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작전명 만반도(4) >
한반도 북쪽과 서쪽.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원은 오늘도 바쁘게 움직였다.
원은 은쌍식과 함께 창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네모반듯한 건물을 바라보며 입김을 품어 냈다.
"건물이 완공되었으니 이제 설비를 해야 할 건데 언제쯤이면 끝난다고 하더냐?"
"늦어도 올해 안에는 실험까지 끝낼 수 있다고 합니다."
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를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반도체 공장 외관이야 후딱 지었지만, 내부 설비 공사와 실험가동을 하는 일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1월이니 1년 가까이 더 기다려야 하겠구나."
"네, 사장님. 생각보다 복잡한가 봅니다. 생화학 연구소도 이 정도 아니었는데."
"작은 걸 만드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렇습니까?"
은쌍식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만 정식 가동되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자."
"정말입니까? 사장님."
라디오가 뭔지 알고 있는 은쌍식은 황소처럼 커다랗게 눈을 뜨며 원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날마다 선식이의 만담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한 거였다.
"일단 트랜지스터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수시로 반도체 공장에 들러 상황을 점검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재 트랜지스터를 만든 것과 21세기 반도체 만드는 공정은 얼핏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정밀도였다.
21세기에 반도체를 만드는 공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밀도가 필요하다.
'8대 공정'으로 나뉘어 생산되는 반도체는 제일 먼저 웨이퍼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만드는 웨이퍼와는 차원이 다르지.'
현재 엉망인 수율로 생산되는 트랜지스터 하나에 들어가는 웨이퍼 조각이면 CPU도 만들 수 있으니 그 차이는 수십억 배다.
다시 말하면 현재 옹진반도에서 생산되는 웨이퍼의 정밀도는 21세기에 비해 수십억 배 낮다는 뜻이다.
물론 그 정도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산화공정'과 세 번째인 '포토공정'까지 생각하면 더 차이가 날수도 있다.
포토공정은 말 그대로 필름을 사용한다.
나노 단위 극 초정밀 밀도로 만들어진 필름에 셀 수 없이 많은 트랜지스터로 구성된 회로를 그려 넣고, 네 번째 공정인 '식각공정'으로 웨이퍼 표면을 부식시킨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말 많던 불산(HF, Hydrogen Fluoride)이다.
'파이브 나인'이라 불리는 순도 99.999%의 불산이 있어야만 정밀하게 부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지스터 하나 만드는 데는 필요 없지.'
지금 만드는 트랜지스터는 정밀한 동판화를 만들 듯 부식할 수 있으면 된다.
21세기에 생산되는 반도체와는 완전히 급이 다르기에 비교하면 안 된다.
21세기에 만드는 반도체는 쉽게 말하자면.
서울시만큼 큰 동판화를 손톱만큼 작게 만든다고 보면 된다.
어쩌면 서울시보다 더 넓을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공정은 이런 작업을 층층이 쌓는 '박막 증착 공정'이다.
아파트를 짓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래 만들어 놓은 회로 위로 또 다른 회로를 쌓기 위해 절연막을 덮어 주는데 굉장히 얇아서 '박막'이라고 한다.
박막은 마이크로에서 나노 단위로 부를 정도로 얇다.
이제 회로가 그려진 웨이퍼 표면에 전기가 통하게 여섯 번째 '금속 배선 공정'을 끝내면 반도체는 다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된다.
처음에는 구리나 금을 사용했지만, 21세기에는 저항이 낮고 산화막(SiO2)과 접착성이 우수한 알루미늄을 많이 사용한다.
반도체를 다 만들었으면 일곱 번째 공정인 '전기적 테스트 공정(EDS)'를 하고, 마지막 공정인 '패키지 공정'에서 완성된 웨이퍼를 자르고 포장하면 끝난다.
작년에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 연구원들에게 강연했던 내용을 상기하고 난 원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옹진반도 바닷가 산업 단지에 지어진 실내 농구장.
그곳에 수많은 공돌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상에 원이 올라오자 공돌이들은 모두 일어나 고개를 짧게 숙이며 예를 올렸다.
"""사장님을 뵙겠습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한 이들이라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경비 대원들과 비교해도 차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세상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해 주겠다."
원의 말에 공돌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이번 강연을 잘 듣고 더 좋은 시계를 개발해 낸다면, 조선전력공사에서 지원해 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원은 서서히 민간 산업을 키울 생각이다.
'모든 것을 내가 다 만들 수는 없지.'
그래서 이미 개발이 완료된 시계 구조를 공개하고 더 좋은 시계를 만들라고 이번 강연을 기획했다.
옹진반도에서 산업 기술이 점점 발달해 가자 원은 시계를 만들라고 연구원들을 모아 놓고 강연했다.
그리고 오늘 공돌이들에게 세계 최초로 조선에서 만든 시계를 보여주며 강연을 시작했다.
"태엽을 감을 때에도 시곗바늘은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한 방향으로만 힘이 전달되는 톱니바퀴를 구성해야 한다. 또한 진자(振子, Pendulum)처럼 움직이게 하려면 균형 바퀴도 필요하다."
장인이란 칭호가 있는 공돌이 대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사장님. 진자를 어떻게 반복해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하다. 열식이가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네, 사장님."
열식이는 공돌이들 앞에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칠판에 다양한 도형을 그리고 난 열식이가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고 씩 웃었다.
디젤엔진을 만들면서 기계 구조에 박식해진 열식이.
목에 힘을 주고 자신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열식이는 강남스타일 춤처럼 양팔을 벌리고 양 손바닥을 아래로 한 다음 좌우로 움직이며 말했다.
"······이렇게 'ㅗ'자형 부품을 만들어 진자의 움직임을 초 단위로 제한할 수 있습니다."
열식이는 디젤엔진에서 흡기밸브와 배기밸브가 교차하는 것을 예를 들었다.
태엽 시계에는 머리카락처럼 생긴 스프링에 의해 진자가 좌우로 시차를 두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부품이 있다.
닻처럼 생겨서 레버(Lever) 또는 팔렛(Pallet)이라 부르는 핀이다.
작년에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에서 열식이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연구원들.
쉬지 않고 도전한 결과.
해시계로는 오차를 측정할 수 없는 손바닥만 한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냈다.
달리기 측정용으로 쓰이는 시계지만,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면서 위도(緯度, Latitude)가 어디쯤인지 알아낼 수 있다.
원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백령도 북쪽 끝이 위도 38도였다.
그런데 경도(經度, Longitude)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백령도 서쪽 끝에 있는 용기포 등대를 경도 0으로 지정했다.
이제 세상의 기준점은 영국 런던이 아니라 백령도가 되었다.
원이 백령도 용기포 등대를 기준으로 한 위도와 경도가 표시된 해도를 세상에 공개하려 했기 때문이다.
'크로노미터(Chronometer)가 별건가. 우리 연구원들이 만든 시계가 훨씬 좋지. 비싸게 팔아먹어야지.'
1735년 영국인 목공 장인 존 해리슨이 만든 크로노미터는 아주 초기 단계의 기계식 시계일 뿐이다.
'조선시계1'이라 명명된 세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존 해리슨이 만든 크로노미터보다 성능이 월등했다.
퇴각식 탈진기를 쓰지 않고 머리카락 스프링을 이용한 진자 바퀴를 쓰기에 폭풍 속에서도 오차란 있을 수 없었다.
크기 또한 손바닥만 하기에 휴대도 편리했다.
열식이가 쉬지 않고 떠드는 바람에 강연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지금은 손바닥만 하지만, 너희들이 연구하면 손톱만큼 작게도 만들 수 있을 거로 믿는다. 이상이다."
강연이 끝나자 공돌이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일어서서 손뼉을 쳤다.
아침부터 돌아다니고, 공돌이들을 모아 강연까지 끝낸 원은 본사로 돌아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 * *
신의주만큼은 아니지만, 산해관에서도 대원 한 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다.
전우애를 뛰어넘어 친형제나 다름없는 대원들.
열 받았는지 손에 무기 비슷한 것만 쥐고있어도 무조건 사살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소리와 간장을 애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수만 명이 넘는 청나라군과 여러 가지 이유로 산해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저항을 끝낼 때까지 반복됐다.
육경 사령관 정용식은 산해관 곳곳을 뒤져 문서를 찾고 전리품을 정리하고 대원들을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샅샅이 뒤져라."
"넵! 사령관님."
심양을 털어 온 기마대 사령관 기수만큼은 아니지만, 산해관에서 찾아낸 전리품도 상당했다.
그중 좋아 보이는 것들은 모두 산해관을 지키는 버일러의 집무실에 쌓아 놓았다.
집무실 곳곳에서 황홀하게 뽐내는 보물들.
정용식과 참모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대단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변방을 지키는 성인데도 이 정도인데 북경은 어떻지, 상상도 못 하겠다."
"아마 몇십, 몇백 배는 더 대단할 것 같습니다."
"기대되는구나."
대화 중에 뭔가 생각이 난 참모 한 명이 정용식에게 물었다.
"그런데 북경도 치실 겁니까?"
"그건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작전의 목표는 이곳까지다. 우리는 이곳을 요새화해서 단단히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아쉽긴 하지만 북경이야 언제든지 칠 수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오는 적은 쉽게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몇십 배나 많은 병사가 지키는 성은 쉽지 않다. 공격하는 일은 우리도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
"아···, 명심하겠습니다."
정용식과 참모들은 목록을 작성하느라 이마에 땀이 흐른다는 사실도 몰랐다.
성주나 다름없는 버일러의 집무실이라 무척이나 따스하고 아늑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낸 정용식 앞에 진압을 책임진 참모가 나타났다.
"멸!"
"다 처리 했느냐?"
"포로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또한 거주민들도 일일이 심문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낼부터 방어 진지 구축에 들어간다."
"넵! 사령관님."
산해관을 접수한 조선전력공사 육경 대원들은 제일 먼저 해자(垓字) 밖에 철조망부터 깔았다.
포로로 잡은 청나라 병사들을 동원해 흙 포대를 쌓고 성문 입구에 진지를 구축했다.
"을수 함장에게 연락해 대포를 보내고 포로들을 이송해 가라고 전해라."
"넵! 사령관님."
너무 많은 포로를 확보했기에 일부는 조선으로 보내기로 했다.
물론 건주여진 놈들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대원들도 이제는 알았다.
여진 말을 한다고 다 같은 여진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진족도 출신 성분에 따라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건주여진 놈들만 따로 모아 놓았다.
심양에서 살다가 옹진반도로 돌아온 대원 한 명이 싸늘하게 건주여진 놈들을 노려보며 소대장에게 말했다.
"저놈들은 다 죽여버리죠?"
"돈이라고 하니 그냥 두거라."
"네?"
"청나라에 팔아먹기로 했다."
"그냥 일꾼으로 쓰면 안 됩니까?"
"눈빛을 봐라. 되겠냐?"
청나라에서 최고 지배계층이 된 건주여진 놈들은 포로가 되어 묶여 있었지만, 살벌한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정용식은 산해관을 접수한 후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산해관은 남과 북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산해관이 어떤 곳인가.
천혜의 요새 아닌가.
곳곳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강철 대포까지 추가하면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만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탄환과 폭약만 충분하다면 능히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중요한 곳을 허무하게 뺏기다니, 망해도 싸군."
"그렇습니다. 명나라는 망할 만했습니다."
이번에 제1사단장으로 진급한 천수가 맞장구를 쳤다.
일명 '천보 달리기'에서 항상 우승했기에 원이 천수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서 소대장 이상 장교로 진급을 원하면 1,000m 달리기를 4분 안에 주파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리 잘 나도 진급할 수 없었다.
달리기는 모든 운동의 기본이기에 원은 경비대의 원칙으로 정해 놓았다.
또한 이번 신병 교육을 마치고 대원이 되려고 해도 천 미터 달리기는 4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명시했다.
정용식은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서 조선시계1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무전이 올 시간이다. 준비해라."
"넵! 사령관님."
매일 정오가 되면 백령도 사령부에서 명령이 오기로 되어 있다.
신의주처럼 전력을 상시 공급받을 수 없는 곳이나 이동 중에는 시간에 맞춰 열식 발전기를 가동하고 무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물론 긴급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열식 발전기를 가동하고 무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정오는 의무적으로 교신을 해야 한다.
-치지직, 여기는 대붕이다. 제일관 나와라. 오바.
"여기는 제일관이다. 오바.
-제일관, 긴급 명령이다. 오소리가 그쪽으로 도주 중이다. 준비하여 포획하라. 오바.
"알았다. 대붕. 오바."
무전을 마친 정용식은 장교들을 긴급 소집했다.
될 수 있으면 오소리를 사로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