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자존심과 자신감(1)
새해 전날인 섣달그믐.
한양에 도착한 원은 인조의 침소를 방문했다.
예법에 따라 원은 인조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프다곤 하지만 곧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할바마마, 소손···."
"됐다. 됐어. 어서 이리 오너라."
어찌 된 일인지 인조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원을 반겼다.
병색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무척 좋아 보였다.
"그래 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장하구나. 네가 이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었구나. 정말 고맙다. 고마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인조는 원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삶에 애착이 없다는 말을 꺼내다니.
원은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성격이 뒤바뀌어 악독한 사람이 착해진다고 하던데.
'돌아가실 때가 된 건가?'
아무래도 오랜 병치레가 인조의 심경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준비해 온 선물이 있으니 죽기 전에 줘야 했다.
선물은 단순히 인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백성들의 생각을 전환할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원은 판단했다.
"할바마마, 제가 준비해 놓은 선물이 있으니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오랫동안 아파서 그런지 홀쭉해진 인조의 얼굴.
그런데도 한 가닥 기대감 때문인지 생기가 피어올랐다.
원은 방긋 웃으며 인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인조.
"그때까지는 내가 꼭 살도록 하겠다. 원아,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주변 때문인지 원래 인품이 그런 건지 모르지만, 인조는 친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죽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원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까.
* * *
이제 9살이 된 원은 정초부터 바쁘게 돌아다녔다.
떨어져 지내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한 왕실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심양에서 가져온 보물과 은덩이들을 아낌없이 뿌렸다.
물론 티도 안 나는 조금일 뿐이다.
그리고 새해 첫날 원은 아버지와 함께 경덕궁에 가서 중전에게 새해 문안 인사를 드렸다.
다른 날이면 몰라도 새해에는 내명부의 큰 어른인 중전에게 꼭 인사를 해왔다.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한 장렬왕후 조씨는 아버지인 봉림세자를 친아들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원이 네가 청나라 놈들을 무찔렀다고 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아니옵니다. 할마마마. 모두 세자 저하 덕분이옵니다. 세자 저하께서 저를 지원해 주시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옵니다."
원은 인조는 쏙 빼고 아버지인 세자에게 공을 돌렸다.
남편인 인조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이리 장한고. 세자는 참으로 좋겠소."
"어마마마, 원도 어마마마의 자식이옵니다. 그러니 다 어마마마의 은덕이옵니다."
봉림세자의 말에 장렬왕후은 밝게 미소 지었다.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 한씨가 죽은 후, 계비인 조씨가 중전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의 총애를 받고 김자점과 음모를 꾸몄던 소용 조씨에 밀려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참 고생이 많으셨던 분이시지.'
원은 문식이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조선에는 2명의 조 대비라 불리는 왕대비가 있었는데 모두 명성이란 시호를 가진 며느리들에게 치어 산 거 아냐?'
'···?'
'한 분은 장렬왕후 조씨였는데 기가 센 명성왕후에게 치여 살았고, 다른 분은 신정왕후인데 가문을 등에 업은 민비를 어쩌지 못했다.'
'명성이란 시호 자체가 문제 있는 것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문식이는 신랄하게 까발렸다.
원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지냈다면 유일한 아내가 되었을 김육의 손녀 명성왕후의 성품에 대해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원은 목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 모습을 본 중전이 원의 작은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너는 하나뿐인 세자의 아들이 아니냐. 항상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래야 이 할미가 마음이 편하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할마마마."
"그래, 피곤할 터이니 어서 가서 쉬어라."
"아니옵니다. 할마마마."
"됐다. 다른 곳도 들려야 할 건데···. 세자, 이만 가서 일을 보도록 하세요."
"네, 어마마마."
이후로도 며칠을 더 한양에서 머물며 원은 지지기반을 점검했다.
잘날수록 시기와 질투가 많은 법.
원은 폭군이 될 마음이 없기에 환하게 빛나는 은덩이가 해결해 주길 바라며.
심양에서 가져온 산처럼 쌓인 보물과 은덩이를 팍팍 안겨 주었다.
압록강을 넘어 공격해 온 청나라군을 멸살하고, 심양을 쳐서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데려왔다는 소문이 쫙 퍼져서 그런지 한양은 들떠 있었지만, 다행히 큰 변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전력공사 용산 분점에서 원은 조서원 특경대원을 만났다.
"세자 저하께서 고생이 많으시다고?"
"네, 사장님. 청나라로 사신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때문에 연일 시끄럽다고 합니다."
화청파와 복명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조정은 연초부터 고성이 오갔다는 특경대원의 말에 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부 명단을 작성해 놓았지?"
"네, 사장님.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정황은 상세히 작성해 놓았습니다."
"잘했다."
원은 속으로 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했다.
'내 성격에 그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원이 아니었다.
차라리 안 보고 안 듣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건 일리라도 있다.
혹시라도 잘못되어 지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물적, 정신적 지위가 망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자신과 자신의 가문만을 생각하는 사대부의 마음을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청나라를 쳐서 명나라를 복원시키자니.
'무슨 개소리야.'
지금까지 원이 다 했다.
그런데 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명부터 복원하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들이 나가 싸울 건가?'
조선에서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인정받은 자들이 모여서 한다는 짓이 웃기지도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된다. 수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바로 연락을 주거라. 여의치 않으면 먼저 해결하고 나중에 보고해도 된다. 명심하고 조금만 더 힘내자."
"네, 사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조서원에 소속되어 있는 특경대원들.
가족들은 옹진반도에서 아주 편히 살고 있다.
그랬기에 대원들은 안심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가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만 뽑았기에 배신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시 은동리로 돌아온 원은 보고서를 살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신의주에 사신을 잡아 두었다고?"
"네, 사장님. 사단장 신수의 말에 의하면 좀 까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아듣게 몸 좀 만져주었더니 지금은 조용하다고 합니다."
"잘했구나. 늦지 않게 시간 맞춰서 데리고 오라고 해라. 어딘지 알지?"
"그럼요. 저도 가도 되겠습니까? 꼭 보고 싶습니다."
"그래, 같이 가자."
쌍식이와 그동안 밀렸던 보고서 점검을 끝낸 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전력공사 직원들은 먹고살 수만 있게 해주면 된다.
사 놓은 땅과 지어 놓은 설비에 인력만 투입하면 만들어 낸다.
그런데도 이번 작전에 들어간 경비는 조선의 일 년 예산을 넘어섰다.
물론 그 예산을 능가하는 은덩이와 보물들을 수거해 왔지만,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수치를 확인한 원은 믿을 수 없는지 다시 한번 보고서를 살폈다.
'엄청나구나. 이래서 전쟁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총알만 해도 30만 발 이상이 소모됐다.
밀떡 로켓은 5천 개가 넘게 사라졌고, 밀떡 폭탄도 천여 개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다행이라면, 폴리에틸렌을 생산하면서 부산물로 남아돌았던 폴리프로필렌으로 옷과 침구류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도 수동리 공장이 완공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
점점 성능 좋은 피스톤 링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유압 압력기의 성능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래서 고압 압력기로 압출하여 보푸라기같이 기어 나오는 폴리프로필렌을 실로 만들 수 있었고, 천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색만 입힐 수 있으면 참 좋을 건데.'
21세기에도 폴리프로필렌은 가격이 가장 싼 원유 부산물 중 하나였다.
섬유를 만드는 과정도 간단하여 제조원가도 쌌다.
물보다 가볍고, 강하고 튼튼하며 오염되지도 않았고, 항균 작용도 뛰어나고, 보온성도 좋아 '꿈의 섬유'라 불렀다.
그런데.
'염색이 문제네. 염색이.'
탄소와 수소로만 이루어져 환경호르몬도 없고, 녹여서 다시 쓸 수 있어 재활용성도 뛰어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염색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문식이 때문에 별짓을 다 해 봤지만, 섬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저식이와 고식이가 연구원들을 데리고 다양한 실험을 매일 같이하고 있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원리나 조언을 해줄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웬만한 건 그냥 물에 헹구기만 해도 떨어져 나가니 염색이 되지 않는 게 정상인가?'
하지만 스포츠 의류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에이, 모르겠다!"
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살면서 염색에 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의민족이니 그냥 백의만 입고 살라고 하면 되겠지."
21세기에도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니 흰옷이라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원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다.
‘삼국지위지’에는 ‘부여 사람들이 흰색을 숭상하여, 큰 소매 달린 흰색 도포와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당나라 역사책 ‘북사’에도 삼국시대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흰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는 말도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태종은 '백의금지령'를 내렸고, 숙종, 헌종, 영조 때도 흰옷을 입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었다.
이것을 유교를 숭상하던 사대부들이 조선은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한다며 청색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흰옷만 입지 말라는 어명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따르지 않았다.
흰옷이라면 잿물에 빨래를 한번 삶기만 하면 다시 깨끗해지니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
피곤한 여정을 마친 원은 새로 만든 뜨끈뜨끈한 돌침대에 누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신의주 경비대 본부 4층.
쇠창살로 막혀 있는 유리창 밖을 내다본 청나라 사신.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자 기가 막혔다.
특명을 받고 급히 북경을 떠나기 전.
예친왕 도르곤(睿親王 多爾袞)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 어린 순치제를 대신해서 권력을 휘두르던 도르곤은 심양이 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어 달려온 파발의 소식을 듣고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다시 정신을 차린 도르곤은 순치제를 윽박 해서 바로 조선을 쳐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다른 황족들과 대신들의 주장에 말렸다.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명군과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팔기군을 빼서 조선을 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반대했던 거다.
대신 조선이 무슨 생각으로 심양을 공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 순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급히 이곳까지 왔는데.
"죽일 놈들! 다 죽여 버릴 거다!"
아직도 몸이 욱신거렸다.
고문이나 폭행은 없었지만, 6척이 넘는 거인과 같은 자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잡아 지긋이 주물렀다.
어찌나 힘이 센지 아직도 온몸에 새겨진 손가락 자국이 가시지 않았고 삭신이 쑤셨다.
분노에 찬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제2 사단장 신수다. 너는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준비하거라.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한다."
"이놈!"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나 보구나. 좀 더 받고 싶으냐?"
"이, 이렇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대청나라가 너희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사신은 겁이 낫지만 이를 악물고 대들었다.
설마하니 사신인데 죽이기야 하겠냐는 심정이었다.
"용만아."
"네, 사단장님."
"사신께서 몸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내일 먼 곳을 떠날 터이니 잘 해드려라."
"알겠습니다. 사단장님."
신수 사단장은 씩 웃더니 나가버렸다.
그리고 덩치가 산만한 용만이가 사신에게 다가갔다.
"아, 아니다. 난 조선의 안마가 싫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신.
용만이는 씩 웃더니 손가락을 풀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받아보시죠. 제가 이렇게 보여도 이곳에서 안마를 제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복도를 따라 울려 나오는 청나라 사신의 이상야릇한 비명에 사단장 신수는 미소를 지었다.
사신이라 어찌할 수 없었는데 그냥 두자니 배알이 꼴렸었다.
"사단장님, 내일 아침 바로 출발 합니까?"
"그래야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시간을 꼭 확인하고 때맞춰 도착해야 한다. 명심하거라. 사장님의 특명이다."
"넵! 사단장님."
* * *
인조 27년(1649) 음력 1월 30일.
병색이 짙은 인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가교(駕轎)에 올라탔다.
"주상 전하께서 행차하신다!"
내시 나업이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장식을 한 가교 앞에서 소리쳐 외치자 문무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인조의 행렬이 궁을 벗어나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백성들이 나와 무릎을 꿇으며 '천세'를 외쳤다.
원에게는 '만세'를 외치던 백성들인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말하는 동대문을 벗어나자 행렬을 따르는 백성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오늘이 그날인가요?"
"그렇다고 하네."
"에구머니나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 얼른 준비하고 올 터이니 같이 갑시다."
길 양쪽으로 포졸들이 나와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백성들로 인해 통제가 힘들 정도였다.
백성들의 표정은 들떠 있었지만, 폭도로 변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