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작전명 귀환(3)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온 촌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조선 병사의 복장이 아니었다.
두툼했지만, 몸에 짝 달라붙은 바지.
허벅지 양쪽에 주머니가 달려있었다.
윗도리에도 주머니가 가슴 양쪽에 달려있었고, 넓적한 허리띠에는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이 꽂혀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조선 사람의 복장도, 명나라 사람의 복장도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말단 병졸 같았는데, 화살에 맞은 윗도리를 벗자 새하얀 비단으로 만든 속 갑옷이 보였다.
비단 속 갑옷은 장수 중에서도 재력이 있는 장수만 하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모든 병졸이 비단으로 된 속 갑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몸통 부분이 두툼했다.
"나리."
"왜 그러십니까?"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나리."
"저 나리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대원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런데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참말로 조선에서 온 병사 맞습니까?"
"조선에서 왔지만, 병사는 아닙니다. 조선전력공사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조선전력공사를 지키는 경비대원들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조선전력공사야 당연히 들어봤습니다. 그 뭣이냐···. 맞다. 번개 표시된 비싼 기물을 만드는 곳 아닙니까?"
아무리 노예처럼 사는 촌노라지만 조선전력공사를 모를 수는 없었다.
원손마마께서 새우신 상단으로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견줄 곳이 없는 제일 큰 상단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청나라 도적놈들이 우리 신의주 분점을 약탈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응징하러 온 것입니다. 겸사겸사해서 끌려온 조선의 백성들도 모두 귀향시키려 합니다. 어서 서둘러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말로요?!"
대원의 말을 들은 촌노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나라에서조차 버렸던 자신들 아닌가.
"네, 어르신. 어서 서둘러 주십시오."
"하이고, 고맙습니다. 대원님. 그런데 어르신이라뇨. 저는 무식한 촌 무지렁이입니다."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소리에 말이 많아진 촌노는 계속 뭔가를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경비대원은 명령받은 대로 일을 처리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곳으로 가셔서 먼저 허기를 채우시고 힘을 내서 남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대원이 가리키는 곳에 사람들이 쭉 줄 서 있었다.
후발대인 육경 2개 대대가 큰 솥에 죽을 끓여 배분하느라 정신없었다.
원은 '전투 식량'이란 것을 만들어 출정을 나가는 대원들에게 지급했다.
비닐봉지에 담아 공기를 빼고 열단기로 눌러 붙여 밀봉한 전투 식량.
쌀가루와 야채(野菜), 말린 해초, 고기 등을 잘게 썰어 배합하고 열풍으로 건조해 만들었다.
적절하게 간이 되어 있기에 그냥 먹을 만했다.
그런데 끓은 물에 부어 넣으면, 더할 나위 없는 쌀 고기죽이 되기에 대원들도 평소에 자주 해 먹었다.
조선전력공사 기병대는 다친 대원들과 육경 대대에 뒷일을 맡겨 놓고 소대별로 흩어져 심양 근처를 돌며 조선인들을 모아 왔다.
"연대장님, 내일 아침 출발하려면 눈 좀 붙이시지요?"
"아니다. 난 며칠 더 이곳을 지켜보다가 따라가겠다. 네가 백성들과 포로들을 인솔하여 먼저 내려가거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부디 조심하시고 신의주에서 뵙겠습니다."
연대장 기수는 수만 명이나 되는 조선의 백성들과 수천 명이나 되는 청나라 포로들을 육경 대대와 기병 1개 대대에 맡겼다.
후방 안전을 위해서였지만, 다른 의도가 있었다.
챙길 것이 많은 청나라 심양행궁(瀋陽行宮)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 최대한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연대장님,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한곳에 몰아넣고 적당히 먹을 것을 주고 알아서 살라고 해라. 데리고 가봐야 짐만 될 뿐이다."
"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현대식 군사 교육을 받은 경비대 대원들.
약탈은 전혀 없었다.
단지 수거만 할 뿐.
* * *
쌀쌀한 날씨에도 원은 아침부터 일어나 카트를 타고 옹진반도를 순회했다.
곳곳에 새롭게 지어지는 공장들을 보고 원은 씩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매서운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아, 시발. 좀 나 춥네."
입을 열자 쩍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질 것 같았고 하얀 입김이 눈으로 변해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소빙하기란 말은 들었는데, 갈수록 추위가 극심했다.
"이러다 경신년이 되면 얼어 죽는 것 아냐?"
"경신년이요?"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을 합쳐 말하는 거다."
"아직 한참 멀지 않았습니까?"
"그때 되면 더 추워질 거란 얘기다."
"그렇습니까?"
추운 북방에서만 살았던 쌍식이 또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땀 배출이 탁월한 폴리프로필렌 천으로 만든 쫄쫄이를 입고 있었지만, 더 추워진다니 몸이 으스스했던 거다.
"쌍식아, 속도를 더 내라. 어서 빨리 돌아가자."
"최고 속돈데요."
"그래?"
"네."
날이 추워지자 배터리 효율이 떨어져 카트는 사람 걷는 속도와 비슷했다.
"젠장. 카트도 비닐 집처럼 막을 쳐야겠다."
"알겠습니다. 도착하는 즉시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비닐 집이라 부르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농식이와 종식이가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제공해 줬다.
안에 연탄난로도 가져다 놓아 각종 식물을 개량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했다.
그런데 완전히 위가 노출된 카트를 비닐로 덮을 생각을 못 한다니.
역시 사람은 당해봐야 아는 것 같았다.
"배터리도 보온할 수 있게 처리하라고 전해라. 이러다 도착하기도 전에 방전되겠다."
"네, 사장님."
끝내 카트가 멈춰버렸다.
넉넉하게 납배터리를 넣어 놓았지만,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인산철 배터리라도 만들어야 하나?"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없었다.
인사철 배터리도 리튬이온 배터리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철산반도(鐵山半島)에 1개 대대를 투입하여 희토류 광맥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사고가 날지 몰라 일단 대원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원은 호위대의 말을 타고 힘겹게 본사에 도착했다.
"어휴! 좀 살 것 같네."
따듯한 홍삼차를 마시고 난 원은 윗도리를 벗고 보고서를 보더니 양순이에게 물었다.
"그래 새로 잡은 포로만 1만 명이 넘는다고?"
"네, 사장님. 팔기군에 소속된 병사만 잡아서 끌고 온다고 합니다."
"잘됐구나. 당분간 노동력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겠다."
옹진반도에 공장이 속속 들어서자 사람들을 새로 많이 뽑았다.
그런데도 여자와 아이의 비율이 70%나 되었다.
될 수 있으면 가족 단위로 모집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가족을 만나겠다고 외출을 하려고 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아직도 조선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옆 마을조차 가지 않고 평생 한곳에 살다 죽는 사람이 태반이 넘었다.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옹진반도에서 힘을 쓸만한 성인 남자 중 절반은 경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제철소와 화학 등 중공업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철, 구리 같은 광물을 캐는 광산에서 일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사장님, 설마 놈들을 이곳 광산에 투입할 생각은 아니시죠?"
쌍식이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옹진반도는 직원과 가족이 아니면 그 누구도 들어 올 수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니지. 재령광산(載寧鑛山)으로 보낼 거다."
"제가 괜히 걱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쌍식이.
그 모습을 보자 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쌍식아, 머리는 자주 감느냐?"
"네, 자주 감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일에 한 번은 꼭 감고 있습니다."
오일에 한 번이면 진짜 자주 감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가 문제였다.
"앞으로는 날마다 감아라."
"네?"
"명령이다. 앞으로 날마다 감도록 해라."
"네에."
죽을상을 하는 쌍식이.
원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라. 곧 빡빡 깎게 해줄 테니."
"정말입니까?"
"그래."
다시 밝아진 쌍식이와 함께 지도가 있는 탁자로 간 원은 고민이 되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황해도 재령군 재령리와 삼강리에 걸쳐 있는 재령광산.
최근에 발견한 노천 철광이다.
옹진반도 은률군 북쪽 해안가에서도 노천 철광을 찾아냈다.
그래서 원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 제대로 된 제철소를 지을지.
'결국 송림이 답인가?'
황해도 북서쪽 대동강 변에 있는 송림제철소(松林製鐵所).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제철소 남쪽에 있는 재령광산.
캐낸 철광석을 북쪽으로 흐르는 재령강을 따라 운반하면 된다.
서쪽에 있는 은률광산도 대동강을 따라 수송하면 된다.
주변에도 다양한 광산이 많고 큰 다리를 지을 필요도 없다.
북쪽과 남쪽으로 철도나 도로를 놓기에도 편한 곳이다.
생각 같아서는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는 은혜리에 짓고 싶었지만, 동쪽에 재령강이 있어 다리를 놓지 않으면 내륙으로 이동하기에 불편했다.
또한 넓은 곡창지대인 재령평야가 오염될 수도 있기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림제철소는 달랐다.
1910년 한반도 수탈에 앞장섰던 미쓰비시(三菱)가 황해북도 송림면에 제철소를 세웠다.
수로와 육로 이용이 편한 곳이고, 남쪽은 산이 있어 북풍이 불어도 재령평야에 영향을 덜 끼칠 것 같았다.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뭐가 말입니까? 사장님."
"이곳에 제철소를 지어야겠다. 양순아?"
원은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양순이를 불렀다.
"네, 사장님."
"근처 땅을 모두 사들이도록 해라."
"이곳 매상천(梅上川) 주변을 말입니까?"
"그래. 이곳에 제대로 된 제철소를 지어야겠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네 힘으로 안 되면 쌍년이에게 부탁하거라."
"네, 사장님."
그동안 쌍식이가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하지만 갈수록 머리를 쓸 줄 아는 쌍식이를 땅이나 매입하는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침착하고 꼼꼼한 양순이도 키워야만 했다.
'레벨업 시켜야지.'
여자라고 그냥 두면 인구의 반이 쓸모없어진다.
외란 이후 정확한 인구 통계를 낼 수 없게 된 조선.
호구 수로 따지면 1천만 명 가까이 될 거다.
그중 노비와 여자, 아이, 노인을 빼면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성인 남자는 거의 없다.
'200만은커녕 150만 명이나 될까?'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노비제도부터 없애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원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다.
"쌍식아, 경비대 5기 대원은 얼마나 모집했느냐?"
"6천 명 조금 넘습니다."
4기까지는 1만 명 이상 모집하여 훈련을 마쳤다.
그런데 5기는 모집부터 힘이 들었다.
체격이 문제였다.
지원자들은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너무나 왜소했다.
그렇다고 건강해지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단 바로 훈련에 들어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대원 모집에 떨어진 사람들을 엄동설한에 내칠 수는 없었다.
그건 나가 죽으란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잘 먹이고 교육해서 공장이 완공되면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해라."
"네, 사장님."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 원은 보고서를 한 장 넘겼다.
"십만 명이 넘는다고?"
"네, 정확히 12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백성이 50만 명이란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50만 명이면 조선의 인구 5푼(5%)이나 된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동안 돈을 주고 사 오거나 도망쳐 온 백성이 10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12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심양 주변에서 농사를 짓거나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못해도 25만 명은 되었던 거구나.'
5만 명도 안 되는 청나라군이 5배가 넘는 백성들을 굴비 엮듯이 엮어서 끌고 갔던 거다.
그것도 최소 수치이다.
심양 주변이 아니라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 간 백성들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죽일 놈들!"
"멸해야 합니다!"
쌍식이 또한 수치를 보고 화가 나는지 씩씩거렸다.
"이 많은 수를 수용한 곳은 있느냐?"
"그게···."
다시 머리를 긁적이는 쌍식이.
불쌍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준비해 둔 비닐 집에 한 8만 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12만 명은 좀···."
말을 잇지 못하는 쌍식이.
원은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어디 기준이냐? 설마 옹진반도를 기준으로 한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다. 먹일 식량은 부족하지 않으냐?"
"그건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어찌 된 일인지 추수가 끝난 후 쌀을 팔려는 지주들이 몰려와 한동안 고생했다고 합니다."
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흥! 약삭빠른 거지. 가지고 있어 봐야 손해가 나기 때문일 거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쌀 본위제를 하지 않느냐?"
"그래도 반만 쳐주지 않습니까?"
"그거야 도정 전이라 그런 거지."
"그래도···. 아! 가지고 있으면서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돈을 받고 파는 게 남는 거군요."
"부피가 작아 숨겨 놓기도 좋을 거다."
"쌀 대신 동전이라. 또 하나 배웠습니다. 사장님."
그동안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 있어도 내놓지 않았던 쌀.
쌀 본위제를 시행하자 앞다투어 팔았다.
그래서인지 조선전력공사 분점 창고마다 쌀이 넘쳐났다.
"못된 놈들."
덕분에 다시 돌아온 백성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만, 원은 기분이 나쁜지 투덜거렸다.
다시 보고서를 넘긴 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놀란 것도, 기뻐하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건 뭐야?"
'왜 그러십니까? 사장님."
원은 대답 없이 입꼬리를 쫙 올리며 묘한 눈빛으로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본 그 모습에 쌍식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딸꾹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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