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53화 (53/275)

< 53. 작전명 만반도(1) >

너무 어두웠다.

계곡이라 그런지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만포로 진격하던 팔기군은 말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진이 난듯한 미세한 땅 울림에 걸음 멈췄다.

"버일러?!"

만포 진격을 맡은 팔기군의 수장 양우리는 의문과 놀람이 섞인 버이서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깊은 산속이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당장 정찰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네, 버일러."

정찰병들이 떠나자 양우리는 버이서와 타일러까지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아무래도 보급 부대가 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매복이 있었더냐?”

“정찰병으로부터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뭐란 말이냐?”

“조선 놈들이 화약을 써서 계곡을 무너트린 건 아닌지···.”

"크흠."

눈을 감고만, 양우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어두운 밤에 이동하기에 정찰병을 전보다 많이 내보냈고,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군의 공격이라니···.

'뭔가 잘못됐어···.'

주로 해가 뜨는 아침부터 해가 지기 시작하는 밤까지 쉬고, 어두워지면 이동했다.

그래서인지 병사들의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보다 강한 도르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길림성의 폐주나 다름없는 버일러였기에 이번 전쟁이 달갑지 않았다.

그도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의 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심양을 치고 난 후, 도발은커녕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조선을 굳이 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말이다.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느냐?"

"잘해야 삼일입니다."

엄동설한이나 다름없는 눈 덮인 추운 겨울에 보급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얼어 죽기 딱 좋았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식량은 많지 않았다.

언제든지 전투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될 수 있기에 최대한 가볍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만포로 진격한다."

"하지만 버일러, 보급 부대가 당했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만포로 가자는 것 아니냐."

"만포로 가봐야 이 대군을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할 수 없습니다."

"크흠."

아무리 기마 민족이라 해도 한겨울 산속에서는 힘을 쓸 수는 없었다.

보급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칭기즈칸의 몽골 기병도 말 먹이가 풍부한 대초원이 아니라면 고전할 수밖에 없었기에 상황이 불리하면 회군했다.

그런데 보급 부대가 당했다면 말에게 먹일 풀과 식량은커녕 당장 병사들이 마실 물이 문제였다.

눈을 녹이고 얼음을 깨서 먹는다는 것도 병사 수가 적을 때나 가능하다.

이렇게 수만 명이나 되는 기병들에게 마실 물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할 수야 있지만, 도르곤이 계획한 기습작전은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양우리는 뒷감당을 할 만한 자신이 없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가운데 후방으로 보냈던 정찰병이 돌아왔다.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린 정찰병이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버일러, 계곡이 무너져 길이 막혔습니다."

"""하아···."""

버이서와 타일러들이 단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 부대로만 구성된 기병들이 고립되었다.

그것도 길림성에서 싹싹 긁어온 병사들이었는데, 길이 막혔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뒤로 후퇴할 수도 없으니 만포로 진격한다."

"""네, 버일러."""

아직 당나라군으로 변하지 않은 청나라 팔기군이라 버일러의 결정에 따지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얼어붙은 계곡을 따라 조그마한 마을인 만포에 도착하자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버일러,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놈들이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쓴 것 같습니다."

벽을 튼튼히 하고 들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인 견벽청야는 흔히들 아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일종이다.

한나라의 하승천이 그의 저서 ‘안변론(安邊論)’에서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집단 주민 소개책(疏開策)’에 언급한 것이 유래되었다.

견벽청야는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에서도 사용했던 전술이다.

지리산 빨갱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주변 민간인 마을을 불태웠고, 포위하여 섬멸했다.

이렇듯 먹을 것이 많이 있을 것 같은 지리산에서도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은 구하기 힘들다.

그런데 눈 덮인 북녘땅이라면.

양우리와 장수들은 겁에 질렸다.

병사들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원은 우물에 독을 타고 주변을 불살라버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만포 위로는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냥 비워두고 모두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만 말했다.

청야전술이 아니라 철수 전술을 사용한 거였다.

"여기서 의주까지 얼마나 되느냐?"

"압록강을 따라가더라도 족히 500리가 넘습니다."

"이런, 쌍!"

양우리는 참았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신 욕을 해댔다.

난처에 빠진 양우리가 이끄는 팔기군은 안주(安州)를 점령하고 주둔하면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선의 지원군을 막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여유가 된다면 북쪽 신의주를 치는 데 지원하고, 남쪽 평양을 쳐서 군량과 인력을 얻는 것이 두 번째 계획이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도르곤이 명령한 계획대로라면 독로강(禿魯江, 장자강)을 따라 강계(江界)를 거쳐 전천(前川), 희천(熙川), 향산(香山)을 점령하고 보급로를 개척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조선을 확실히 치려면 보급은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도르곤이 급하게 서두르느라 모든 보급은 양우리의 팔기군이 맡았다.

지나가면서 마을을 약탈하고 따라오는 보급 부대의 연결지점으로 만드는 일은 양우리의 몫이었다.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무려 37,500명이나 되는 구사 기병 다섯 기를 이끌고 남하 중이다.

이 많은 병사가 사흘 뒤면 먹을 식량이 떨어진다니 암담하기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버일러,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압록강을 따라 의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정남기를 만난 후, 다시 보급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대로 보급을 받지 않으면 전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크흠."

버일러가 고민하는 가운데 어느새 날이 밝아 왔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만포.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가자!"

"""네, 버일러."""

너무 암담한 상황이라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하루라도 빨리 의주로 가서 정람기와 합류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꽁꽁 얼어붙은 미끄러운 압록강을 따라 20km쯤 이동했을 때였다.

폭이 1.3km가 넘는 호수처럼 넓은 곳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는데.

-구구구 쾅! 쾅!

양쪽 강가에서 폭음을 울려 퍼지며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들이 산산이 조각나며 깨져 나갔다.

-히이잉!

"으악!"

"살려줘!"

말과 함께 뒤엉켜 차갑다 못해 뼈까지 시린 압록강 속으로 빠져 버린 청나라 병사들.

비명조차 몇 번 지르지도 못하고 물귀신을 영접했다.

아무리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날씨에 물에 빠지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두두드, 탕! 탕!

압록강 양쪽 산 위에서 얼굴만 드러낸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청나라 기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다.

두껍게 얼어붙어 깨지지 않았던 빙판 조각이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 * *

은동리 본사 5층.

점심을 먹고 난 원은 대마도에서 가지고 온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설탕이 꿀보다 비싸다는 게 말이 되냐고."

혼자 구시렁거리며 투덜거렸지만, 세상이 그런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설탕이 금값이라니 말이 돼? 완전 도둑놈들이네."

21세기라면 공짜로 나눠주는 비닐봉지와 불량품이나 다름없는 플라스틱 제품을 비싸게 팔고 있는 원이 할 말은 아니었다.

서양 상인들이 중동에서 가지고 온 커피도 있었지만, 아직 어렸기에 참고 있었다.

대신 그윽한 홍차를 생각하고 마셨는데 맛은 덜 익은 감처럼 엄청 떫었다.

어쩔 수 없이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맛을 봤지만.

"에이! 더는 못 마시겠네."

홍차의 나라라는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값이 싸진 홍차를 노동자들도 많이 마셨다.

하지만 포장 상태가 좋지 않아 배에 싣고 오면서 맛이 변해 버렸기에 설탕 없이는 홍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너무 떫은맛을 중화하려고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셨는데 그것이 전통이 되었다.

"싸장님!"

낼 모래면 아빠가 될 은쌍식이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왔다.

원은 마시다 만 홍차를 치우고 물끄러미 은쌍식을 쳐다봤다.

들을 때마다 악덕 고용주가 된 느낌이라 원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싸장님'이라고 강하게 발음하지 말라고 주의를 좋지만, 소용이 없었다.

"왜?"

"걸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래?"

"네, 한 놈도 남김없이 수장시켰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멍청한 놈들."

"그러게 말입니다. 겁도 없이 쳐들어오더니 압록강 물고기들만 배 불리게 생겼습니다."

혹시 몰라 준비는 했지만, 이리 쉽게 걸려들지는 몰랐다.

많이 보내지도 않았다.

예상되는 3곳에 각각 대대 병력만 보내 놓았다.

여차하면 후퇴 하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최악인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다니, 대승을 거두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잘됐네."

"그래도 좀 아쉽습니다. 일꾼들이 사라져 버리다니."

"그러긴 하지만, 위험 요소는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아."

"그런가요? 일 시킬 곳이 많은 데 사로잡았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은쌍식은 청나라 병사들만 보면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일꾼으로 생각했다.

어찌 된 일인지 반항하는 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잘 먹여주고 잘 재워줘서 그런 거겠지만, 생각보다 말을 잘 듣고 잘 따랐다.

알고 봤더니 건주 여진 출신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 해서와 야인 여진 출신들이었다.

"기수는 현재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건안성(建安城)까지 진격했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안시성을 점령하고 요동성까지 진격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음···."

원은 나무로 된 병력 표시를 지도 위에 올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은쌍식도 궁금했는지 원 옆에 서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놈들이 북으로 도주할 수도 있겠느냐?"

"지금 같은 날씨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겁니다."

원보다 10살이나 많은 은쌍식은 심양 근처 지리에 대해서 잘 알았다.

원이 조선 막지와 연필을 만들면서 이곳저곳으로 보내 알아보라고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 놓쳐도 용식이가 잘 막고 있으면 놈들이 돌아갈 곳은 없겠지."

"용식이라면 잘해 낼 겁니다."

이제 육경 사령관이 된 정용식은 제1사단 병력을 직접 이끌고 새로운 국경이 될 곳으로 떠났다.

그곳만 막으면 아무리 많은 청나라군이 몰려온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원은 청나라군을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

이번 기회에 대체 역사 커뮤니티에서 말하던 만반도(滿半島)를 완성하고자 했다.

만주와 한반도를 뜻하는 만반도는 대체 역사 독자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해도 충분하다."

"맞습니다. 전에는 제가 생각이 짧아서 바로 청을 멸하고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은진이가 된 쌍년이가 아이를 갖자 은쌍식도 어른스러워졌다.

흥분하면 '싸장님'이라 외치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원은 지도 판에서 한 참 벗어난 곳을 손가락 툭툭 치며 가리켰다.

"청을 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부터 틀어막아야 한다."

"네?"

"서쪽에 루스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벌써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들었다."

원은 예수회를 통해 수시로 러시아의 움직임을 듣고 있었다.

루스를 통일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차르국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에 이르러 제국으로 탈바꿈한 러시아가 걱정했던 시베리아에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그래서 청을 멸하기 전에 러시아부터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런 나라도 있습니까?"

"정확히는 '러시아'라 부르는 곳이다."

은쌍식은 손으로 뺌을 재보고 선 놀란 눈으로 원을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먼 곳입니다."

"그렇게 말이다. 뭐 먹을 게 있다고 몰려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온 놈들은 모피를 약탈하러 온 도둑놈들이니 다 죽이거나 쫓아내야 한다."

"그런 놈들이라면 당장 쳐 죽여야 합니다."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의 수많은 백성을 노예로 끌고 간 청나라의 악행을 몸소 체험했던 은쌍식은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갑자기 눈에 힘을 주었다.

"급하게 서두를 건 없다. 몇 놈 안 된다고 하니 천천히 해도 될 것 같구나."

"그래도 빨리 쫓아내야 합니다. 도둑놈 새끼들은 그냥 둬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맞다. 쫓아내야지. 아무튼 청을 완전히 멸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사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대륙이다.

서로 죽고 죽이면서 좀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원은 차마 은쌍식에게 속내를 보여 줄 수는 없었다.

* * *

안시성에서 출발한 도르곤의 팔기는 빠르게 산을 넘고 다양강을 따라 압록강 서쪽 평야에 도착했다.

"정찰대에서 새로 들어온 보고는 없느냐?"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전하."

몸이 좋지 않아 약재 달인 물을 마시고 난 도르곤이 입을 닦으며 비웃듯이 말했다.

"자신만만하군."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전하."

"그래야겠지. 보통 놈들이 아니니. 한데 정람기(正蓝旗)는 차질 없겠지?"

정람기는 도르곤의 친동생인 도도가 맡고 있었으나 작년에 죽어 버렸다.

그래서 도르곤이 정백기와 함께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다는 전령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양우리에게 선 연락이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전하. 너무 먼 곳이라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됐는지 모르지만, 잘하고 있을 겁니다."

"흐음."

도르곤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는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지켜보던 버일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놈들이 동요하지 않는 걸 보면 양우리가 우회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겠다. 정람기와 약속한 대로 내일 밤에 공격을 진행하도록 하자. 그러니 차질 없이 준비하거라."

"네, 전하."

양우리의 팔기가 모두 물귀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르곤은 승리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다.

그 제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내일이면 밝혀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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