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7화 (27/275)

27. 전운(1)

은동리 조선전력공사 본사 5층.

팔짱을 끼고 고심에 빠진 원.

왠지 들떠 있는 쌍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는 쌍년이와 정용식.

대비되는 표정 속에서 쌍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북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내려 올 것 같습니다."

"그럼 좋은 것 아닙니까?"

쌍년이의 말에 쌍식이가 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이 얼 때가 돼서 문제지. 그렇게 되면 지킬 곳이 많아져."

원의 말에 갸웃거리는 쌍식이.

이번에는 정용식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 해도 넘어올 만한 곳은 옥강이나 수풍뿐인데···. 사단장, 1개 대대를 보내서 지키면 되지 않을까?"

"고갯길만 지킨다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고 좋은 거 아닙니까. 사장님?"

쌍식이는 제 생각이 맞았다고 강조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원은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혼자만의 생각을 멈춘 원은 쌍식이를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자주 회의에 참석해서 그런지 이제 쌍식이도 제법 괜찮은 의견을 냈다.

원은 제1사단 사단장인 정용식을 보며 물었다.

"용식아, 지금 경비대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지?"

"현재 신의주는 연대 병력인 3개 대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위쪽 옥강에도 1개 대대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수풍에는 아직 배치한 병력은 없습니다. 대신 수시로 정찰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나머지는?"

"3개 대대가 신의주 남쪽 뚝방길을 따라 주둔하면서 백성들을 돕고 있습니다."

원은 정용식의 말을 들으면서 나무로 된 병력 표시를 지도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3개 대대가 남는구나."

"그렇습니다. 3개 대대는 신의주 남쪽 철산반도에서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광맥을 찾고 있습니다."

"1개 대대만 남겨 놓고, 2개 대대 모두 수풍리로 보내라."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래 수고하고."

"멸!"

정용식 사단장이 나가자 쌍식이가 원에게 물었다.

"사장님, 수풍리에 2개 대대나 필요할까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다."

“네에."

언제나 선을 지키는 쌍식이.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런 쌍식이를 한번 쳐다본 원은 쌍년이를 보며 물었다.

"얼마나 몰려올 것 같더냐?"

"구사 어전 셋이 뭉쳤다는 정보입니다."

"최소 이만 명은 넘겠구나?"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났으니 소집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곧 일을 벌인다는 말인데···."

원이 다시 생각에 잠기자 옆에 있던 쌍식이가 눈치를 보더니 조심히 말을 꺼냈다.

"사장님, 이번 기회에 아예 심양까지 쳐들어가서 끌려간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응?"

"그동안 꾸준히 사들여 왔지만 더는 팔지 않겠다고 하는 통에 데려오지 못한 조선 백성만 수십 만입니다. 그들을 모두 데리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멸하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

아직도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식량은 충분합니다. 이번에 추수가 끝나자마자 쌀을 팔러 온 지주들이 많았습니다. 동전이 필요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남명으로부터 수입한 쌀이 창고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장가를 가서 그런지 아니면 쌍년이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최근 들어 쌍식이가 아주 똑똑해졌다.

시키지 않는 일을 다 하고.

"기병대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벽성리에 주둔 중입니다."

벽성리는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여차하면 한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곳에 기병대를 배치해 놓으라고 말했더니 벽성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기 좋은 곳이라 전략적 가치가 큰 곳이기 때문이었다.

"기병대 인원이 3천 명 정도 되지?"

"네, 사장님."

원은 기병을 5천까지 늘려 여단 병력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말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수를 당장 불러와라. 상의할 것이 있다."

"네, 사장님."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서 최초로 연대장이 된 기수.

원으로부터 기병대를 사수하라는 뜻으로 기수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어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기수.

정묘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후 쭉 말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도 말에 대해서 잘 알았고 잘 탔다.

하지만 덩치가 작았다.

그런데도 원은 그를 기병대를 지휘하는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창과 활이 아닌 총으로 싸울 건데 덩치는 커봐야 좋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쌍식이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양순이가 들어왔다.

"사장님, 한양에서 파발이 왔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하더냐?"

"주상 전하께서 보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그래?"

직원들 앞에서 차마 인상을 쓰지는 못했지만, 원은 귀찮아 죽는 줄만 알았다.

"알았다. 곧 간다고 전해라."

"네, 사장님."

'또 뭔 일 때문이지? 바빠 죽겠는데.'

원은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한양으로 출발했다.

밤이 되어 도착한 한양.

서둘러 입궐하니 내시 나업(羅嶪)이 마중 나와 있었다.

"원손께 인사드리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시겠지만,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저를 따라오시지요."

"알겠네."

비록 내시지만 인조가 특별히 총애하는 나업.

믿을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 인조의 사람이기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원 덕분에 궁궐의 밤이 바뀌었다.

길을 따라 전구가 밝게 빛을 발하니 더는 청사초롱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나업의 안내로 인조의 방에 들어서 원은 먼저 큰절을 올렸다.

"할바마마, 소손 할바마마의 부름을 받고 바로 뛰어왔습니다."

"오, 이리 오너라. 내 네가 보고 싶어서 불렀는데 역시 너밖에 없구나."

"저밖에 없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누가 내 말에 이리 빨리 온단 말이냐?"

"할바마마가 부르시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너처럼 이리 빨리 온 적은 없었구나."

이미 해주에서 파주까지 넓지는 않지만 콘크리트 도로를 깔아 놓았다.

그 사실을 인조는 몰랐나 보다.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네, 할바마마."

지긋이 눈을 뜨고 원의 얼굴을 쓰다듬던 인조.

몸이 아파서 그런지 성격도 바뀐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원의 얼굴에서 손을 거둔 인조는 정색하고 말을 꺼냈다.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할바마마가 통치하시는 조선의 힘을 기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오, 그렇구나. 그래."

다시 표정이 밝아진 인조.

기분이 좋은지 씨익 웃었다.

원은 그런 인조에게서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사옵니까?"

"흐음."

한참 뜸을 들인 인조.

원의 손을 잡고 지긋이 바라보았다.

"신의주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물리쳤다고 하던데···."

"아, 그들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니옵니다. 도적 떼이옵니다. 조선전력공사 신의주 분점을 약탈하러 온 도적 떼가 틀림없사옵니다."

"그래?"

"청나라 병사라면 허락도 없이 우리 조선의 영토를 넘어왔겠습니까? 할바마마."

"허어~!"

인조는 정신이 번득 깨었다.

청나라 병사들을 도적 떼로 오인하고 죽인 게 아닌가.

대신의 말마따나 사고를 친 게 틀림없었다.

겁이 난 인조.

몸이 정상이었다면 호통을 쳤을 거다.

하지만 몸이 힘드니 그저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인조는 두려움이 가득한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도적 떼가 아니고 청나라 병사들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청나라 병사라고 해도 조선 땅을 넘어와 말도 없이 공격했으니 도적 떼이옵니다."

너무나 당당한 원의 표정.

인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겁이 났는지 원의 손을 잡은 인조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원은 두 손으로 인조의 손을 꽉 주고 밝게 씩 웃었다.

그러자 인조는 두려움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허락을 받고 신의주로 간 경비대원만 1만 명.

따라간 백성만 벌써 4만 명을 넘어 5만 명 가까이 된다는 대신의 말을 들었다.

이미 조선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손자.

어렸지만 두려웠다.

하지만 손자인 원은 언제나 자신에게 다정다감했다.

또한 몇몇 대신들만 빼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원을 모두가 좋아했다.

"원아."

"네, 할바마마."

"만약에 청나라 군사가 그 일로 쳐들어온다면 어찌할 생각이냐?"

"뭘 어찌하옵니까. 다 죽여야죠. 할바마마 허락 없이 조선 땅을 넘어오면 소손이 모두 죽여 버리겠사옵니다."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은 인조.

목이 마른 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능하겠느냐?"

"그런 놈들쯤이야 언제든지 상대할 수 있사옵니다. 할바마마께서도 제가 드린 총을 보시지 않았사옵니까? 서양에서 사 온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조선전력공사의 경비대는 모두 그 총으로 무장하고 있사옵니다. 언제든지 도적 떼 같은 놈들이 쳐들어오면 모두 물리치겠사옵니다. 그러니 걱정하자 마시옵소서."

"그래, 그렇구나. 장하다. 한데 요즘 청나라에서 통 사신조차 오질 않는구나. 혹시 너랑 관련이 있느냐?"

"소손은 모르는 일이 옵니다."

원은 시치미를 뚝 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 분위기가 좋은데 괜히 딴소릴 해서 깰 필요는 없었다.

대신 확실한 정점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은 울먹이는 소리로 인조를 조용히 불렀다.

"할바마마."

"왜 그러느냐? 말해 보아라."

인조를 보며 눈물을 흘린 원은 이를 앙다물고 훌쩍거렸다.

"소손은 결코 삼전도를 잊을 수 없사옵니다. 할바마마."

깜짝 놀란 인조.

눈을 커다랐게 뜨더니.

"네가 삼전도에 대해서 아느냐?"

"소손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할바마마."

원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인조는 두 손으로 원의 손을 마주 잡았다.

"괜찮다. 괜찮아."

"이 손으로 꼭 할바마마의···. 꼭···, 갚겠사옵니다. 흑흑."

"그래, 그래. 네가 바로 내 핏줄을 이은 내 손자로구나."

아역 배우 뺨치는 원의 연기에 인조 또한 눈물을 흘렸다.

"원아, 원아. 이리 좀 더 가까이 와보거라."

"네, 할바마마."

인조의 품에 안긴 원은 눈물을 훔치더니 입꼬리가 올렸다.

원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시로 정보를 받았다.

도대체 인조가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정보를 취합 한 원은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큰 전쟁이 날지도 모르기에 감춰봐야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아무리 정이 안 간다고 하지만, 인조는 엄연한 친할아버지이다.

그것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그래서 단단히 준비하고 말을 꺼냈는데.

'한이 크셨나 보네.'

범부라도 잊지 못할 일인데, 한 나라의 왕인 인조는 절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기억이었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원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할바마마, 제가 멸할 때까지 오래 사셔야 하옵니다."

"고맙다. 고마워."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인조.

그날 밤은 고통 없이 푹 잠을 청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 * *

다음 날 아침.

원은 내명부의 어른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인 세자빈 장 씨와 함께 밥을 먹었다.

인품이 조선 왕실 역사에서 가장 좋았다는 인선왕후 장씨.

원에게 손수 굴비를 발라주었다.

"너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머니. 소자 어머니께서 힘드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언니들과 동생들을 돌보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밝게 웃는 세자빈 장씨.

기특한지 원을 보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고맙다니요. 소자가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는 아무래도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구나."

"그래요?"

"나는 그런 생각이 가끔 든단다. 아버지께서는 학문도 뛰어나시지만, 천문, 지리, 의술, 병서에도 능하시단다. 그런 재능이 너에게 이어진 것 아닌지 생각이 드는구나."

"그랬어요?"

"그렇단다."

인선왕후의 부친인 장유(張維).

우의정까지 오른 문신이자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그는 성리학에서 한쪽만 파고드는 편벽한 사상을 지적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우암 송시열도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며 극찬을 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밥을 먹을 원은 바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심양까지 쳐들어가겠다는 말이냐?"

"네, 아버지."

"괜찮겠느냐?"

"준비는 철저히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곳을 맡아만 주신다면 소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크흠."

수시로 원과 의견을 나누었던 봉림세자.

막상 청의 발원지인 심양을 친다고 하자 심기가 불편했다.

"할바마마께는 이미 운을 띄어 놓았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래?"

"네, 소자 어젯밤에 할바마마와 많은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소자가 원하는 데로 일을 할 수 있게 허락받았습니다."

"그랬단 말이지?"

"네, 아버지."

한참을 생각하던 봉림세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원을 보며 말했다.

"부디 이 나라에 해가 없도록 조심하거라."

"네, 아버지."

의심 마귀에 씌운 인조까지 등에 업은 원은 아버지의 허락도 받아냈다.

거칠 것이 없는 원은 즉시 은동리로 돌아갔다.

당장 북경까지 쳐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심양을 쳐서 끌려간 백성들을 빼내 오는 것은 가능하다고 봤다.

은동리에 도착한 원은 조선전력공사 핵심 직원들을 즉시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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