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41화 (41/275)

41. 남쪽 방어(4)

삼엄한 금군(禁軍)들의 호위 속에 나타난 효종.

뚜벅뚜벅 유생들 앞으로 걸어갔다.

"""전하!"""

"""폐하!"""

유생들과 선비들이 외치는 소리와 백성들이 부르는 소리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유생 대표 앞에 선 효종.

뒷짐을 지자 단단한 어깨 근육이 더욱 돋보였다.

"네가 이 시위의 주동자더냐?"

"전하! 시위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전하께서 유학을 멀리하시어 근본을 잊으실까 두려워 나선 것입니다."

효종은 씩 웃더니 손을 들어 입문 옆에 적혀있는 벽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적혀있는 법령에 따르면 너희들은 불법 시위대다. 읽어 보지 않았던 게냐?"

"네?"

고개를 번쩍 든 유생 대표.

큰 글씨로 적혀있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언문과 비슷했지만, 언문은 천한 글이라 배우려 하지 않았고, 알고 있던 언문과 달리 가로쓰기 한글이라 읽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 저 글은 언문이 아니 옵니까?"

"언문이라니! 저 문자는 선대왕이신 세종께서 창조하신 우리만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개선해서 만든 한글이다. 그런데 언문이라니. 우리글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저따위 언문은 아녀자들이나···."

"네, 이놈! 저따위라니 선대왕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문자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효종의 다그침에 유생 대표는 당황했다.

조선에서 선대왕을 모욕하는 죄는 멸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무엇이더냐?"

"그, 그게···. 조선은 성리학을 따르는 선비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성리학은 한자로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한자를 버리시고 언···."

"이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구나. 우리 백성들의 말을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한글을 놔두고 한문을 추종하다니. 그러면서 나라의 관원이 되겠다는 말이냐?"

효종의 다그침에도 유생 대표는 굽히지 않았다.

성균관은 조선에서 최고의 학부이다.

그런 곳에서 유생의 대표로 나섰기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찌 성인들의 말씀을 담은 한문을 두고 한글을 쓰신단 말씀입니까?"

효종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너는 삼배나 입지 비단은 왜 걸쳤느냐?"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이라 그런지 참으로 한심하구나."

얼떨결에 효종의 입에서 원이 한글을 설명하면서 비유를 들었던 말이 튀어나왔다.

"네?"

"새로 좋은 것이 있는데도 옛것만 좋다고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는 말이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다. 한자를 모르는 여진족이 네가 숭상하는 명을 멸망시켰다. 우리 조선 또한 그런 일을 겪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변함이 없다면 우매한 자일 뿐이다."

"전하! 비유가 적절치 않습니다. 옛것은 소중하기에 지켜야 하옵니다."

유생 대표가 따지듯이 말하자 효종은 바로 물었다.

“정괘(鼎卦)라는 말을 아느냐?”

“어찌 모르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면모(面貌)를 일신(一新)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맞다. 새로운 고기를 삶기 위해서는 솥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우리 조선 또한 새롭게 나가기 위해서는 잘못된 찌꺼기를 제거해야만 한다.”

“전하!”

"이놈!"

효종의 고함에 유생 대표는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전하라니? 계속 전하라 나를 부르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네놈은 이 나라 조선이 자립하는 꼴을 보기가 싫은 게 아니냐?"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데 전하라니. 나를 폐하가 아닌 전하라 부르는 것은 아직도 사대를 하겠다는 뜻이 아니더냐?"

"전하!"

입에 익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사대를 버리지 못한 건지 유생 대표의 입에서 또 '전하'란 말이 나오자 효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 잘 들어라. 선대왕이신 인조 대왕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나라 조선은 그 어떤 나라도 섬기지 않은 자립국이라고 천명하셨다. 그런데도 짐에게 전하라 부르는 것은 선대왕의 유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임이 틀림없다. 그런 자는 내가 통치하는 조선에 필요가 없다. 그러니 너희들이 섬기는 나라로 모두 떠나거라. 말리지 않겠다."

효종의 외침에 유생들과 선비들은 침묵했지만, 백성들은 아니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아무리 밑바닥에 산다고 하여도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조선 백성들의 자부심은 한없이 커진 상태였다.

물론 선식이가 이끄는 조선전력공사 공연단의 선동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인 효종이 당당하게 자립국임을 다시 한번 선언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임이 틀림없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그래서 힘들고, 사람을 선동하기에는 그래서 쉬웠다.

"그동안 우리 조선은 너무 갇혀 살았다. 한마디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그러다 보니 나라 꼴이 엉망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4번에 걸쳐 외란을 겪었고 그때마다 백성들의 삶은 힘들어져만 갔다."

-쿵!

효종은 발굽으로 돌바닥을 내리찍은 후 말을 이었다.

원과 의견을 나누면서 선동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이고, 모두가 좋은 환경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앞으로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것이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큰 집을 짓고 살아도 된다. 근검하고 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다면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써라! 그것이 바로 이 나라 조선을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백성들은 마음에 와닿는 효종의 말을 듣자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외쳤다.

그 어떤 왕이나 양반들이 백성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그래서인지 감격에 겨운 백성 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단,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모략(謀略)이나 노략질로 부를 쌓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백성들의 함성이 가라앉자 효종은 유생 대표에게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네가 원하는 조선은 무엇이더냐? 너희들만 잘 먹고 잘사는 조선이더냐?"

"아, 아닙니다. 폐하. 소생은 절대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하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곳에 나와서 시위를 하는 이유는 뭐란 말이냐?"

"그, 그게···."

유생 대표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누군가 자기들에게 나셔야 한다고 꼬드겼다는 말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효종은 유생들과 선비들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조선의 좋은 문자를 놔두고 배우기 어렵고 조선말과 맞지도 않는 한자로 문장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는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의 관료가 될 수 없다."

"폐하! 하지만 성리학은 만물의 근원이옵니다. 어찌 성리학을 배우지 않고 나라를 이끌 수 있단 말입니까?"

"흥! 성리학은 불교와 같은 종교나 다름없다. 좋은 말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이상을 꿈꾸는 유학만으로 복잡한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는 할 수 없다. 또한 성리학이 처음 태동한 대륙에서도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 좋은 유학을 배우고 익히면서 상대를 모략하고 제거하는 일에만 쓴다는 말이냐?"

"그, 그것은···."

성리학에서 나오는 고사를 들먹이며 사화를 일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유생 대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 유학은 유교(儒敎)라 부르겠다. 불교(佛敎, Buddhism)와 같은 종교란 뜻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자유지만, 더는 이 나라 조선에서 관료를 선발하는 기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成均館)의 교육과정을 새로 정비할 것이며 서원(書院) 또한 철폐(撤廢)할 것이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서원을 철폐하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통촉(洞燭)하여 주시옵소서."""

"싫다면 이 나라 조선을 떠나라! 말리지 않겠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효종의 말을 따를 수 없었던 유생들과 선비들.

x선비들에게 배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건 바로 단체로 연신 외치는 거였다.

전 같으면 누구 하나 나서서 유학에서 배운 구절을 읊으며 도리를 따졌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자신들이 숭상했던 명나라가 망해 버린 상황이라 유학을 들먹이며 따져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조선 땅에서 학문적으로 최고라 자부하는 성균관유생들.

효종이 한글을 모른다고 한심하다고 했다.

그런 왕에게 유학의 도리는 더는 통하지 않을 듯 보였다.

그저 선대 유생들에게 배운 대로 강짜를 부렸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분위기에서 괜히 나섰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체로 외치면 죽일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만의 군중 심리가 통했는지 외침은 갈수록 커졌다.

"시끄럽다!"

연신 외치는 소리가 듣기 싫은 효종이 멈추라고 했지만, 유생과 선비들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친위대(親衛隊, Royal Guard) 대장이 나섰다.

원래 금군은 호위청(扈衛廳)에서 맡고 있었으나,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친위대로 변경하면서 조직의 체계를 바꿔버렸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이 있던 반정공신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친위 대장은 효종에게 예를 올린 후 배터리에 연결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모두 입을 다물라!

-감히 폐하께서 말씀하시는데 반항이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조선의 사대부며 양반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유생 뒤에 엎드려 있던 선비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전하! 아니 폐하! 현명한 군주라면 소통의 중요성을 아실 겁니다. 독단을 내려놓으십시오. 폐하의 생각만이 올바른 것이 아니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쿵!

다시 발로 돌바닥을 내리찍은 효종이 눈을 부릅뜨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이 독단이란 말이냐? 이는 삼정승과 육조 모두 합의하여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독단이라니. 네놈들의 눈에는 이 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더냐?"

"폐, 폐하.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방문(榜文)을 게재(揭載)하셔야···."

대신들과 합의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들은 선비는 뜻밖이라 생각하며 알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효종은 입문 옆에 붙어있는 벽보를 가리켰다.

"네 눈은 까막눈이더냐? 어찌 선비라는 자가 버젓이 방문을 붙여 놓았는데도 보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것도 이런 대낮에."

"폐하, 저것은···."

"무지한 자로구나. 똑똑한 이라면 하루면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읽지도 못하다니. 그러면서 네 놈이 조선의 선비라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일부러 효종은 대놓고 선비를 비방했다.

들어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효종은 삼정승과 육조 대신들을 설득하여 앞으로 방문은 한글로 게재하기로 정했다.

발음에 따라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단어가 있다고 따졌지만, 그런 단어는 옆에 한자를 병기(竝記)하기로 했다.

새로운 방문 작성법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원의 명을 받은 행식이가 작성 규칙을 만들어 배포 했기 때문이다.

방문은 세종 때 사헌부에서 요청하여 광화문 밖과 도성, 각 군과 종루 등에 붙여 법령 포고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법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많으니 이를 빠르게 알려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여러 백성에게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은 한글이 우수하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

행식이의 치밀한 준비로 이미 조선의 행정 체계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이제는 모든 관청에서 행정을 처리하는데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처리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따라서 대신들은 더는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 말과 다름없는 한자로 문장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게다가 단체로 사직서를 내고 나가버린 관원들 때문에 행정이 마비될 뻔했다.

인제 와서 그들은 다시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장계 쓰기를 싫어하는 무장들까지 한글을 옹호하고 나서니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포도대장!"

"네, 폐하."

"이들이 알지 못하였다 하나, 주동자까지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주동자는 즉시 연행해 그 배후를 캐도록 하라!"

"네, 폐하."

"추후 이 같은 일이 또 벌이 진다면 그때는 사정을 두지 말고 모두 단호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말을 마친 효종은 돌아서서 궁으로 들어가 버렸다.어차피 이대로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윤휴와 선비들.

모사를 꾸몄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주동자가 잡혀 들어갔으니 자신들이 배후라는 사실은 곧 밝혀질 일.

불안한 마음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각지로 소식을 보내 더 큰 일을 꾸미고자 했다.

편전으로 가는 길에 효종은 잠시 멈추었다.

조선 개혁을 위해 원과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저들을 전부 죽이지 않고서는 빠른 해결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일.

원이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지켜볼 수밖에.

‘지금까지 인내해왔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꽃이 피기 시작한 궁 안을 다시 거닐며 효종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어차피 변화에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생각하셔도 충분합니다.’

원은 사람의 적응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순간에 전 세계가 변했던 일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상황이 무엇인지 알기에 원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남쪽까지 완벽하게 방어를 한 후에 개혁해도 늦지 않습니다.’

효종은 오늘따라 멀리 떨어져 사는 원이 보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개혁이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수없이 많은 말을 나누었지만, 원이 원하는 개혁이 어떤 것인지 효종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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