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표출(3) - 지도 >
옹진반도로 돌아온 원은 쌍년이로부터 받은 문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
청나라 심양에서 조선인들이 쓰던 조선 시대 이름 짓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었다.
지역마다 가문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쌍년이에게 말해 가장 잘나가는 가문의 것들을 받아오라고 했지만,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가문이라도 아니 왕족이라도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은 천할수록 오래 산다는 이상한 풍습 때문인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세종대왕께서도 태어나자마자 '막동'이라 불렸다.
성이 있는 양반 가문이라면 돌림자가 있고 나이가 들면 가문에서 정해준 이름을 사용한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나 노비들은 처음 지은 이름을 변경하지 않고 그냥 살았다.
그래서 원은 수집한 이름 짓는 법을 조합해 적당히 내용을 바꾸었다.
어차피 정해진 규칙이란 게 없어 보였다.
"쌍년아, 이것이 새로 만든 이름 짓는 법인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표를 받아 본 쌍년이는 아무 생각이 없는지 그냥 쑥 흩어 보았다.
바쁘신 사장님이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지 눈만 깜빡거렸다.
원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쌍년이의 반응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부터 생각해 왔던 말을 꺼냈다.
"쌍년아, 앞으로 너를 은진(隱眞)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괜찮겠느냐?"
"네, 사장님."
쌍년이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순'자 돌림이라면 기뻐했을 건데···.
사장님 말씀이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쌍식이에게 은동(隱洞) 은(隱) 씨라는 성을 내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은 은진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성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쌍식이 정도면 성을 가진다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李) 씨라는 성을 내려주고 싶었지만, 그건 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은진이가 주저앉더니 큰절을 올렸다.
"사장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미천한 것에게 이름도 지어 주시고 태어날 아이에게 성도 하사 하시니 그 은혜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똑똑한 은진이는 원이 갑자기 성을 하사한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인지 무슨 일을 시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던 은진이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몸에 좋지 않다."
좋은 집을 지어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은진이는 성을 하사받자 정말 고마운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그리한다면 취소하겠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
역시 줬다 뺏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원이 공식이었을 때 말 안 듣는 조카에게 자주 써먹었던 방법이었다.
"앞으로 몸 관리 잘하고 일은 당분간 삼복이에게 넘기도록 해라."
조서원에 소속된 삼복이는 특공 대원들을 지휘하는 대장이다.
청나라 사신을 처리할 때도 지휘를 맡았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이라 말이 별로 없지만,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산모는 몸 관리를 잘해야 튼튼한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고집 피우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은 은진이는 바로 쌍식이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삼복이는 현재 청나라 팔기군의 진격로를 검토하느라 북쪽에 가 있지만, 곧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무리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만주·몽골 팔기군이라 해도 전쟁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좋지 않은 도르곤이 직접 나서서 지휘한다니 예상보다 빨리 올 것 같았다.
"빌어먹을 새끼, 그냥 북경에서 잘 지내고 있지 뭔 지랄이야."
예상하지 못한 일을 터지자 원은 짜증이 났다.
남명과 청나라가 정신없이 싸울수록 대륙 이북을 차지하기 쉬웠다.
그런데 바라던 일을 하지 않고 겁도 없이 쳐들어온다니.
"모조리 죽일 수밖에."
이번에는 앉아서 수비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예 초반부터 작살을 내버릴 계획이다.
아무리 '말박이'라고 부르는 무식한 놈들이지만, 무작정 오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른 대응도 해야 한다.
그래서 조서원의 특경대원들과 요원들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아직 보병 최고의 지원 병기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야전이라면 자신 있었다.
"제길, 아직 신병 교육도 끝나지 않았는데···."
원래는 신병 교육을 끝내고 정병이 될 병사들을 모집한 다음 훈련을 시킨 후 본격적인 '멸' 작전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래야 진격로를 관리하고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총 쥐는 시간보다 삽 쥐는 시간이 더 많았던 일빵빵(대한민국 육군 특기번호 111101, 예전에는 1111 또는 100)이었지만, 보급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계획을 변경하는 수밖에."
다시 태어난 후 지금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꼬이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 또한 예상하고 준비한 일이었으니.
원은 새로운 작전을 준비했다.
* * *
대륙 남동쪽 복건성(福建省) 하문(厦门).
이곳까지 내려온 조경 1호선에서 내린 박문식이 조선전력공사 해경의 호위를 받으며 항구에서 내렸다.
"위대하신 조선의 태자께서 보내신 사신을 환영합니다."
풍채 좋은 젊은 남자가 박문식을 보고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이제 왕위에 오르실 분이신데 예(禮)가 과하십니다."
"그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그 자리를 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이리 약속을 지키시니 따를 수밖에요."
박문식은 조선으로 가기 전에 국성야(國姓爺)라 칭하는 정성공(鄭成功)에게 미리 연락해 놓았다.
아무래도 영력제가 약속을 어기고 양자강을 건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당연한 것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낮춰주십시오. 너무 과한 예는 부담이 됩니다. 또한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이곳에서 그 누가 나에게 따질 수 있단 말이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을 터이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원역사에서 대만(臺灣)의 아버지로 불렸던 정성공은 박문식이 오래전부터 작업해 놓은 사람이었다.
'대륙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다. 특히나 높은 자리에 오른 이는 말 바뀌는 일이 일상사이다. 그러니 수작을 부리면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먼저 포섭해 놓아야 한다.'는 원의 말에 따라 물색해 놓은 이가 바로 정성공이었다.
정성공의 아버지는 명나라 말기에 관리이자 해적이며 거상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다.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난 정성공은 일곱 살 때 복건성으로 온 후,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래서인지 정성공은 조선전력공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가는 길에 정성공은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의 함선은 모양부터 신기합니다. 그런데 돛이 하나뿐인데 항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군요."
"기밀이라 말해 줄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사실 저 또한 잘 알지 못합니다."
처음 조경 1호에 올라탄 박문식은 어리둥절했다.
300자(약 90m)나 되는 거대한 배가 돛도 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빨리 항구를 빠져나가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함장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수 함장은 박문식이 누구인지 잘 알기에 손수 기관실까지 안내하며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석탄으로 물을 끓여 그 힘으로 움직이게 만들다니 박문식은 어린 태자를 따르기로 한 결정이 인생 최고의 행운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함선입니다. 혹시 철로 만들어진 건 아닌지요?"
박문식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아무리 봐도 이음새가 보이지 않더라니···."
역시 대륙의 해안을 꽉 잡고 있는 해적 두목이라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박문식 또한 정성공의 저택으로 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동안 영력제의 눈을 피하려고 하문 앞바다에 있는 큰 섬인 금문도(金門島)에서 정성공을 만났다.
21세기에 '샤먼시'라 불리는 하문은 정성공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정성공의 저택은 조선의 대궐보다 크고 넓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의 공격이 거세지자 정성공은 아버지를 따라 남명의 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했다.
하지만 청나라에 항복한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융무제 또한 영력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정성공의 마음이 달라졌다.
복건성 복주(福州)에서 하문으로 본거지를 옮긴 정성공은 더는 청나라나 명나라를 섬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때 나타난 이가 바로 박문식이었다.
박문식은 영력제에게는 조선에 다녀온다고 말했지만, 사실 정성공을 만나러 갔던 거였다.
그래서 박문식은 한동안 조선에 올 수 없었다.
아무든 서로 거래하면서 박문식은 정성공을 설득했다.
'때가 되면 남명에 지원한 것처럼 총과 화약을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니 새로 창업 하시어 왕위에 오르십시오?'
'허나, 듣기 좋은 말에는 독이 있다고 합니다. 나에게 그러는 이유를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영력제가 배신할 것 같습니다.'
박문식은 대륙 사람에게는 잔머리를 쓰지 말라는 원의 말에 따라 사실대로 말했다.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짓을 영웅의 행동이라 칭하는 곳이다. 괜한 꼼수를 쓰다가는 당할 수가 있으니 그냥 정공법을 써라. 잔머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최선이다.'
아직도 주군인 원이 한 말이 박문식의 머리에 맴돌았다.
그런데도 정성공은 만만치 않았다.
14세에 수재(秀才)에 합격할 정도이니 보통 머리가 아니었던 거였다.
저택 한곳 정자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난 정성공은 전과 다르게 바로 물었다.
"바라는 게 뭡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조선은 양자강 이남에서 발생한 일에는 전혀 관여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대만과 홍콩(香港), 해남도(海南島)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흐음."
잠시 지도를 살펴본 정성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이야 네덜란드와 다두 왕국이 있는 곳이고, 해남도는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곳이기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대륙 해안의 지배자라 불리는 정성공으로서는 홍콩이 문제였다.
바로 자신이 관리하는 해적들의 본거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원래 홍콩은 포르투갈이 대륙과 무역 하던 곳이었다.
1520년 포르투갈은 군사적 충돌 후 추방되었다.
1549년에 다시 명나라와 교역이 재개되었지만, 1557년 명나라로부터 마카오 영구 임차권을 얻고 포르투갈은 홍콩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현재는 정성공이 관리하고 있었다.
"굳이 그곳을 원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서 대만을 거쳐 해남도까지 가는 길의 중간입니다. 따라서 보급지로 좋은 위치입니다. 또한 남명의 눈을 피해 거래하기에도 적당한 곳입니다."
조선전력공사의 상품은 차익이 좋았기에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처음에는 갈대로 만든 조선 막지부터 시작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종류의 종이는 물론 새로운 상품까지 추가되었다.
그래서 해적이지만, 조선전력공사의 깃발을 달고 있는 배를 보면 되레 보호했다.
물론 처음에 멋모르고 덤볐다가 작살이 나도록 깨진 적이 있었다.
"단지 그 이유만 있습니까?"
"그것 말고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정성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의 두목이기도 하지만 상인이었기에 계산이 빨랐다.
정성공은 청나라 팔기군이 조선전력공사의 경비대에게 대패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조선전력공사의 저력을 보면 굳이 타협하지 않고 정복해도 할 말이 없었다.
"좋소! 그럼 확실히 계약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어떻게 해드릴까요."
"양자강 이남에 관해서는 조선에서 관여하지 않겠다고만 명시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저도 대만과 홍콩, 해남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정성공은 다 죽어가던 남명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도 떳떳하니 창업을 하고 왕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영력제의 눈치를 보며 대륙의 해안에서 해적 두목 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전력공사에서 최신 무기를 받을 수만 있다면 왕이라 칭해도 감히 덤빌 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역시 호쾌하십니다.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져온 물품들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작성하도록 합시다."
이로써 원은 동남아로 향하는 루트를 선점해 놓았다.
물론 정성공이 영력제를 이긴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대만과 해남도를 정복해야 하지만, 일단 대외적인 문서는 확보했다.
원은 둘이 견제만 하고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명이 양자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고, 한인팔기와 죽어라 싸우며 서로 소진하게 만드는 것이 진짜 목표였다.
그러니 정성공을 키워주는 일은 당연했다.
서양의 수석총보다 좋다는 조선전력공사의 수석총을 얻은 정성공의 마음은 급했다.
대륙 전부를 차지할 순 없지만, 남쪽 일부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황제가 아니라도 당당히 왕이라 불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섬겼던 융무제의 복수를 하는 것일 터이다.
아무튼 원에 의해 역사가 바뀌면서 정성공은 영력제를 치고자 준비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