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47화 (47/275)

47. 내부 정리(5)

아직 조선 왕조는 신분직역제(身分職役制)를 포기하지 않았다.

원 또한 신분제에 관해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여자와 아이는 사람 취급도 안 했던 조선 시대.

신분에 따른 권리와 의무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기에 성인 남자는 원칙적으로 속처(屬處)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원은 징병제로 백성들을 교육하고 훈련 시킨다는 구실로 신분제의 비율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양반(兩班)의 구성비를 바꿔 버려야 해.'

원이 파악한 조선에서 양반은.

최상급 사회계급이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담을 쌓은 이기주의 집단이었다.

물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참 선비들도 많았지만, 비율을 따지면 비교할 수 없었다.

북쪽과 남쪽 방어선을 확보하고 난 원은 나름대로 조선의 법과 제도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원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문식이가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건데···.'

조선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기에 이럴 때마다 문식이가 그리웠다.

어릴 때 청나라 심양에서 살다 온 원은 조선의 군역에 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양반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단 말이지···.'

조선은 징병제와 비슷한 양인 개병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신분을 나누는 법도 양인, 중인, 상민, 노비로 나누는 반상제가 아니었다.

간단하게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으로 나누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래서 천민이 아닌 양인은 누구라도 과거 시험을 봐서 관료가 될 수 있었고,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또한 아무나 양반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이라 말하는 양반은 법적으로 문⋅무 6품 이상 관원을 배출한 가문의 후손 및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한 이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 법제화되었다.

따라서 4대조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양반의 지위를 잃게 된다.

'5급 이상 공무원을 배출하지 못하면 그 후손은 더는 양반이 아니구나.'

그래서였다.

조선의 사대부와 양반들이 죽어라 성리학만 숭상했던 이유가.

'시험 과목이 문제였군.'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조선 발전을 위해 테크트리만 구상했던 원의 판단으로는 공무원 시험 과목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은 존경받아야 해. 하지만 유학만 공부해서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없어.'

과거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양반이 되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병역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조선의 법은 양인이라면 누구나 군역(軍役)의 의무가 있었기에 양반도 군역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양반이나 돈 많은 지주는 기발한 방법으로 자식들의 병역을 빼버렸다.

양반들은 자식들이 공부에만 전념하게 하려고 병역을 기피할 곳에 입학시키고, 돈이 많다면 대리를 보내거나 뇌물로 적당히 처리했다.

아무튼 조선 전기부터 양반들은 합법적으로 군역을 피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군역을 피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하거나.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향안에 오를 수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서원에 적을 둘 수만 있다면 군역을 면할 수 있었다.

재지사족은 지방에 거주하는 품계를 가진 양반들을 말한다.

따라서 6품 이상 관료의 수가 늘지 않으면 양반의 수도 늘지 않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후손이 없는데도 양반은 계속 늘어났다.

꼼수를 썼던 거다.

법적으로 친가 또는 외가 한쪽이라도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될 수 있기에 혼인으로 해결했다.

그것도 가문이 나서서 주도했으니 갈수록 양반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친가로 한정해야 해. 아니 신분제를 폐지하든지.’

신분제가 존속하는 한 국가에서 가용한 인적자원이 부족하게 된다.

따라서 신분제를 폐지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은 이번 기회에 경국대전을 모조리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조선에서 16~59세 사이의 양인 남성은 특별한 질병이나 다른 노역에 동원되지 않는 한 누구나 군역의 의무가 있다.

그런데.

성균관 200명.

한양 교육기관 400명.

지방 서원 14,950명.

총 15,550명이나 되는 유생들은 군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식을 성균관이나 서원에 입학시키려고 온갖 비리가 난무했다.

'21세기나 지금이나 교육이 문제였군.'

효종이 서원 철폐를 명하자 조선 팔도가 난리 났던 이유도 바로 교육이 문제였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양반이 될 수 없었고, 군역을 지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병역을 피할 수 있는 서원은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서원을 철폐해버렸으니···.'

군역은 양인이 진다는 의미에서 양역(良役)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양인인 양반도 군역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서원이 사라졌으니, 피할 곳이 없어졌네.'

물론 성균관이나 서원에 소속되지 않은 채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한량(閑良)이라 불렀다.

'군대 갔다 왔는데도 한남(閑男)이라 부르면 안 되는 거네.'

아무튼 양반도 군역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원은 오래간만에 활짝 웃었다.

'니들은 다 죽었어!'

왕족과 공신의 자손들도 문제였다.

족친위, 충의위, 충찬위라는 특별 당나라 부대를 편성하여 이들의 군역을 편하게 해줬다.

'나라에서 비리를 조장했던 거였군.'

특수 정예군이나 다름없는 사관학교 같은 갑사(甲士)나 별시위(別侍衛) 무관직 선발에도 대리 시험이 난무했다.

원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대 왕이었던 선조들의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사대부의 견제를 뿌리치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강한 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사대부들이 문제였어. 지들이 세운 나라를 지들이 망치고 있었던 거였네.'

대리 시험을 봐서라도 갑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갑사의 혜택이 좋아서였다.

합격만 하면 5품~8품 직급에 토지와 녹봉을 주었고, 퇴역하면 종4품에 해당하는 다른 관직으로 이동도 가능했다.

갑사는 쉽게 양반이 될 수 있는 코스였다.

이러니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갑사가 되려고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

그런데 갑사의 특권이 축소되자 이제는 정원조차 채우기 힘들어졌다.

이 때문에 1594년 유성룡은 상소를 올렸다.

'경국대전에서 갑사의 정원을 14,800명으로 정해 놓았지만 현재 인원은 4,640명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장부상에만 등록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동원하기도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임진왜란을 막아낸 것도 기적이었네. 이순신 장군께서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원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사대부부터 양반까지 군역을 지기 싫어하니 백성들 또한 당연히 따라 헸다.

'21세기에도 병역과 교육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원이 단순하게 생각한 서원 철폐와 징병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요즘도 공주들에게 한글 편지를 써 보내는 딸 바보 아빠 효종이 아니었다면 시행은커녕 호통을 들었을 일이다.

지기로 생각하는 아들 원의 말을 믿고 과감히 명을 내린 효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사셔야 해.'

원은 쉽게만 보고 서원 철폐를 요청했고 효종은 바로 들어 주었다.

비록 살아온 세월은 효종보다 길었지만,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효종 또한 착각한 거였다.

원은 몰랐지만, 효종은 원이 이런 문제를 다 알고 있고 대책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서원 철폐를 명 했다.

아무튼 징병제 내용을 알게 된 백성들은 크게 찬성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요구했던 조선 시대.

16~59세 동안 16개월마다 2개월씩 군역이 아니면 노역을 해야만 했던 양인들.

군장 또는 말까지 전부 준비해야만 했다.

그런데 1년도 아닌 10개월.

그것도 평생에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하니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원에 자식들을 보낼 수 있었던 기득권 양반들은 따를 수가 없었다.

성균관이나 서원에 등록만 하면 군역을 면제받았다.

고강(考講)이라는 정기적인 시험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줄을 동원하여 청탁과 뇌물이면 탈락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원이 철폐되면 이마저도 못하고 군역을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는지 말도 안 되는 상소가 올라왔다.

'전하, 이 나라 조선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사대부의 힘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들어 양인은 물론 천인과 똑같이 군역을 받게 한다면 그 원망의 소리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부디 현명한 군주라면 서원 철폐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효종을 폐하라 칭하지 않고 전하라 부르는 이들.

원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 혼자 욕먹고 말지 후손들이 눈치 보며 사는 꼴은 볼 수 없어!’

후세에 비난과 욕을 먹더라도 해야만 한다고 원은 다짐했다.

"쌍년아."

"네, 사장님."

"양순이가 말한 대로 처리하거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어느새 양순이도 물이 들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회의 중에 꺼낸 말은 충격이었다.

'사장님, 생화학 연구소에서 개구리를 마취할 때 쓰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떨까요?'

드디어 은동리 서쪽 깊숙한 곳에 생화학 연구소가 완공되었다.

담당으로 배정된 양순이가 수시로 찾아가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클로로포름(Chloroform, CHCL3).

영화에서 손수건에 묻혀 입을 막고 납치할 때 쓰는 바로 그것이다.

클로로포름은 탄소와 염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이다.

눌어붙지 않는 테프론이나 냉매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1847년에 공개되었고, 크림 전쟁에서 마취제로 썼다.

1850년에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왕자를 낳을 때도 사용했다.

1960년대까지 클로로포름은 식품에도 널리 쓰였다.

21세기에서도 값이 싸고 환각 작용을 일으키지 않기에 개구리 해부 실습을 할 때 쓰고 있다.

하지만 깊이 들이마시면 조용히 가버린다.

영원히.

그날 이후.

효종을 폐하로 인정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극렬히 반대하던 사림(士林)의 거두들이 영면(永眠)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온갖 못된 짓과 부를 축적하던 가문에서 줄줄이 초상이 나자 백성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서도 거들먹거릴 수 있을지 내기까지 했다.

물론 내기는 성립되지 않았다.

* * *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

남한산성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했습니다. 교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교육을 성실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반항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이곳에서 나가게만 해주신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창살 너머로 그 누구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안주와 천안에 있는 조선 신병 훈련소.

그곳에 양반의 자제는 물론 왕족도 있었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하얀색 폴리프로필렌 실과 검은색 면실을 섞어 만든 군복을 입고 오(伍)와 열(列)을 맞춰 제식훈련을 하는 조선의 신병들.

힘차게 군가를 불렀다.

10월 1일, 입대 첫날부터 문제가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으로 보내 버렸다.

그 누구도 열외는 없었다.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번 발을 디디고 성실히 교육을 받겠다는 지장을 찍는 순간 그들은 모두 조선의 신병이 되었다.

게 중에 지장을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즉시 돌아가라고 쫓아버렸다.

그리고.

'당신들은 앞으로 나라에서 만든 도로를 이용할 수 없으며 조선은행과 거래 또한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이 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했기에 나라에서도 백성 취급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완전 또라이 말고는 거의 다 지장을 찍었다.

마을 길조차 나라 땅인데 이용할 수 없다면 집안에만 있으란 말과 같았으니, 군역을 지지 않는다면 평생 갇혀 살던지 벌금을 내거나 노역을 해야만 한다.

입대 후에도 말이 많았다.

왕족이면 몰라도 웬만한 양반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보다 깔끔한 숙소를 보고 놀랐다.

하지만 양인이면 몰라도 노비랑 한곳에서 지낼 수 없다고 지랄을 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출신 교관들은 왕족이니 양반이니 거들먹거리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바로 남한산성으로 보내버렸다.

구타는 없었다.

백령도에서 훈련을 받을 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배운 대로 따라 하는 법.

원은 처음부터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 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함께 밥을 먹으면 가족이다. 식구란 말이다. 그러니 구타는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장님.'

'얼차려나 혼자 있게 둬라. 그러면 정신 차릴 거다.'

'그래도 안 되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럼 경비대원이 될 자격이 없는 자다. 그런 자는 염전으로 보내라.'

남한산성에서 다시 돌아온 이들은 그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반항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갔다.

'남한산성이 어떤 곳이냐' 묻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가보면 알아."

이 말뿐이었다.

"오늘 교육을 성실히 수행한 제군들에게 특별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와~~~!"""

신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없는 조선 중기.

특별식이란 말만 들어도 침이 입안에 고였다.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말하라. 18128번 올빼미."

"오늘 특별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탕수육이다."

"""와~~~!"""

기름에 튀긴 음식을 싫어하는 신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배탈이나 고생했지만, 젊어서 그런지 금방 적응했다.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값싼 식용유가 조선전력공사 판매대에 올랐다.

그리고 훈련소에서도 배급되었다.

군납 비리 같은 건 없었다.

생계형 비리도 없었다.

현재 신병 훈련소는 지휘관부터 교관까지 모두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은 다른 고민이 있었다.

"쌍식아,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보내 버리죠?"

"어디로 말이냐?"

"경강(京江)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잘할 것 같은데요."

"그러다 부실 공사라도 생기면 큰일 난다."

"그걸 노리는 거죠."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는 쌍식이를 본 원은 마음이 착잡했다.

'못된 것은 빨리도 배우는구나.'

하지만 못된 짓도 맞들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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