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내실(2)
본사 5층 집무실로 돌아온 원은 양순이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신의주에서 직접 무전 연락이 왔다고?"
"네, 사장님. 장이 열리는 날 위화도로 가보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
아이답지 않게 손가락으로 머리를 집고 고심에 빠진 원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수 사단장에게 즉시 2개 대대를 투입하여 신의주를 보호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신의주로 파견 나간 경비대 제2사단.
10개 대대 중 1개 대대만 신의주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대대는 모두 공사 현장으로 나가 있는 상태.
원은 문제가 생길 수 있을지 몰라 바로 지원했다.
'3개 대대면 팔기 중 1기가 전부 온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대대장들과 함께 예상했던 가상 전투.
경비대의 방어력은 청나라군에 대해 최소 10대 1이었다.
그것도 경비대원들의 희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는 법.
병력을 부족하면 몰라도 남아도는데 추가 병력을 보내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양순이가 나가자 원은 쌍식이를 쳐다보았다.
"덤빌 것 같지?"
"네, 사장님. 일단 찔러 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박살을 내야지."
"치고 올라가는 겁니까?"
흥분된 눈으로 원을 바라보는 쌍식이.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청을 멸하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때를 정하는 건 오직 최고 결정권자인 사장님의 권한이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진짜 멸하고 싶었다.
심양에서 청나라 놈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물어봤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하지만 언제나 대답은 똑같았다.
"그럼 언제 치시렵니까? 기다리다 죽겠습니다."
"네 나이 이제 열여덟이지?"
"네, 사장님."
"그런데?"
"아닙니다. 말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쌍식아, 나도 바로 청을 치고 싶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단다."
"네, 죄송합니다."
수그러드는 쌍식이.
원은 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덤덤하게 화제를 돌렸다.
"죄송할 게 뭐 있냐. 그나저나 새로운 연구소 건설은 어떻게 돼가느냐?"
"화학 연구소와 전기, 기계, 금속, 무기 연구소는 곧 완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화학 연구소가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해를 넘길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 사고라도 터지면 다 죽는 것이니.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지어야 한다."
"네, 사장님. 제가 수시로 가서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의도만 한 은동리.
곳곳에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생긴 후.
본사 인원도 늘어났고, 연구소 연구원들도 많이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본사와 연구소를 추가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화학 연구소를 은동리에 지을 수는 없었다.
생화학이란 살아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 내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반응을 연구하는 일이다.
곰팡이든 세균이든 아니면 바이러스든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작은 실수로도 퍼질 수 있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못해 참혹할 것이 뻔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원은 은동리 서쪽 산속에 생화학 연구소를 짓도록 했다.
건물 외부를 콘크리트로 방벽을 쌓고, 내부도 유리 벽으로 막아 3중으로 안전 구역을 분리했다.
주변에 철책과 철조망을 쳐 외부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러다 보니 크지 않는 생화학 연구소 공사가 다른 곳보다 오래 걸렸다.
"공사가 늦어지더라도 괜찮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 거라. 그러다가 부실이라도 나면 더 큰 일 난다."
"네, 사장님.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가 있는 대원들에게서 들어 온 소식은 없느냐?"
원은 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은 특별한 일은 없다고 합니다. 참, 정명수 그놈 고생 좀 하나 봅니다. 가진 재산 다 빼앗기고 아직도 갇혀있다고 합니다."
"그래? 잘됐구나."
"바로 죽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멋대로 조선 군관을 죽인 청나라 사신을 처단하러 갈 때, 쌍식이가 많이 아쉬워했다.
정명수를 끌고 와 직접 때려죽이겠다고 설쳤던 게 쌍식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명수를 바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인생의 비참함을 처절히 맛보게 한 후에 응징해도 되니까.
아무튼 어설픈 모사였지만, 잘 처리된 것으로 보였다.
음모와 잔머리에 도가 튼 놈에게는 차라리 어설픈 게 더 잘 먹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나간 후 원은 발코니로 나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괄만 아니었어도. 아니지 x선비들이 문제였지."
문식이가 말해준 청나라의 역사를 떠올리던 원.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한마디로 병신 집합체지. 시발!"
욕지거리를 내뱉고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원은 소리를 빽빽 질렀다.
본사 건물 주변에 있던 직원들.
원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사장님이 힘드시구나, 고생이 많으시구나 하며 동정했다.
사장님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도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거나 운동을 하면서 힘을 뺐다.
그래야 속이 풀리고 계속 연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여진족에게 당하냐.'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12세기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차지한 금나라.
기마 민족 특성상 빠르게 세를 늘렸지만, 거기까지였다.
경제력과 인구 문제가 있었기에 남송을 치지 못하고 끝내 몽골군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런 역사를 가진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래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다.
원은 불타는 금요일 저녁 문식이와 소주를 마시며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청나라군의 기본 단위인 니루 알지?'
'당연히 알지. 대체 역사 독자 중에 모르는 사람도 있냐? 화살을 뜻하는 거잖아.'
'누르하치가 만들었다는 것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 아니었어?'
'있기는 했지만, 전투 조직은 아니었지.'
1601년 누르하치는 니루라는 수렵 조직을 전투 부대로 만들었다.
처음엔 사냥을 위해서 조직한 성인 남성 10명 정도였던 니루.
누르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기마 민족 특성상 성인 남자는 모두 군인이나 다름없는 여진족.
누르하치가 통합하면서 여진이란 말 대신 만주라는 말만 쓰게 했다.
'누르하치가 대단한 건 포로를 전부 노비로 만들지 않았다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 팔기에 포함시켰지. 시발 그런데 조선은 뭐냐? 자국민을 노비로 만들어 착취하다니. 그런 경우는 세계 역사에도 없었잖아.'
'드물긴 했지만 있긴 했어. 그런데 노비가 많으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망했냐?'
'그래 바로 망했으니 역사에 나오지 않는 거야.'
'와, 그럼 조선은 대단한 거네. 전 국민 중 반 가까이 노비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500년을 버티다니.'
'결국은 망했잖아.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비율은 정확하지 않아.'
문식이의 말에 의하면, 세금은 물론 노역과 병역 또한 면제인 노비의 수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노비문서가 있다지만 관노가 아닌 이상 파악이 어렵다는 거다.
또한 조선의 노비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래도 노비는 노비 아니야?'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지. 조선의 노비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복잡하네.'
아무튼 누르하치는 포로로 잡은 병사들을 흡수해 니루의 수를 늘렸다.
그랬기에 인구 1백만 명도 되지 않았던 후금이 백 배가 넘는 명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고 청나라를 세우고 한족을 지배했던 거다.
'너 후금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거 알아?'
'후금이 청나라 아니었어?'
'후금은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나라고, 청나라는 1636년 몽골인 원나라를 복속하고 옥새를 얻어 칭제건원하며 홍타이지가 세운 나라야. 청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가 1644년이니 차이가 크게 나지.'
'그랬구나.'
한국사 선생님인 문식이가 의기양양하며 소주잔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 원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했다.
'누르하치가 대륙을 지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아냐?'
'그래?'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대륙을 지배할 마음이 꿈에도 없었다.
누르하치가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며 명나라에 선전포고할 때만 해도 여진족을 통일하는 것만 희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몽골족을 흡수하여 힘이 강해진 청나라는 진짜 명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통합된 여진족과 몽골족은 기마 민족 특성상 더욱 강력해졌다.
청나라 하면 팔기(八旗).
팔기는 바로 통합의 상징이었다.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과 민족을 통합하면서 팔기라는 이름으로 독자성을 인정하는 부대를 만들었다.
'팔기 안에도 구분이 있었던 건 알지?'
'그거야 알지 만주, 몽골, 한인 팔기가 있었잖아.'
하나의 팔기 아래는 각기 다른 팔기가 있었다.
여진족으로 구성된 원조 만주팔기.
몽골족으로 구성된 몽골팔기.
한족들로 구성한 한인팔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하나 더 있었어.'
'뭔데?'
'조선팔기 들어봤냐?'
'처음 듣는데? 조선인도 팔기였던 거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공격에 선봉을 섰던 니루가 바로 조선팔기였다.'
'그래?'
조총부대였던 조선팔기.
어찌 된 일인지 조선을 치는 데 앞장섰다.
'조선팔기는 처음부터 청나라에 투항한 병사들이 아니었어. 조선의 서북 변방을 수호하던 병사들이었는데, '사르후전투'와 '이괄의 난'으로 복잡하게 얽힌 시대 상황에서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앞잡이가 된 거야. 슬픈 역사지.'
'그랬구나.'
매우 우수한 조총부대로 구성된 조선 팔기군.
북경을 칠 때도 앞장섰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괄의 난만 아니었다면, 조선은 후금에 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청이 명을 정복하지도 못했을 거야. 청나라라는 말은 역사에 흔적도 없었을 거고.'
'이괄이 x새끼네.'
'이괄 잘못만이 아니야. 병신 같은 인조와 x선비들 모두가 환장 파티를 한 거야. 덕분에 누르하치가 천운을 얻었지. 식량난으로 망해가던 후금에 힘을 실어준 거거든. 아무튼 이자성의 난과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후금은 조선을 굴복시키고 명을 멸망시키지 못했을 거야.'
'결국 인조와 x선비들이 문제였구나.'
'그렇지. 인조가 이괄을 내쳤거나 x선비들이 이간질만 하지 않았다면, 이괄이 미친 짓을 할 수 있었겠어? 이괄의 난 때 1만이나 되는 정병이 남하했어. 그 병력을 잡으려고 얼마나 많은 잡졸과 백성들이 동원됐겠냐. 완전 조선을 말아먹은 거지.'
'슬픈 역사네.'
'어쩌면 누르하치가 진짜 지구작가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러지 않고서야 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있겠어?'
생각에서 깨어난 원.
'나도 주인공이야. 아니라고 해도 주인공이 될 거야.'
"시발!"
* * *
봉황성(鳳凰城)
한때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으로 가는 요충지이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곳 중 하나였던 봉황성은 오골성(烏骨城)이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팔기 아래 한기를 맡은 구사 어전 슈무루.
잘란 어전 에제이를 보며 강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틀림없이 조선전력공사의 경비대라고 했느냐?"
"네, 구사 어전. 몇 번이나 물어 확인했습니다."
"병력은 천여 명 정도 되고?"
"네, 그곳을 지키는 병력인데 다른 곳에 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흠."
눈을 지그시 감은 슈무루.
깊은 침음을 내뱉었다.
에제이가 가지고 온 플라스틱 제품과 조선의 동전.
아무리 다시 봐도 탐이 났다.
'버일러에게 알려야 하나? 아니면···.'
끓어오르는 욕망 속에 복잡해진 슈무루는 눈을 뜨고 물었다.
"우리가 칠 수 있을까?'
"힘들지 않겠습니까? 전부 조총병에 정예로 보였는데."
"많아 봐야 한 이삼천 명 되지 않겠느냐? 상단의 경비병이라는데."
"하지만···."
"제대로 된 성도 없다는데 대포를 끌고 가면 될 것도 같은데···."
"그러다 패전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흠···."
슈무루는 선 듯 결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정예 기병이라고 해도 7,500명으로 3천의 조총병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기와 합세하면 어떻겠느냐?"
"버일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벌이다간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숙고해주십시오. 구사 어전."
묵던이라 불리는 요동반도.
청나라의 발원지인 심양이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왕족 중의 왕족인 누르하치의 직계들이 많이 기거하고 있었다.
슈무루가 아무리 구사 어전이라고 하지만, 패전이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절대 가볍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슈무루는 위에 보고하면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 별로 없었기에 욕심이 났다.
슈무루는 에제이가 가져온 물품을 다시 살폈다.
"참으로 곱구나."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 보고 놀랐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네, 구사 어전. 조선전력공사가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이번에 만든 것은 너무 신기합니다."
물결처럼 색이 번진 그릇을 손에 준 슈무루.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혼자 먹을 것인지.
나눠 먹을 것인지.
아니면 위에 보고하고 쪼끔 먹을 것인지.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누렇게 빛나는 작고 동그란 것.
숨겨져 있는 탐욕을 끌어 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