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36화 (36/275)

36. 자존심과 자신감(3)

“앞으로 청이나 명을 입에 담는 자는 바로 내칠 것이요!”

세자가 강하게 말했지만, 대신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어찌할지 논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쭈, 이렇게 논다 이거지!'

이 모습을 본 원은 히죽 웃었다.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중신들은 인조를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세자를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물론 책을 잡히면 멸문지화를 당하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당당했다.

4번의 외란을 겪으면서 그만큼 왕권이 떨어졌기도 했지만, 제일 문제는 인조였다.

평소에도 자신들이 인조를 임금으로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자들을 보고도 단호하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세자 따위는 안위에도 없었다.

세자가 조정 실무를 보고 있었지만, 인조가 살아있기에 실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점점 설전이 오가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보다 못한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나섰다.

"너무들 하시는구려."

"무얼 말입니까?"

"세자 전하 앞에서 무슨 망발(妄發)입니까?"

"대감,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망발이라니요?"

"그럼, 이게 망발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비록 인조를 왕위로 추대했던 최명길, 김류, 김자점, 이귀, 신경진 등 공서파(功西派) 대신들이 죽고 없었지만, 그 뒤를 이은 자들이 부리는 세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예로부터 조선은 명을 섬겨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명을 복원하고자 요청하는 말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허허!"

이경석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때 원이 나섰다.

"세자 전하. 소자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 보거라."

원은 세자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 중신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남명의 황제인 주유랑은 내 말을 아주 잘 듣습니다."

"말이 너무 심하오. 원손!"

"무엇이 말입니까?"

"어찌 명나라 황제 존함을 그리 함부로 부른단 말이오?"

"아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또박또박 응답하는 원을 보고 중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인조가 가장 예뻐한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뭐라 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봐도, 대감은 이 조선의 신하이기보단 명의 신하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유랑에게 추천해 드릴까 합니다. 가시겠습니까?"

"뭐, 뭐라고 하시었소?"

"남명에 가셔서 따르시는 황제 주유랑이나 섬기라고 보내드린다고 했습니다. 내 말이면 주유랑은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대감께서는 즉시 남명으로 갈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잘 돌봐 달라는 서신을 써 드리지요."

"이, 이런!"

원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특유의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신들을 보고 말했다.

"누구든지, 명을 섬기고 싶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바로 천거해드리겠습니다. 남명의 황제 주유랑은 내 말이라면 절대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또래보다 크다고 하지만 이제 9살인 원의 말에 복명파 중신들은 서로를 보며 경악과 늘람, 흥분, 분노를 표출했다.

원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청과 화해를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청으로 보내드리겠사오니 그곳에 가셔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청을 멸하러 갈 때까지 말입니다."

화청파 대신들 또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찌그러져다.

원의 말에 분위기가 싹 가라앉자 우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나섰다.

"원손 저하께서 옳으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은 그 누구도 섬기지 않는 자립국으로 나아가시겠다고 대왕께서 뜻을 분명히 밝히었습니다. 따라서 더는 청과 화해를 하자는 말과 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말을 꺼내는 중신들이 있다면 그는 분명 조선의 신하가 아닐 것입니다."

정태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육이 나섰다.

"맞습니다. 청의 홍타이지 아들 쇼서와 사신이 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는데 화청이라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김육은 대신들을 훑어봤다.

좌의정과 우의정 그리고 예조판서까지 나서서 원을 두둔하자 중신들은 감을 잡기 위해 눈치를 봤다.

멀리서도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김육이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또한, 망해 버린 명나라를 이만큼이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원손 저하 덕분입니다. 따라서 명에 할 만큼 했다고 보고 명을 다시 일으키자는 말은 더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게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원손 저하께서 총과 화약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명은 벌써 망하고 흔적도 없었을 겁니다."

"""아···!"""

그제서야 대신들은 원에게 시선을 모았다.

머리 회전이 빠른 자들이라 사태 파악이 빨랐다.

원이 지금까지 행했던 일과 김육의 말을 조합해보니 이해가 되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줄 몰랐다.

대신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원이 가진 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들 또한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매달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 원이기에 인조가 사병이나 다름없는 경비대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일절 반대하지 않았었다.

조선전력공사가 잘 나가야 끊임없이 떡고물이 자신들에게 떨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미 남명까지 지원하여 청나라를 견제하고 있다니, 무서웠다.

아니 두려웠던 거다.

원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단순한 사병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발원지인 심양성을 치고,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팔기군을 무찌르고, 신의주 대첩까지 포함하면 1만 명이 넘는 팔기군을 포로로 잡아 왔다.

원이 너무 어렸기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이 가진 힘은 언제라도 조선을 단숨에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조선전력공사는 한마디로 거대한 전력을 가진 집단이었던 거다.

사태를 파악한 중신들.

옷부터 단정히 하고 공손히 세자와 원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 생각은 누구에게 붙어야 이득이 클지 계산하는 염탐이었지만, 원이 한 다음 말에 결정을 빨리할 수 있었다.

"세자 전하, 소자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라도 필요하시면 불러 주시옵소서. 소자, 전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사옵니다."

"고생이 많았다. 이만 가보도록 하여라."

"네, 세자 전하."

원은 세자에게 깊이 예를 올린 후 중신들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눈치를 보는 이들이 괘씸했다.

이들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원은 한번 피식 웃고 말았다.

원이 떠난 후, 국정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더는 화청이니 복명이니 그따위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세자의 말에 토를 다는 자도 없었다.

이제 실세가 누구이고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정확히 깨달은 거였다.

원은 전날 아버지와 김육, 이경석, 정태화와 만나 앞으로 군을 어떻게 운영할지 논의했다.

그리고 모두 원이 내놓은 의견에 찬성하였다.

원이 가진 무력의 실체를 알게 된 좌의정 이경석, 우의정 정태와, 예조판서 김육.

세 사람은 앞으로 조선의 앞날이 찬란하기를 기원하며 세자와 원에게 충심을 다하여 보필하기로 결의했다.

* * *

인조 27년(1649) 음력 2월 18일.

인조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인정전(仁政殿)에 행차하여 원손(元孫)인 원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다.

강서원(講書院)에서 세손을 칭할 명호와 본원을 자칭하는 호칭을 물었지만, 이미 자주국임을 천명한 후라 각하(閣下)가 아닌 저하(邸下)라 칭하기로 정했다.

이로써 원은 정식으로 세손 저하가 되었다.

* * *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인 예친왕 도르곤.

청나라 제3대 황제 순치제의 아버지란 뜻인 황부를 자칭했다.

야심이 큰 도르곤은 1643년 홍타이지가 죽고 황제에 오르려 했지만, 정친왕 지르갈랑과 숙무친왕(肅武親王) 호오거의 견제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계략으로 호오거의 작위를 박탈시키고 옥중에서 죽게 한 후 순치제를 단독으로 섭정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또한 여진족의 관례인 형사취수(兄死娶嫂)를 신봉했는지,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홍타이지의 부인인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북경에서 떠돌았다.

이제 38살인 도르곤은 사실상 청나라 황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순치제가 있는데도 직접 사신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였느냐? 다시 말해 보거라."

"먼저 팔기군이 조선전력공사의 신의주 분점을 쳐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전력공사 경비대가 응징하려고 심양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사실이더냐?"

"네, 쇼서 친왕께서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친왕께서는 모르셨던 일이고, 단지 구사 3명이 꾸민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도르곤은 순간 당황했다.

조선이란 나라를 쳐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개 상단을 약탈하러 간 것은 청나라의 정예인 팔기군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북경을 점령하고 명을 멸망시킨 후, 청나라 팔기군의 기강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하다니, 괘씸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있었다.

유목민족인 여진족은 원래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군도 아닌 일개 상단의 경비대가 팔기군을 무찌르고 심양을 털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끊임없이 조선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기에 조선군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 상단의 경비대가 조선군의 전력을 능가하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신을 조선에 급파한 후 돌아오는 동안 심양에서 일어난 일을 분석했다.

그런데 모두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댔다.

홍이포보다 멀리 날아가는 포를 수도 없이 발사했다느니.

화약과 총알을 장전하지도 않고 연속해서 쏘았다느니.

길쭉한 통에 달린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주위가 무너져 내렸다느니.

믿기 어려운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더욱 경악할 것은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자들이 다름 아닌 일개 상단의 경비대라는 말이었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쇼서는 지금 어디 있느냐?"

"오는 동안 힘들었는지 몸살이 나서 처소에 누워 있다고 합니다."

"크흠. 낫는 대로 바로 입궐 하라고 전해라."

"네, 전하."

도르곤은 즉시 팔기의 수장들을 불러 모았다.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청나라의 발원지나 다름없는 심양성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그 무력이 두렵기는 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도 아니고 일개 상단의 경비대에게 당했다는 분노가 더 컸다.

* * *

세손 책봉을 마치고 은동리로 돌아온 원에게 큰 희소식이 안겨졌다.

"정말 너희들이 개선했단 말이냐?"

"네, 사장님. 미순이가 계산해 준 것을 토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장하구나."

증기터빈을 만들어 낸 갑순이와 동식이는 그대로 만족하지 않았다.

더 효율이 좋은 터빈을 만들기 위해 수시로 원을 찾아와 묻고 개선해 나갔다.

원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며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결국 증기 또한 물과 같은 거다. 따라서 한정된 수량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병목현상을 이용하면 되나요?'

'그렇지. 같은 양의 기체나 유체라도 좁은 통로를 통과할 때는 속도가 빨라지지.'

'그렇다고 날개를 길게 만들 수는 없는 건 아닌가요?'

'날개를 연속해서 여러 개 달면 되지 않을까?.'

'해봤는데 잘 안 됐어요.'

연구원들은 풍부한 지원이 있기에 항상 먼저 실험해보고 나서 풀리지 않을 때만 원에게 물었다.

'음···, 중간마다 고정 날개를 달면 어떨까? 그러면 고정 날개에서 힘을 다시 받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갑순이와 동식이.

원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자.

'아, 그런 방법이 있겠네요. 역시 사장님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과학자이심이 틀림없으십니다.'

이제 제법 커버린 연구원들에게 세종대왕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첫 번째 과학자였다.

왜냐하면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드신 분이니까.

쉽게 배우고 쉽게 뜻을 전달할 수 있는 한글이 있었기에 연구원들은 기록을 남기며 문제점을 계속 개선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서양 문자인 알파벳도 사용했다.

한글로 기호를 남기는 것보다 알파벳이 더 명확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던 아이들이라 그런지 새로운 것에 저항이 전혀 없었다.

처음 옹진반도로 들어왔던 사람들.

그들에게 머리를 빡빡 깎으라고 했을 때도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청나라에서 생활했던 아이들은 되려 좋아했다.

긴 머리카락을 묶는 것 자체가 너무 곤혹스러웠던 거였다.

게다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벌레가 머릿속에 산다는 것을 알자 아예 빡빡 밀어 달라고 떼를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은근슬쩍 머리를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원은 그것을 보고 뭐라 하지 말라고 했다.

'위생 때문이니 관리만 잘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이제 옹진반도에서는 위생에 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에 현미경이 있기에 볼 수 없었던 벌레들을 눈으로 확인한 아이들.

기겁하고 집에 돌아가서 부모에게 어린아이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해 댔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병을 옮긴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원이 연구원들과 새로운 증기터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싸장님!"

쌍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뭔 일이냐?"

"왜놈들이···."

급히 뛰어와서 그런지 쌍식이가 헉헉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놈들이 왜?"

뒤따라 들어온 쌍년이가 대신 말했다.

"우리 조선 관원을 폭행했다고 합니다."

“뭐?"

갑순이와 동식이도 놀랐는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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