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전운(2)
황해도 옹진반도.
밤이 깊었는데도 곳곳에 환한 불이 밝혀져 있다.
해안을 따라 설치된 발전소와 공장은 물론 길을 따라 설치된 가로등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손가락만 한 조그마한 전구라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다니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불빛이 반짝거렸다.
조선전력공사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은동리.
불빛 아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원은 자신의 집무실 겸 숙소인 본사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새로운 본사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발전이 너무 빨라.'
그래서인지 계획했던 것과 달리 일찍 청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전쟁이 눈앞에 다가오자 생각이 많아졌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고 조선이 안정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청나라를 털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에도 없는 전쟁을 해야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압록강을 넘어 심양을 치고 노예로 사는 조선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올 계획이 수립됐다.
'아이들 덕분이야.'
원은 새로 올라가는 연구소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정답을 알고 있다 지만,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다.
그런데 ‘기술 가속’이 붙어 버렸다.
더욱 단단해진 강철.
크롬을 구할 수 없기에 녹이 슬지 않은 스테인리스를 만들 수 없지만, 전기를 이용한 아연도금으로 대체 했다.
이제 개선된 증기 터빈 발전기만 완성된다면, 알루미늄 생산도 가능할 것 같다.
원은 이 모든 것이 아이들 덕분이라 생각했다.
단지 외우는 것만 잘하고 문장을 잘 만들 수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조선.
아니 21세기 한국에서도 같았다.
'다행이지.'
원은 백지와 같은 아이들 중에서 심도 있게 가르칠 인재들을 뽑을 때 집중력과 사고력을 보았다.
무슨 일을 하든 집중력은 가장 중요하다.
생전 처음 듣는 내용에 흥미를 느끼고 집중할 수 있는 아이들이어야 꾸준히 재미를 붙이고 일을 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고력이 없다면, 가르쳐 준 것만 알 뿐, 개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뽑은 아이들.
정말이지 하나같이 보석 같았다.
외우는 것만 잘하고 말만 잘하는 아이들을 뽑았다면 어찌 됐을까.
"커서 당파 싸움이나 했겠지."
원은 피식하니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잘 외우고 말도 잘하고 문장도 잘 짓는 사람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따로 모아 행식이에게 붙여 놓았다.
자신보다 논리정연하게 말도 잘하고 관리도 잘하는 행식이.
앞으로 새로운 조선의 행정을 구축할 천재였다.
물론 원이 아는 만큼 21세기 행정에 관해서 행식이에게 설명하고 가르쳤기 때문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다.
원은 지금도 새로운 인재들을 수시로 찾아다녔다.
'일은 사람이 하는 거지.'
현재 옹진반도에 있는 초등학교의 한 학급은 50명 정도.
그중에서 똑똑 튀는 아이 한두 명은 꼭 있었다.
원은 그 아이들을 따로 모아 선별해 나갔다.
그렇다고 뽑은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아이들이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게 했다.
그래서 최종 선발된 아이들.
자기들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에 더욱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책을 좋아하거나.
게임을 좋아하거나.
노래를 좋아하거나.
춤추기를 좋아하거나.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듯이 원이 뽑은 천재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거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자신만 해도 0과 1의 세계가 좋아서 전공을 선택했다.
대체 역사 소설을 좋아해서 문식이와 말을 나누며 별 이상한 짓을 다 했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볼 수 있었지만, 천재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시간이 한참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문식이는 뭐 하고 살까?"
문식이가 원했던 조선 시대 왕의 삶.
꿈꾸지도 않았는데 대신 하게 되었다.
논리적 토론이면 몰라도 다투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공식이.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상대는 피했고, 남을 험담하는 말은 듣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런데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며 상대를 험담하고 비방하는데 도가 튼 x선비들이 있는 조선에서 왕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그런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눈뜨기 전부터 기저귀에 똥오줌을 싸면서 수많은 계획을 짜고 고치고 다시 짰다.
그런데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운이.'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이었다.
그런데 운이란.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
원이 노력했기에 다가온 운을 꽉 쥐고 활용할 수 있었던 거였다.
가진 지식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않았다면.
'폭군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외동아들이라 왕위를 포기할 수도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김육의 손녀와 결혼까지 했다면.
'미쳐 버렸을 거야.'
자신의 후손이 될 숙종부터 대를 잇지 못하고 일찍 죽어버린 헌종까지.
조선은 헬조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꼴을 어떻게 봐.'
죽으면 볼 수 없겠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다.
이렇게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했으니.
그래서 원은 자신을 미친 듯이 굴렸다.
그리고 성과를 냈다.
'한번 해보는 거지!'
이미 시작한 일.
죽기 전까지 끝을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원은 둥근 달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늘따라 문식이가 보고 싶네.'
아직 어렸기에 술 생각이 나진 않았지만, 큰일을 앞둬서 그런지 둘이 함께 떠들던 그때가 그리웠다.
* * *
선양(沈阳)이라고도 말하는 심양.
요녕성의 성도이다.
청나라 말로는 묵던(Mukden)이라 불렀으며 유럽에서도 묵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고 수도를 옮긴 후 더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만주족의 고향으로 신성시되었다.
그래서인지 청나라는 한인들의 출입을 금했다.
하지만 밑에서 일할 사람은 필요했고, 그 일은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이 담당했다.
그래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조선족이라 부르는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누르하치가 지은 심양고궁(瀋陽故宮).
1631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궁을 증축하였다.
북경으로 이전한 후 이제는 별궁으로 쓰이는 곳이지만, 화석승택친왕인 아이신기오로 쇼서가 기거하면서 궁은 더욱 화려해졌다.
"친왕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구사 슈무루가 다른 구사들과 합심해서 신의주에 있는 조선전력공사의 분점을 칠 계획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더냐?"
"네,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확인해 보았습니다."
"흠···."
남명을 정복하지 못하고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청나라.
권력 다툼이 심했지만, 이복동생인 푸린이 순치제(順治帝)에 오른 후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진정되었다.
쇼서는 푸린이 황제에 오른 것에 별 불만이 없었다.
자신은 측비의 소생이고 푸린은 황후가 난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구사들이 작당 모의하는 꼴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놈들을 당장 잡아들여라."
"친왕 전하, 굳이 지금 잡아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처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것도 괜찮겠구나. 유심히 지켜보고 수작 부리지 않는지 잘 감시하거라."
"네, 친왕 전하."
약탈이 생활이었던 여진족.
제국이라 부르는 청나라를 세웠지만, 그 습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조선전력공사는 반란 세력도 아니고 조선의 왕도 아닌 일개 상단일 뿐이다.
쇼서는 그곳을 턴다고 해서 나쁜 것은 없다고 봤다.
어차피 털고 나서 바치기만 한다면, 조선에서 따져도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구사 어전 슈무루는 봉황성에서 다른 구사 어전들과 만났다.
기물도 기물이지만 금이 섞인 것 같은 정교한 동전이 더 탐이 난 슈무루는 끝내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평소에 친한 두 명의 구사 어전을 꼬셨다.
그들 또한 조선전력공사에서 만든 동전과 기물을 보고 군침을 흘렸다.
"분배는 내가 3할, 당신들은 각각 2할이오. 나머지 3할은 위에 바쳐야 하오. 그래야 면책을 받을 수 있으니. 동의하겠소?"
"동의하오."
"나도 불만은 없소. 그런데···."
평소에도 걱정이 많은 구사 어전이 말을 하다 멈췄다.
"무슨 할 말이 있소?"
"슈무루. 우리끼리 할 것이 아니라 버일러께 알려서 녹영군(綠營軍)을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소?"
"녹영군은 남명 때문에 빼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소."
"그러긴 하지만 우리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쓸 수는 없는 것 아니요?"
"그거야 대포로 먼저 공격한 후, 혼란한 틈을 타서 기병이 돌진하면 되오. 놈들에게는 대포도 없을뿐더러 성벽이란 것도 없다고 하오."
"그렇다면 할 만하겠소. 그럼 진격로를 정합시다."
머리를 맞대고 작전 회의를 하는 구사 어전 3명.
곧 있으면 막대한 기물과 보화를 챙길 생각에 화기애애했다.
오래전부터 조선에는 금광이 많이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조선은 금광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금이 섞인 것 같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전을 보았다.
신의주에 있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이 아무렇지 않게 넘겨준 동전.
분명 구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금이 섞인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금처럼 누런빛이 밝게 빛나지 않을 테니까.
슈무루는 야금장에게 성분을 조사하라고 하면 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밝혀질 일이지만, 동전이 너무 예뻐서 그러기가 싫었다.
‘그냥 치고 털어 온 후 알아봐도 늦지 않아.’
굳이 뒷일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속국이나 다름없는 조선.
그것도 상단의 분점 하나 친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터이니.
아무튼 원이 구리를 아끼려고 아연을 많이 섞어 만든 동전이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일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원과 경비대 지휘관들이 원하는 방향이었다.
* * *
도저히 연탄난로의 가격을 정할 수 없었던 원은 일단 만들어진 연탄난로를 신의주로 올려보내라고 했다.
다른 곳보다 추위가 빨리 찾아오는 곳이고, 모든 집은 조선전력공사의 소유이기 때문이었다.
"참말로 따듯하구먼."
"오길 잘했지?"
"고맙네. 덕분에 호강하는구먼."
소똥와 개똥이 아버지는 처음에 먹을 쌀이 없어서 조선전력공사 용산 분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빌린 돈으로 춘궁기를 넘겼다.
그런데 조선전력공사에서 북쪽에 새로운 읍성을 짓는다는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따라오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힘들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감. 추수 끝나고 빚 갚으면 남는 게 없을 건데."
"그랬겠지?"
"당연한 말을 뭘 또 물어보는가. 어서 불이나 붙이게."
개똥이 아버지는 열심히 부채질하면서 또다시 말을 꺼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빚을 대신 갚아 주지 않았다면 오지도 못했을 거야."
"다 부처님 같으신 원손마마 덕분이지. 원손마마만 믿고 결정했는데 이리 좋을 줄이야."
떠도는 소문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도 없이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조선전력공사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자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희망을 품고 움직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을 이끌고 신의주까지 따라온 두 사람.
오는 길에 처음 본 많은 물품을 실어 나르고 도로 공사를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런데 넓은 농지를 배정받았고 떡 하니 집도 하나 얻었다.
그것도 돌이나 다름없는 단단한 벽돌집으로.
온 가족이 잠을 청하려 해도 발 뻗을 곳조차 없는 비좁은 초가삼간.
굼벵이는 물론 벼룩, 이, 지네 같은 독충까지 득실거렸다.
하지만 새로 얻은 집은 깨끗하고 넓었다.
창이나 문에 붙이는 비닐이라는 종이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찢어지지 않았고 투명해서 방안이 훤했다.
천장 또한 합판(合板, Plywood)이라는 것으로 막아 놓고 틈새는 회칠을 했기에 더는 빗물이 샐 일이 없었고 벌레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메! 불이 이제야 붙었네."
"꺼트리지 말게나. 한밤중에라도 꺼트리면 추워서 잠도 못 잘 거네."
"고맙네. 고마워. 자네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서 살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네. 저녁에 오게나 부침개 해 놓을 테니 막걸리나 한잔하세."
"알겠네. 근데 연탄난로는 조심해야 하는 것 알제? 눈에 보이지 않는 나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 큰일이 난다네. 꼭 부엌문 잘 닫았는지 확인하고 연통도 새는 곳이 없나 잘 확인해야 하는 거 알제?."
"인제 그만 좀 하게. 잘 알고 있으니. 이 좋은 세상 빨리 죽을 수는 없으니 단단히 조심하겠네. 저녁에 꼭 오게나."
이양법인 모내기를 하지 않고 그냥 씨앗만 뿌렸는데도 농지가 넓어서 50가마니나 산출했다.
4가마니만 있어도 7식구 푸짐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는데 세금까지 다 내고도 20가마니나 남았다.
그동안 빌린 돈이라 해봐야 3가마니.
쌀이 남아돌자 막걸리부터 만들어 놓았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여. 원손마마, 천년만년 오래오래 사세요."
개똥이 아버지는 불붙은 연탄을 집게로 들고 가며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 * *
신의주에 주둔 중인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제2사단.
대원들이 추가되자 병영부터 지었다.
그동안 백성들의 집을 지어주다 보니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담벼락과 떨어져 지은 3층 높이 대원들의 숙소.
초기 강남의 한강 변 아파트처럼 지어졌기에 하나의 방어 진지나 다름없었다.
그 안쪽으로 5층 높이의 사단 본부가 있었다.
"사단장님, 놈들이 이동을 시작했다는 보고입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늦어도 3일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일단, 내일은 푹 쉬도록 하고 모래부터는 비상 체계에 돌입한다."
"넵!"
죽더라도 신의주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한 제2사단 사단장 신수.
사장님이 말씀하신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먼 화살에라도 맞아 죽는 대원이 있다면 사단장 책임이야. 그러니 보이는 족족 그냥 다 죽여버려. 알았나?'
사장님이 내리신 명령은 간단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적은 그냥 다 죽여 버리라는.
그래야 대원들이 피해를 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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