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37화 (37/275)

37. 자존심과 자신감(4)

첨사(多大浦僉使) 조광원(趙光瑗)은 다대포에서 왜관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광원이 말을 타고 왔다며 왜놈이 시비를 걸었다.

황당한 조광원이 따져 묻자, 왜놈은 자신을 깔본다며 무리를 끌고 와 조광원을 폭행했다.

혼자서는 어찌해볼 수 없자 왜놈 특위의 집단폭행을 한 거였다.

그것도 조선의 땅에서 조선의 관원을.

열을 받은 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 인조를 찾아갔다.

"할바마마, 소손 문안 인사 왔사옵니다."

"그래, 어서 오너라."

"몸은 좀 어떠시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아픈 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얼떨결에 왕위에 올랐던 인조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다.

1623년 능력도 없으면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반정(反正)을 주도했던 서인들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결국 2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인생 최대의 치욕을 당했다.

믿을 것이 없었던 인조는 김자점과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소용 조씨를 총애했다.

소용 조씨가 틈만 나면 소현세자 부부를 모함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끝내 못 할 짓을 벌였다.

자식과 며느리, 손자까지 죽이는 참혹한 일을 한 거다.

소용 조씨가 모함했다지만, 인조에게 똑똑한 아들과 며느리를 질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소용 조씨는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사돈 김자점이 급사하자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런 흔적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김자점과 그 일당이 소현세자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 거였다.

김자점이 죽고 미쳐가는 소용 조씨를 보며 원 역사와 다르게 인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에게 항상 공손하고 예를 다했던 원을 끔찍하게 예뻐하며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이 부탁하면 뭐든지 다 들어줬다.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치욕이었던 삼전도에서 당한 일을 고스란히 갚아 주는 것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할바마마."

"내가 살면서 참으로 못 할 짓을 많이 했구나. 그런데도 너와 같은 손자를 보게 되다니 정말 기쁘구나. 이리 와보거라."

"네, 할바마마."

인조는 원의 손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심정을 구구절절 표현했다.

원은 그 말을 들으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다 털어놓은 인조는 내시 나업을 불렀다.

"대신들에게 전하라. 원이 원하는 일은 바로 과인의 뜻이니 모두 따르도록 하라."

"네, 폐하."

전하가 아닌 폐하라는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 짓던 인조가 원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구나. 내가 무슨 덕이 있어서 너를 손자로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원아, 이 나라 조선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군주(君主)가 없도록 잘 부탁한다."

"할바마마!"

인조는 그 말을 남기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조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가장 시련이 많았던 인조는 27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어떤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주국(自主國)임을 선언했다는 기록이 역사에 남았다.

어찌 보면 원 때문에 가장 덕을 본 이는 바로 인조였다.

후세에 쫄보, 찌질이, 자식과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자, 런도 못한 조 등등 악평이 자자했던 인조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원이 별다른 의미 없이 빨리 죽여버리는 것이 좋다고 결론지은 김자점과 그 일당들의 죽음이 나비가 되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 * *

이제 조선의 제17대 왕이 된 효종.

제일 먼저 개각을 단행했다.

좌의정 이경석을 영의정으로 우의정 정태화를 좌의정으로 상정하고, 예조판서 김육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효종은 원 역사와 다르게 정치적 기반을 생각해서 대신들을 기용하지 않았다.

성품이 바르고 진정 조선을 위해 노력했던 대신들을 최측근으로 두었다.

이에 반기를 품은 중신들.

단체로 사직서를 냈지만, 즉시 처리해버렸다.

효종이 그동안 원과 나누었던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로 다짐했던 일의 시작점이었다.

"폐하께서 앞으로 조선을 업신여기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그랬다는구먼. 모화관(慕華館)도 싹 뜯어고친다고 하더라고."

"그래?"

"청나라 사신들을 위해 꾸몄는데 이번에 조선의 양식으로 전부 바꾼다고 하더구먼."

"돈을 많이 들건대 왜 바꿔, 그냥 쓰면 되는데."

"생각해보더라고, 자네 집 사랑방을 내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꾸몄는가?"

"그건 아니지."

친구의 말을 듣던 백성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누가 자기 집을 꾸미는데 손님 취향에 맞게 한단 말인가.

"앞으로 사대할 일이 없는데 남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거지. 우리 조선이 자립국을 선언했으니 우리 것을 당당히 보여주겠다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은데···."

"그까짓 돈이 문젠가 백성들의 자존심이 문제지. 그리고 세손···, 뭐라 해야 하나? 아무튼 마마께서 비용을 다 내신다고 하셨다네."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상도 부산포에도 소문이 퍼져나갔다.

"아, 맞나?"

"뭐가?"

"다대포에 있는 왜관을 다 뽀사뿐다 카던데···."

"와?"

"니는 모르나? 왜놈이 우리 관리를 폭행했다 아니가."

"그건 알제."

"그래서 다 쫓아 뿌리고 폐쇄한다 안 카나."

"진짜가?"

"맞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대마도에서 차왜(差倭) 등지승(藤智繩)을 파견했다.

"무식한 놈들이 모르고 한 일입니다. 이것 받으시고 그냥 넘기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국이 어느 때인데 이러십니까?"

"제발 주상 전하···."

"이보시오! 주상 전하라니. 어찌 그리 눈치가 없소?"

"죄송합니다. 폐하를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등지승은 잘못을 시인하며 죄를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래라면 별차(別差)를 잡아들이고, 나라를 욕되게 했다고 조광원에게 죄를 물었으며, 부사(府使) 민응협(閔應協)의 벼슬을 파면했을 거다.

하지만 달랐다.

"도주(島主)께 전하시오. 죄를 범한 놈들을 묶어 당장 보내라고 말이오."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건 알 수 없소."

왜놈들이 조선의 관원을 폭행했다는 말을 들은 효종은 왜관을 봉쇄하고 출입을 완전히 막으라고 명 했다.

전 같으면 파발이 쉬지 않고 달려 명을 전했을 것이지만, 조선전력공사의 무선 통신을 이용해 즉시 전달되었다.

관원들은 전달할 일이 있으면, 조선전력공사 분점에 있는 통신국으로 달려갔다.

때문에 더는 관원들이 헛수작을 할 수 없었다.

전 같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한양에서 알기 전에 먼저 뇌물을 들고 찾아가 무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도입되자 잘못된 일을 범하면 즉시 한양에서 명이 내려왔다.

그러기에 몸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왜관만이라도 보존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직 위에서 결정이 내려오지 않았소. 기다려 보시오. 나도 이제는 손을 쓸 수가 없소이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조선 관료들의 태도에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 왔던 등지승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숨만 쉬었다.

전 같으면 한양까지 가서 임금을 뵙고 사정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포에서 대기하라는 말만 있었다.

또한 무슨 요술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몇 시간만 되면 답변이 바로 내려왔다.

"귀신이 곡 할 노릇이네."

세상이, 아니 조선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자 두려움이 앞섰다.

* * *

평소에도 말이 없던 효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신들의 논쟁이 치열했다.

"지금 대마도를 치자고 했습니까?"

"안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원래 대마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대마도 도주인 소씨(宗氏)가 박쥐 같은 행동을 하니, 더는 두고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건데,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뭐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고 어렵게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한 후 승승장구해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이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사직서를 내면 즉시 수료 되었다.

또한 녹봉(祿俸) 지급도 바로 끊겼다.

일 년에 4번 받는 녹봉.

4번의 외란 이후 나라의 재정이 파탄에 이르자, 녹봉제도 위기를 맞았다.

인조 25년(1647) 그동안 받았던 녹봉제가 개정되었다.

정1품의 경우 쌀 11석, 전미 2석, 콩 4석이 지급됐다.

4품 이하의 관원은 정·종의 구별 없이 녹과가 단일화되어 13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9품의 경우 분기마다 쌀 2석, 콩 1석이었다.

그냥 종 두어 명 거느리며 먹고만 살 정도였다.

원 덕분에 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졌지만, 인조가 아파서 그런지 그동안 변화가 없었다.

또한 원이 주는 술값 정도 되는 뇌물이 있어서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녹봉이 끊긴다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

가진 논 답이 많다면야 상관없겠지만, 아니라면 당장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명종 12년(1557) 녹봉 대신 주었던 수조권(收租權)인 직전법(職田法)이 폐지되면서 관료들 사이에서도 가진 이와 없는 이의 차이는 극명했다.

가진 이도 문제였다.

4번의 외란 이후 망가진 농지를 복구하지 않았다면 농지를 가지고 있어 봐야 손해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 150여만 결이었던 농지는 전쟁 직후 30만 결로 줄어버렸고 아직도 전부 회복되지 않았다.

녹봉은 그렇다 치고, 다른 문제가 또 있었다.

집단으로 사직서를 내면 행정이 마비되기에 반환을 해왔는데 그러지 않았다.

단체로 사직서를 냈는데 행정이 마비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젊은 청년들과 처자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일을 맡아 척척 더 잘해 냈다.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이라 말하는 언문과 처음 보는 숫자로 기재하며 처리하는 속도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러다 보니 전과 같이 사직서를 내기가 두려웠다.

"대감,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찌하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크흠."

똑똑한 자라 그런지 태세 전환이 번개 같았다.

이때 삼정승 중 유일하게 참석하고 있던 김육이 나섰다.

"앞으로 조선의 군 제도는 완전히 개편될 것입니다. 더는 무장이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의 임무는 나라를 방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앞으로 무장은 나라 방위에만 힘을 써야 합니다. 따라서 대마도를 치는 일은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서 맡아 할 예정입니다."

"우상! 이게 무슨 말입니까? 상단의 경비대가 한다니?"

김육은 잠시 효종을 바라보았다.

효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육은 숨을 들이쉰 후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조선의 군사는 타국을 공격하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방어에만 치중한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대마도를 복속하러 보내면 잘 될 것 같습니까? 더구나 병력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박을 하려고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만 했다.

그래야 조선의 사대부 아닌가.

"하지만 상단의 경비대에 일을 맡기다니요. 그건 아니 됩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찌 일개 상단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단 말입니까? 이번 발언은 우상께서 실수하신 겁니다."

때는 이때다 싶은 중신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해됐다.

모두 듣고 난 김육이 다시 한번 효종에게 예를 올린 후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맞습니다."

"시인하시는군요."

김육이 말을 꺼낸 중신을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전혀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북방의 경우 여진족을 고용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되지만, 조선전력공사 경비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바로 폐하의 적장자께서 운영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인조대왕께서도 그랬기에 사병이나 다름없는 경비대를 인정해주셨던 겁니다. 또한 인조대왕의 유언이 있었습니다."

"무, 무슨 유언 말입니까?"

김육이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자, 내시 나업이 효종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감히, 어디라고!"

중신들이 떠들어 댔지만, 나업은 효종에게 예를 올린 후 바로 입을 열었다.

"대왕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원이 원하는 일은 바로 과인의 뜻이니 모두 따르도록 하라’며 저에게 전하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말을 마친 나업은 다시 몸을 돌려 대전을 떠났다.

나업의 강직함을 익히 알고 있기에 중신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입만 쩝쩝거렸다.

이때 효종이 용상에서 일어나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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