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표출(1) - 지도
효종 2년(1650).
새해를 맞이하여 한양을 찾은 원은 바로 효종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아바마마,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신다고 하니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그런데 어색하구나.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아버지라 불러라."
오랫동안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서 그런지 효종은 아버지란 말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궁중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던 원 또한 아버지가 더 정감 있고 좋았다.
"네, 아버지."
왠지 마마는 할바마마라 부르며 아양 떨던 생각이 났기에 거리감이 있었는지 원은 냉큼 아버지라 불렀다.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
"신병 교육이 끝난 후에 병사로 지원한 이들을 제대로 훈련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 초에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 말고, 경강 다리 말이다. 군사에 관한 것은 너에게 맡겼으니 시작하기 전에 알려만 다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느냐. 네가 나서면 금방 끝날 일인데."
효종의 말에 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뭐든 뚝딱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이기에 설명이 필요했다.
"아버지, 보급 계획이 완벽히 준비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또한 네가 알아서 할 것 아니냐?"
"그렇긴 하지만···."
군에 관해 모든 것을 떠맡겨 버린 효종은 원이 말을 얼버무리자 씩 웃었다.
원 또한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이 있어서인지 변명하기가 그랬다.
"나는 조선에 단단하고 넓은 길이 생기자 변화되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런데 경강에 다리까지 생기면 어찌 될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원이 어릴 때부터 보여준 신기한 기물들을 보며 효종은 속으로 많이 놀랐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잘못될까 두려웠던 거였다.
"그래서 말인데 올해 안에 다리를 완성할 수 있겠느냐?"
"가능은 합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원은 쌍식이와 계획했던 내용을 효종에게 털어놓았다.
"흐음···."
한참을 생각하던 효종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이것은 어떻냐?"
"무엇을 말입니까? 아버지."
"그들 또한 조선의 백성이다. 굳이 잘못을 저지르길 기다린 후 벌을 주는 것보다 처음부터 포상 준다고 말하면 잘할 것 같은데···. 네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원은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후관계가 달라 결과 또한 다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고맙구나. 너도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을 터인데."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효종이라 그런지 말투가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래서 원은 상황을 보며 하려던 말을 꺼냈다.
"참, 아버지. 마마를 물리칠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면서 원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 보였다.
"그게 무슨 상처냐?"
일그러진 피부를 본 효종이 깜짝 놀라 물었다.
"우두법이라고 서양에서 마마를 물리치는 법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아담 샬 신부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그래? 효과가 있더냐?"
원이 멀쩡하기에 효종은 당황하지 않고 핵심을 물었다.
"네, 아버지. 옹진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마마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두 우두 접종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네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된다.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또 그리한다면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소자 명심하겠습니다."
원은 효종에게 우두 접종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효종은 신기한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신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런데 원은 명칭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원이 행한 방법은 우두법(牛痘法, cowpox)이 아니라 종두법(種痘法)이었다.
종두법이나 우두법이나 천연두에 걸린 소를 이용하는 것은 같았다.
우두법은 자연적으로 천연두에 걸린 소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종두법은 일부러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균을 소에게 옮겨 이용하는 방법이다.
아무튼 종두법이나 우두법이나 주사기가 없어도 종두 침으로 접종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침(鍼)은 종류만 9가지였고, 변형된 침까지 세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게 중에는 현대에 수술할 때 쓰는 메스 같은 침도 있었다.
효종은 배농할 때 쓰였던 피침으로 귀 옆 상처를 치료하다가 동맥을 건드려 과다출혈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생각이 다시 난 원은 효종의 귀밑을 살폈다.
‘어서 빨리 설파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마음은 급했지만, 약이란 함부로 쓰면 안 되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효종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중 원은 뭔가를 꺼냈다.
"그건 무엇이냐?"
"달력이라고 합니다."
"달력?"
"지금 쓰고 있는 평기법(平氣法)보다는 서양에서 쓰는 역법이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들어 봤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효종은 원에게 받은 달력을 한 장씩 넘기며 신기해했다.
책처럼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달력처럼 격자로 되어 있었던 거였다.
"한눈에 쏙 들어오는구나."
"네, 아버지. 그래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달력도 따로 만들었습니다."
"나누어 주다니? 돈이 많이 들 터인데. 어디 그것도 한번 보자."
원은 둘둘 말려있는 한 장짜리 달력을 효종에게 넘겼다.
달력을 펴본 효종은 의아한 듯 물었다.
"제일 위에 쓰여 있는 '3983'이란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 거이냐?"
"우리 조선인의 원류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이 탄생한 연도입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기록을 찾아내 계산했습니다."
"오호! 우리 조선인의 역사가 4천 년이나 되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따라서 돈이 들더라도 백성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줄 생각입니다."
"장하구나.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부자는 서로를 바라보면 밝게 미소 지었다.
원래 부자 관계란 생물학적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자식들을 사랑하는 효종이어서 그런지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효종이 다시 물었다.
"목금화수토라···, 오행을 따른 것이냐?"
"그렇습니다. 금이 목을 이기고 ······ 목이 토를 이기니 순서에 맞춰서 요일을 정했습니다."
"요일이라···. 하면, 이 동그라미 쳐진 것은 또 무엇이냐?"
"그것은 휴일을 표시한 것입니다. 사람도 쉬어야 힘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순휴일(旬休日)을 말하는 것이더냐?"
"네, 아버지. 관청이 쉬는데 백성도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표기해 놓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관청은 매월 '순휴'라 부르며 10일마다 한 번씩 휴무했다.
그런데 30일이 없는 달도 있기에 요일을 정해서 쉬는 것으로 표기해 놓았다.
'아직은 5일마다 쉬는 건 힘들지.'
처음부터 한 달을 30일 또는 31일로 구성하고 싶었지만, 원은 왕이 아니었고, 백성들도 혼란이 생길 수 있기에 당분간 쓰던 대로 만들어 배포하기로 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휴일이란 개념이 없기에 원은 2주에 한 번씩 쉬는 것으로 만들었다.
"휴일이 있어야 상업이 발달하고 이 나라 조선이 더욱 부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청이 쉬는 날에 맞춰 휴일을 정했으면 합니다."
"관청이 쉬는 날을 장날로 할 생각이더냐?"
"네, 아버지. 그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원과 자주 대화를 나누어서인지 효종은 원이 원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알겠다. 대신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마."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건국 이후부터 피가 난무했던 조선의 왕실.
효종은 사대부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 원이 강한 무력을 보유함에도 시기하지 않았다.
효종의 꿈은 청을 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부자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 * *
얼어붙은 한강을 깨고 교각(橋脚)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규군인 훈련도감 병사들이 조심스레 얼음 위에 놓인 나무판을 거닐며 표시된 곳에 흙을 퍼부었다.
"아니, 다리를 만든다는데 흙으로 만들면 다 쓸려가 버릴 것인데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 따지지 말게나."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렇지."
"어허! 별도로 보수를 챙겨주고 잘만 만들면 포상금도 준다는데 웬 말이 그리 많은가? 어서 일이나 하게."
병사는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흙을 날라 흐르는 강물을 막고 있는 나무 울타리 속으로 퍼부었다.
"그런데 비리를 저지르면 참수한다는데 정말일까?"
"모르지. 하지만 본보기로 잘리는 놈은 있지 않겠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니 빨리 끝내고 좀 쉬세."
원은 효종의 충고를 듣고 포상과 참수라는 말로 병사들의 의욕을 고취(鼓吹)시켰다.
말단 병사야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방납부터 비리를 맛본 군관들이 그냥 넘길 일은 만무했다.
하지만 발각되면 지위에 상관없이 바로 목을 쳐버린다고 하자, 아직 허튼수작을 부리는 이는 없었다.
행식이와 미순이를 데리고 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원은 다리 설계 도면을 보며 말했다.
"늦어도 장마가 오기 전까지 교각(橋脚)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올해 안에 다리를 완공할 수 있다."
"지금 상태면 차질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
"그래도 모르니 행식이 네가 자주 와서 살펴보거라."
"네, 사장님. 그런데 교각을 저리 크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행식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넓은 교각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나중에 가운데로 철도도 놓을 계획이다."
"철도라면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기차가 다니는 길 아닙니까? 벌써 기차를 개발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미리 넓게 만들어 놓으면 좋은 것 아니냐?"
"아···."
뭔지 모르지만, 사장님 말씀은 무조건 맞다고 생각한 행식이가 감탄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미순이가 끼어들었다.
"행식님, 처음 하는 일이라 어찌 될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경강의 물살이 장마철이 되면 엄청나게 불어나잖습니까?"
"아···. 혹시라도 무너질 걸 예상한 거로구나."
다른 아이들과 달리 행식이는 행정에 관해서는 비상했지만, 과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순이는 정정을 해주려다 말고 그냥 다른 말을 꺼냈다.
행식이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나이가 많아서 상대하기 어려웠다.
"행식님, 나중에 다리가 완공되면 밤에 꼭 놀러 와 보세요. 장관일 겁니다."
"그래? 그런데 밤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뭔가 알고 있는 미순이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 * *
청나라의 황제나 다름없는 도르곤은 끝내 참지 못했다.
팔기의 수장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큰소리를 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소. 당장 조선을 쳐야만 합니다."
"하지만 조선전력공사 놈들을 이길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자는 말입니까? 조선전력공사 놈들이 남명에 총과 화약을 판다는 것이 확인됐는데도요?"
"그건 알지만···."
꼬리가 길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갤 선을 이용해 남명에 무기를 수출하고 쌀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들통이 났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압록강 전투와 심양을 공격당했던 당시의 상황분석이 끝났기 때문이다.
결과를 확인한 청나라 황족과 대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왜 그냥 돌아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병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서양에서 수석총을 사들이고 장인들을 득달해서 홍이포를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서양의 수석총은 남명의 수석총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조선전력공사에서 강철도 아닌 무쇠를 대충 깎아 만든 수석총이 훨씬 더 좋았던 거다.
물론 오래 쓰지는 못했다.
탄소가 많이 포함된 무쇠라 사용하다 보면 쉽게 금이 갔고 계속 쓰다 보면 터져 버렸다.
그래서 남명은 끊임없이 총과 화약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 한인팔기와 남명군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두 거대한 세력의 전투는 서양 세력과 조선에 큰 이익을 안겨줬다.
원역사와 다르게 남명을 멸망시키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청나라.
화북(華北)이라는 거대한 곡창지대가 없었다면 벌써 망해버렸을지도 몰랐다.
도르곤은 이대로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팔기의 수장들을 다그쳤다.
"남명은 한인팔기에 맡기고 우리 만주팔기와 몽골팔기가 조선을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야 알지만···."
"아시면서 그러는 겁니까?"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럼 이대로 있자는 말이요? 조선이 더 커버리기 전에 쳐야만 합니다."
도르곤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만큼 신의주와 심양에서 벌어진 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신을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화해(和諧)하자는 뜻입니까?"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무엇을 가지고요?"
"만주를 주면 어떻겠소?"
"뭐! 뭐라고 하셨소?"
"산해관 이북을 전부 넘기는 조건이라면 조선도 받아들일 것 같은데···."
도르곤은 화가 끝까지 치밀었는지 이를 드러낸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원래 불같은 성격이었던 도르곤.
끝내 참지 못하고 칼을 빼 들어 바로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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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옹진반도>
<지도-옹진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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