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표출(2) - 지도(유료 시작) >
도르곤의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의 앞에는 목을 잃은 친왕의 몸이 쓰러져 있었다.
칼을 든 도르곤이 한 걸음씩 천천히 걸었다.
친왕들과 대신들은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린 순치제 또한 겁이 났는지 눈을 감아 버렸다.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인 도르곤의 이름은 여진 말로 '오소리'를 뜻한다.
그래서인지 성격이 매우 사나웠다.
도르곤은 대륙의 원주민인 한인들에게 여진족 풍습인 변발을 강요했다.
거부하면 극형에 처한다는 칙령도 내렸다.
하지만 한인들은 거부하며 적개심을 불태웠다.
도르곤은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을 앞세워 말을 듣지 않는 한인들을 무참히 참살 했다.
도르곤이 친족을 그것도 같은 친왕을 죽였지만,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송산성과 금주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도르곤의 위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도르곤은 살벌하게 눈을 뜨며 주변을 흩어봤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기세에 눌렸는지 눈조차 마주치길 거부했다.
"만주는 우리 여진족의 발원지인데 그곳을 넘기자는 말을 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 * *
원은 쌍식이와 함께 은동리에 새로 지어진 연구소들을 시찰(視察)하고 있었다.
멀리서 말 탄 대원이 원 앞에 다가와 말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사장님, 즉시 가보셔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원장님께서 사장님을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머지는 쌍식이 네가 확인해 봐라. 난 먼저 갈 터이니."
"네, 사장님. 걱정하지 마시고 어여 가보십시오."
쌍식이는 뭔가 급한 일이 발생했다고 느꼈는지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본사 5층 회의실에 도착하자 쌍년이와 박문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식이 왔구나. 고생이 많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박문식은 일어나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주유량이 양자강을 건널 듯합니다. 그래서 급히 돌아왔습니다."
"혹시···?"
"네, 전하. 도르곤이 일을 벌인 듯합니다."
"흠···."
아이답지 않게 깊은 침음을 내뱉은 원은 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심에 빠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예상보다 일찍 계획이 틀어지자 원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청나라와 남명이 서로 견제하며 죽고 죽이는 싸움이 길어질수록 조선에 이득이 된다.
그런데 도르곤이 조선을 치러온다면, 영력제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자세히 말 좀 해 보거라."
"네, 전하. 도르곤이···."
박문식의 말을 전부 듣고 난 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동안 팽팽했던 양자강 전선이 뭉개질 게 뻔해 보였다.
"골치 아프구나."
"그래서 두 번째 작전을 수행할까 합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상황을 봐서 즉시 처리하도록 해라."
"네, 전하."
오랜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박문식은 개성에 가서 가족들을 만난 후 바로 대륙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갤 선이 아닌 조경 1호선을 타고 갔다.
대마도 정복 작전을 멋지게 마무리한 조경 1호선의 성능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먼 곳을 실험 삼아 보냈다.
또한 싣고 갈 물품들이 많았고, 빠르게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 * *
시끄러운 대륙과 달리 대마도는 활기가 넘쳤다.
자유 무역항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서양 배들이 남쪽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입항비는 따로 받지 않지만, 정박비는 받습니다. 따라서 머물고자 하는 날짜를 말해 주시고 요금을 지급해야만 내릴 수 있습니다."
박연이 된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가 어눌한 네덜란드 말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 함장에게 말했다.
함장은 조선 관복을 입은 네덜란드 사람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불편함을 먼저 토했다.
"얼마나 오래 있을 줄 알고 그리한단 말이오?"
"아직 주 항구로 가는 운하가 뚫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들어오려는 배는 많은데 나가는 일정을 알 수 없다면, 관리가 안 돼서 그러니 양해 바랍니다."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언제 완공이 될 것 같소?"
"늦어도 올가을 안에는 공사가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불편하더라도 감수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함장은 싱긋 웃었다.
남보다 빠르게 움직였기에 대기하지 않고 이즈하라 항구에 바로 정박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함장은 가지고 온 물품을 비싸게 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에 올 때는 새로운 항구에 정박할 수 있습니까?"
"그럴 겁니다."
"그런데 운하라니? 이 섬이 그렇게 넓소?"
"생각보다 큰 섬입니다. 그래서 섬 중간에 운하를 뚫어 동서 양쪽으로 오갈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정박료를 계산하면서 함장은 박연에게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많이 물었다.
박연은 표류하다 조선에 도착한 후 훈련도감에서 대포를 만들었고, 병자호란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 와중에 같이 온 동료 두 사람을 잃었지만, 거친 바다에서 배를 타는 것보다는 조선에 사는 것이 안전하고 좋았기에 정착했다.
조선 사람들은 자신을 신기하게 보았지만, 거부감이 없었고 혼인까지 했기에 조선은 새로운 정착지로 삼기에 최고였다.
아무튼 무기 전문가이자 무장인 박연은 조선의 무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연은 감추지 않고 아는 만큼 함장에게 말해줬다.
함장은 그런 박연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네덜란드 출신이라 정감도 느꼈다.
"다른 중요한 건 또 없소?"
"참, 빼먹을 뻔했습니다. 마을에서는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기는 모두 배에 두고 내려야 합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박연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치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것 같군요. 아무튼 고맙소. 혹시 고향에 전달할 것 있으면 말해 주시오. 내 수고를 대신해주겠소."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돌아가기 전에 부탁하겠습니다."
박연과 헤어진 함장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놀라면서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항구 곳곳에 수석총과 비슷한 총을 든 병사들이 돌아다녔다.
멀리 있는 포대에는 가늘고 긴 포가 튀어나와 있었다.
또한 항구 양쪽 언덕에는 총구가 여러 개 달린 신기하게 생긴 큰 총도 보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신천지였구나."
함장은 박연에게 들은 정보를 하나씩 검토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무역하기 좋아 보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유 무역 항구지만 모든 거래는 조선에서 발행한 화폐로만 거래해야 한다.
출항할 때 다시 금이나 은으로 교환할 수 있다.
거래세 5%만 차감하고 다시 금은으로 바꿔 준다고 하니 어찌 보면 아주 편리했다.
'그냥 가지고 가면 거래세를 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함장은 조선에서 발행한 금화 하나를 집어 들고 살폈다.
"순금은 아닌 것 같은데···."
놀랍도록 정교한 금화의 표면은 처음 본 문자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648이면 서양력인데 3983은 뭐지?"
금화마다 숫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틀림없이 연도를 표시한 것 같았다.
그런데 금화에 새겨진 숫자의 차이가 너무 컸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다시 금화를 뒤집어 본 함장은 더욱 놀랐다.
"이건 지도 같은데?"
작은 동전이라 뭉뚱그려 보였지만, 세계지도라는 것을 대양을 누비는 함장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조선이란 나라는 뭐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항구에 내려 조선전력공사에서 직영하는 상점에 들렀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처음 본 신기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비단'이라는 것은 비록 흰색만 있지만, 가격이 대륙의 비단보다 1/3밖에 하지 않았다.
"제길! 물건 팔러 왔다가 사 가게 생겼군."
하지만 흥분한 심장이 뛰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값이 싼 조선 비단이 대륙의 비단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은거울과 조선 비단만 사서 돌아가더라도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장은 급히 배로 다시 돌아가 가지고 있던 은덩이와 금덩이를 모두 들고 내렸다.
* * *
황해도 송림읍에 도착한 원은 경비대의 호위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 용광로가 완성됐다고 했느냐?"
"네, 사장님. 네 번째 용광로는 바로 준비 중입니다."
아직 기술이 부족해 대형 용광로는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용광로를 여러 개 만들어 사용했다.
그래도 옹진반도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크고 좋았다.
그동안 찾아낸 문제점을 개선하여 만든 것이니 당연했다.
"사고라도 나면 사람 죽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안전 제일 알지?"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그래 제일 중요한 건 사람 목숨이니 여차하면 모두 포기하고 대피할 수 있게 훈련도 게을리하지 말아라."
"네, 사장님."
제철소에서 일하다 보면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삼인 일조로 투입하여 두 명이 일할 때 한 명은 멀리 떨어져서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그래야지만 여차하면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단에 고기는 많이 포함하고 있느냐?"
"네, 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매일 정해진 양 이상 고기반찬을 제공하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지시만 가지고는 안 된다. 힘들겠지만 네가 수시로 가서 확인 해 보거라. 만약 수작을 부르는 이가 있으면 바로 처벌 하도록 하고."
"네, 사장님."
어디서나 못된 짓을 하는 이는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을 인맥이니 뭐니 하면서 봐주다 보면 개판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절대 봐줘서는 안 된다. 식구를 등 처먹는 자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원에게 있어 공돌이들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숙련된 공돌이를 양성하는 데는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원은 식단부터 챙겼다.
'뭐든 잘 먹어야 힘을 낼 수 있고 건강할 수 있지.'
송림제철소 시찰이 끝나자 원은 쌍식이 대신 따라온 수행원을 불렀다.
"석돌아?"
"네, 사장님."
"앞으로 이곳은 정기적으로 네가 시찰 하도록 해라. 가장 중요한 곳이니 그 누구라도 용서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알았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원은 쌍식이의 전용 운전사였던 석돌이를 눈여겨봤다.
쌍식이와 달리 침착한 성격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송림제철소의 감독을 맡기고자 데리고 왔다.
"또한, 네 번째 용광로부터 생산되는 철은 전부 선로(線路, Rail)를 만들 것이다. 그러니 단양 광산에서 '망간(Mn, Manganese)을 가져오는 일도 차질 없도록 해라."
"네, 사장님."
선로를 만드는 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철이 많이 필요하다. 또한 강하고 질긴 망간 합금으로 만들어야만 오래 쓸 수 있다.
"한양까지 철도 공사하는 일도 네가 맡아 감독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아직 기차를 만들지 못했지만, 충분한 철을 생산할 수 있기에 철도부터 건설하기로 했다.
기차가 만들어지면 현장에서 바로 시험 운행을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로를 생산하는 송림제철소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앞으로 조선의 앞날은 이 철도가 얼마나 빠르게 완성되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러니 행식이와 수시로 접촉해 노선을 정하고 ‘효율적이다’ 판단된 곳부터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
"네, 사장님. 그러지 않아도 행식님께서 연락을 담당할 공무원 한 분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잘 됐구나. 행식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타고난 행정가의 자질이 보이는 행식이는 인력 관리에도 빈틈이 없었다.
원은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행식이를 믿고 지원했다.
고아인 행식이는 유학을 배우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조직 관리에 능숙했다.
그래서 아버지 효종에게도 인재라고 추천했다.
아무튼 행식이는 정말 바빴다.
아직 장가를 못 갈 정도로.
그런 행식이를 눈여겨보는 사대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세를 간파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대부들은 행식이를 최고의 사윗감으로 점찍었다.
처박혀 일만 하는 연구원들이나 공돌이들보다는 돌아다니는 행식이가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쌍식이 다음으로 행식이는 최고의 인기남이 되었다.
그런데 행식이는 고아라서 혼담을 논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사대부들은 직접 행식이를 만나 혼담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바쁜 행식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
송림제철소 시찰을 끝낸 원은 다음으로 한양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이동했다.
산 정상에 올라서자 봉수대(烽燧臺)가 보였다.
“석돌아, 행식이에게 말해 여기 있는 봉수대를 치우라고 전해라."
“네, 사장님. 그런데 봉수대는 중요한 것인데 치우시면···.”
“무전기가 있는데 봉수대가 왜 필요하겠느냐?”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릴 했습니다.”
“아니다. 아직 배움이 짧아서 그런 것이니 노력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은 남산 정상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모양의 타워가 좋을까?'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오면 어디서나 눈에 띄는 거대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싶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는 멋지고 큰 타워야말로 조선의 힘을 표출할 수 있는 상징이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