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자존심과 자신감(2)
청계천을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온 인조의 행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삼전도(三田渡)에 도착했다.
세자와 원은 인조가 타고 있는 가교 앞으로 뛰어가 예를 올렸다.
“전하,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추운 날씨에 이곳까지 오느라 옥체에 조그마한 흠결(欠缺)이라도 생길지 염려되옵니다.”
“세자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과인은 괜찮으니 염려 놓도록 하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세자에 이어 원이 입을 열었다.
"전하, 어서 오십시오. 소손 아침부터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고맙구나. 내 이런 날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다 원손 덕분이다."
원의 인사를 받은 인조는 손자를 보는 평범한 노인처럼 환하게 웃으며 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몸이 불편한 인조를 위해 원은 단상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가마꾼들이 가교를 들고 18계단 위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해 놓은 틀 위에 가교를 내려놓았다.
가교의 앞면이 열리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외쳤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동안 인조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백성들까지 진심으로 천세를 소리쳐 외쳤다.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원에게 있었다.
지금까지 왕이나 사대부라 말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착취만 해 갔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원손이자 조선전력공사의 수장인 원은 달랐다.
무엇을 해준다고 말한 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소문으로 듣거나 직접 경험해 봤기에 누가 자신들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선식이의 재밌는 만담 속에 포함되어있는 선동의 영향도 컸다.
-원수나 다름없는 청나라 놈들을 누가 물리쳤는가.
-무섭기만 했던 청나라 팔기군이 족쇄를 차고 노역하는 것을 보았는가.
-계절마다 급변하는 쌀값을 안정시킨 분이 누구인가.
-매년 원금의 두 배나 되는 고리대를 1할로 줄여준 곳이 어디인가.
-양반이나 지주가 아니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비누를 싸게 파는 곳이 어디인가.
-다름 아닌 조선전력공사이고 그곳의 주인은 이 나라 조선의 원손마마이시다.
그래서였다.
결코 인조가 마음에 들어서 천세를 외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삶을 개선해준 원손의 할아버지였기에 인조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천세를 외칠 수 있었던 거였다.
훈련도감 병사들이 삼전도비라 말하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들고 인조가 있는 단상 아래에 눕혔다.
그러자 예조판서가 단상 위에 세워진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청나라 홍타이지의 아들과 그를 따르는 가신들은 앞으로 나와 조선의 왕이신 폐하께 예를 올리도록 하라!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따라 나온 중신들은 경악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측 막사에서 청나라 복장을 한 이들이 우르르 나왔던 거였다.
원은 이날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보고서에서 홍타이지의 5번째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쇼서의 이름을 보고 오늘과 같은 일을 꾸몄다.
'자존감 없이는 발전할 수 없어.'
옹진반도에 데리고 온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자존감을 심어주는 거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중요하지.'
4번의 양란이 한반도를 휩쓸고 갔다.
왕은 도망가기 바빴고, 대신들 또한 같았다.
누구 하나 백성을 위해 나선 사람이 없었다.
하늘이 내리셨다는 이순신 장군과 충심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 조선은 진작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구강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아기 시절.
원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강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다행히 운이 따라 아담 샬을 만났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원은 아직도 큰어머니인 강빈을 아쉬워했다.
갑부를 넘어서 한 나라의 재상(宰相, Chancellor)이 되었어도 충분할 여장부 중의 여장부였지만, 뜻도 펼쳐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지금 같이 힘이 있었다면, 죽게 두지 않았을 건데···.’
아쉬운 마음이 아직도 남았는지 원은 자신에게 잘해준 친할아버지 인조에 대한 거리감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세상을, 그것도 같은 나라의 백성을 무력으로 지배할 것이 아니라면, 함께 갈 수 있는 사상을 공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칠 때 치더라도 순리에 따라야 해.'
수백 년을 이어온 사상이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저변(低邊)이 없다면 그때뿐이다.
탄탄한 저변확대를 위해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감을 심어줘야만 했다.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선식이와 조서원의 특경대원들은 소문을 만들어내고 퍼트렸다.
오늘 이곳에 수많은 백성들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였다.
원이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에 쇼서와 가신들이 단상 아래 정렬해 섰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어찌 된 일인지 쇼서와 가신들은 저항하지 않고 다소곳이 인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조판서는 인조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고 나서 마이크 앞에서 힘차게 외쳤다.
-우리 조선은 타국을 침략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문화를 전해 받은 왜와 우리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던 청나라가 우리에게 칼과 창, 활과 조총, 대포를 앞세우고 침략했다.
-우리는 결코 그 기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조선전력공사 공연단 덕분에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소리에도 백성들은 놀라지 않았다.
백성들 모두가 예조판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이후로 우리 조선은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낼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백성들은 들어라.
-오늘 이후로 새로운 조선이 탄생했음을 알리겠다.
-그 어떤 외적이 침략하더라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육성하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
무슨 망발이냐는 듯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중신들.
하지만 예조판서는 거침이 없었다.
정초에 예조판서로 임명된 김육(金堉).
원과 만나 오늘 일을 상의 했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원은 인조에게 선물에 대해 말하고 그 내용을 다시 아버지에게 전했다.
봉림세자는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대신 원을 꼭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억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아버지.'
'어릴 때 압록강을 건너면서 네가 나에게 했던 말.'
'멸, 말입니까?'
'기억하는구나. 잊지 않고 해줘서 고맙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버지.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시 원상태로 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자, 아버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 언제든지 너에게 힘이 되도록 하겠다.'
오직 조선에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멸하는 꿈을 꾸었던 봉림세자.
원이 없던 세상에서도 죽을 때까지 결코 나태하거나 사치조차 하지 않았던 명군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힘이 없었다.
원은 아버지인 효종이 어떤 사람인지 문식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왕위에 오른 효종이 더는 후궁을 두지 않았고 국방에 힘쓰며 정사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한마디로 효종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거지. 누군가 조금이라도 뒷받침을 해주었다면 세종대왕 이후 대왕 소릴 들을 수도 있었을 거야.'
문식이는 효종에 관해서 안타깝다는 말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북벌을 주장했다는 말이 많았지만, 죽기 전까지 삶을 살펴보면 진짜 북벌을 하고 싶었던 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겪어 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쇼서와 가신들은 들어라.
-태조께서 너희 여진족을 부하로 삼고 형제의 예로 대우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또한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했듯이 군신의 예를 따라 조선의 대왕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청나라 사신.
"이, 이!"
뭔가 소리쳐 외치려 했지만, 용만이가 껴안으며 입을 막아버렸다.
인조의 가교 옆에 세자와 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불편한 얼굴을 한 중신들이 서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인조가 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거였다.
다른 게 있다면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수였다.
9계단이 아닌 두 배나 많은 18계단 아래.
쇼서와 가신들은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땅에 박으며 총 27번의 예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의 심장은 거침없이 뛰었으나, 인조는 눈물을 흘렸다.
쇼서의 아버지인 홍타이지에게 했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그의 자식에게 돌려받자 여러 가지 감정이 치솟아 걷잡을 수 없었다.
-청나라 사신은 이리 와서 대왕께 예를 올려라.
용만이에게 허리를 잡힌 사신은 붕 뜨다시피 이끌려 단상 앞으로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
"네 이놈! 무슨 망발이냐? 당장 대왕께 예를 올리지 않고."
"아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십니까?"
"이놈! 이런 짓이라니. 이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너희 족속들이 행하는 예가 아니더냐."
"그렇긴 하지만···."
"당장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거라!"
사실 청나라에서 삼궤구고두례는 패자가 승자에게 올리는 의식만이 아니었다.
청나라에서는 황제의 형이나 숙부 같은 왕족들도 해야만 하는 신하가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거였다.
따라서 할 말이 없어진 사신은 이를 악물고 예를 올렸다.
청나라의 친왕은 물론 사신까지 예를 올리자 감격한 조선 백성들의 외침은 가지각색이었다.
"""천세, 만세, 천만세!"""
쇼서와 가신들이 조선의 신하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김육이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이로써 조선은 그 누구도 사대하지 않은 당당한 독립국임을 선포한다!
"""와~~~!""""
지켜보던 대신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살벌하게 지켜보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버리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행사가 끝난 후 한양은 물론 소식이 퍼져나간 마을마다 저잣거리가 북적거렸다.
특별한 행사가 없는 조선에서 이보다 큰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백성들은 모여서 서로의 생각을 거침없이 나누었다.
"참말인겨?"
"그렇다는구먼. 원손마마께서 청나라 심양을 치고 조선을 침략했던 팔기군을 노예로 끌고 와 일까지 시키는 걸 봤는데, 맞겠제?"
"그럼 우리도 이제 전하가 아니라 폐하라고 불러야 하는 겨?"
"그렇지."
"그럼 주상전하께서도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시는 건감?"
"그건 아니지. 제후국이 있어야 황제가 되는 것이니."
"그런가?“
”그렇게 알고 있네.“
쌀막걸리를 한잔 씩 마신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앞으로 임금님이 아니라 폐하라고 부르고 세자 저하는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제?"
"그건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조선전력공사 대원들이 하는 이야길 들었제."
대화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백성들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원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며 일을 꾸몄다.
후세에 인조에게 모든 공이 돌아갈지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이 무엇이 좋아 인조에게 공을 돌리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조선을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뿐.
인조는 처소로 돌아가고, 세자와 원이 청나라 사신을 대신 만났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심양을 공격하고 청나라군을 잡아가다니 왜 그러신 겁니까?"
"세자 전하, 제가 그 일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사건을 일으킨 원이 나서서 말했다.
"너희 청나라군은 도적 떼였다."
"뭐, 뭐라고요?"
"2만이 넘는 청나라 도적 떼가 압록강을 건너 먼저 쳐들어왔단 말이다. 그래서 응징 한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옆에 있던 김육이 냉큼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감히 어디라고 말을 함부로 하느냐?"
세상 무서운 것 없던 청나라 사신.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찮은 너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자세한 내용은 돌아가는 길에 쇼서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쇼서 친왕을 풀어주시는 겁니까?"
"그럼, 이곳에서 다른 도적놈들과 같이 노역을 시켜야겠느냐?"
"아,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청나라 사신은 뜻밖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원의 말이 맞다면, 여진족 전통에 따라 돌려주지 않아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쇼서가 말을 잘 들었던 이유는 원 때문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바로 풀어주겠지만, 하지 않으면 온갖 고문을 한 후 목을 잘라 압록강 변에 걸어 두겠다고 살벌한 협박을 했다.
그러니 쇼서가 따를 수밖에.
목숨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이라면 친왕인 자신보다 높은 지위였기에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는 건 치욕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였다.
모든 일이 원이 뜻했던 대로 이루어졌지만, 아닌 것도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병신같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
“세자 저하, 이 일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보게. 저하라니? 아직도 사대하는가?”
“그럼 뭐라 부른단 말이오?”
“사대할 곳이 없으니 전하라고 해야 하네.”
“하지만 청이 쳐들어오면 어찌할 겁니까?”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내려놓고 도망이나 가게나. 겁쟁이는 우리 조선에 필요가 없네.”
“이, 이!”
겁쟁이라는 말에 할 말을 잃은 대신이 시뻘게진 얼굴로 손만 부르르 떠는 가운데.
“세자 전하. 어서 빨리 청을 치시어 명나라를 복원시켜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다시 명에 사대하겠다는 말인가?”
“명은 예로부터···.”
“닥치시게!”
세자는 단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꿈틀거리는 세자의 근육이 옷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앞으로 청이나 명을 입에 담는 자는 바로 내칠 것이요!”
하지만 사대주의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범벅이 된 이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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