일대와 무순은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을 대제국으로 만들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기수 너는 그곳을 확보하고 주변에 위험 요소가 있다면 전부 제거하라.'
원은 심양을 치고 돌아온 경비대원으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들었다.
그건 바로 사르후 전투를 벌인 무순에서 대규모 노천 탄광을 보았다는 말이었다.
'아, 그 푸순이 무순이었구나.'
태어날 때부터 심양에 살았기에 여진말과 명나라말을 할 줄 알았지만, 연필과 조선 막지를 만드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대륙의 '석탄 수도'라 부르던 푸순이다.
그곳에는 무연탄도 많지만, '역청탄'도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
'쌍식이가 무연탄만 가지고 와서 생각조차 못 했네.'
무순에는 석탄뿐만 아니라 34종류나 되는 수많은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원은 긴급히 만반도 작전을 변경했다.
원래는 후퇴하는 도르곤을 잡고 요동만(遼東湾)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순에 역청탄이 널려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심양과 무순까지 완전히 정리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새로운 작전을 하달받은 기수는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산해관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도르곤을 놓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알 수 없으니 경험이 많고 추적에 뛰어난 제1 기병 연대를 내보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 거라. 보급이 차단된 놈들은 굶어 죽든지 얼어 죽을 것이다. 허니, 꼼꼼하게 살피고 추적하도록 해라."
"넵! 사령관님."
조선전력공사의 기병 연대는 비닐로 포장된 전투 식량을 가지고 있기에 보름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래도 삭풍이 몰아치는 한 겨울 북녘땅은 너무나 위험했기에 무리해서 추적하지 말라고 명 했다.
"우리도 내일 바로 출발하자. 가면서 무기를 든 놈은 무조건 사살하라. 알겠나?"
"""멸!"""
* * *
은동리 본사 5층.
원은 은쌍식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살피며 의논 중이었다.
"사장님, 그러니까 제가 전에 봤던 연기가 심하게 나서 쓸모없다고 생각한 석탄이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역청탄이란 말씀입니까?"
"맞다. 그것이 바로 목탄 대신 강철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코크스의 재료인 역청탄이다."
은쌍식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역청탄이 뭔지 알았다면 아까운 나무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건데 아쉽습니다."
"알았더라도 이곳까지 가지고 오기는 힘들다. 그러니 아쉬워하지 말아라."
그래도 아쉬운지 은쌍식은 입을 쩝쩝거렸다.
"그곳에는 역청탄뿐만 아니라 철과 구리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리니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그냥 그곳에 제철소를 지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일할 사람이 문제다."
은쌍식이 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심양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사장님.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가봐야 좋은 소리 듣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선전력공사에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귀환 작전이 끝난 후 원은 바빠서 귀환한 백성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잘 돌봐주라는 명만 내렸다.
"송림 제철소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농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사람도 있고요."
"그래?!"
뜻밖의 희소식에 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지 않아도 만주를 확보하면 누구를 보낼지 생각이 많았다.
그렇다고 강제로 북방사민책(北方徙民策)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강제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거야.'
21세기에 살면서 독재자가 어떻게 독재자로 변신하게 됐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강요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진말과 명나라말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10만 명 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전력공사 직원으로 받아 준다면 무순이 아니라 더 북쪽까지 가겠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잘 됐구나. 정말 잘됐어."
원과 은쌍식은 지도를 보며 다시 계획을 짰다.
"외성만 무너진 심양이니 복구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잘됐구나, 날이 풀리는 대로 요동만으로 가는 길과 심양까지 가는 길부터 포장 공사를 진행 하도록 해라. 귀환자 중 원하는 사람은 직원으로 받아 주고 바로 교육을 시작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산해관에서 보내온 포로들을 즉시 투입하겠습니다."
"하는 김에 철도 놓을 자리도 알아보고."
"네, 사장님."
아직 디젤 엔진 개발이 끝나지 않았지만, 한양과 신의주로 철도를 놓으면서 객차와 화물차를 만들고 있다.
중요한 기차 바퀴는 수도 없이 만들어 보며 개선해 나가고 있다.
기본적인 모양새는 알지만, 직접 만들어 테스트 해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기차 바퀴는 수십 톤이나 되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
선로와 맞닿았을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을 파악하고 개선해 나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차 바퀴를 실험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최종 결과가 원하는 대로만 나오면 기차 바퀴를 생산해 객차와 화물차에 붙이면 된다.
기관차도 준비해 놓았다.
여차하면 증기 터빈을 쓰려고 했지만, 아직 기술이 딸려 문제가 많았다.
일정한 속도로 항해하는 배는 크게 상관없지만, 빈번히 가감 속해야 하는 기차의 경우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출발할 때 반응이 느린 증기 터빈은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방법조차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효율이 개떡 같은 증기 기관을 인제 와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법이 있긴 있지.'
증기 터빈으로 발전하고 모터를 달아서 구동하는 방법이 있었다.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에게 알려줬더니 합심해서 열심히 개발 중이다.
'전기식 증기 터빈'의 이론은 간단하지만, 생각 외로 불안전해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디젤 엔진이 완성되든지, 전기식 증기 터빈이 완성되든지 뭐든 빠르게 완성되는 것부터 쓰면 될 일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더는 목탄으로 강철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무순에 널려 있는 석탄과 역청탄은 21세기에도 채광하고 있을 정도로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게다가 그곳에 철과 구리는 물론 다양한 자원 또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매장되어 있다.
'이제 서서히 석유 개발을 해야겠군.'
무순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진 대경(大慶)에 엄청난 양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기술로선 시추할 방법이 없다.
'지하 1,500m까지 파고 들어갈 시추기를 개발하는 일은 쉽지 않아.'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기름띠가 흐르는 강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왜 이제야 생각났지?'
그것도 대륙에서 3번째로 큰 유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