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7화 (17/275)

17. 포석(1)

명나라 16대 황제 숭정제.

의심 마귀에 씌어 절대 망할 수 없을 것 같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짐이 나라를 망치는 군주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라를 망치는 신하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한 말인데, 개소리다.

연유(周延儒), 온체인(溫體仁), 양사창(楊嗣昌) 등 간신들을 등용한 자가 바로 숭정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환생한 제갈량 소리를 듣던 원숭환(袁崇煥)은 물론이고 노상승(盧象昇), 손승종(孫承宗), 부종룡(傅宗龍), 손부정(孫傅庭) 등 능력 있는 신하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 등 성을 지키던 장수들.

명나라 최정예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환관, 간신들의 모함이 두려운 나머지 청나라에 투신했다.

숭정제가 죽인 총독만 7명.

갈아치운 재상만 50명.

이러니 변방의 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숭정제가 죽게 생기자 자신이 등용한 간신들을 비방하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숭정제는 후세에 동정을 받았다.

비교적 평도 좋았는데 나름대로 망가진 명나라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꾸로 칼을 든 명나라 장수들.

청나라 팔기군의 일원이 되어 숭정제를 자살시키고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에게 향했다.

어느 나라나 변방을 지키는 병사는 정예이다.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정예 병사가 사라졌지만, 명나라는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었다.

물론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치는데 선봉에 선 조선팔기군도 있다.

하지만 최고의 조총수라 칭하는 조선팔기군은 자진해서 청나라에 투신한 건 아니라고 한다.

어쨌거나 자신들이 선택한 삶.그래서 원은 경비대원들에게 말했다.

'그들과 만나더라도 비난도 동정도 하지 마라. 적이면 그냥 죽여라.'

아무튼 청나라에 투신한 명나라군과 조선팔기군은 만주팔기의 깃발 아래 앞장서서 이자성이 차지한 북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남명 황제 영력제 주유랑.

그동안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양자강 남쪽을 넘어 서쪽까지 쳐들어온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영력제는 본거지도 없이 이곳저곳 수도 없이 도망 다녔다.

하지만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조선전력공사에 보내준 수석총으로 무장한 남명의 잡졸들.

청나라 맹군에게 이기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도망가던 병사들이 최신 수석총이 손에 쥐어지자 자신감을 얻었다.

웬만큼 비가 와도 불발 없이 잘 쏴지는 총.

흉악하게 달려드는 청나라군을 무참히 쓰러트렸다.

남명의 병사들은 서양에서 온 총이 최고라며 승리를 환호했다.

대륙 서남쪽까지 밀린 남명.

다시 동북쪽으로 밀고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청나라군이 사납다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남명군.

연전연승이 시작됐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청나라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데다 최신 수석총으로 무장한 남명 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나라군은 양자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대로 북경까지 진격하는 것도 가능할 거로 보이는데."

"그거야 황제께서 정하실 문제입니다. 하지만 원손 마마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을 운운하는 걸 보니 책망하는 것 아닌가.

"무례하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조선에서 원손이 보냈다는 사신은 굽힘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거야 상황이 변했으니 먼저 청을 치는 게 낫지 않겠나?"

"원하신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포도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뒤에는 황제라 칭하는 반란군도 있습니다."

"크흠."

이곳저곳 도망 다니다 보니 변변한 대포 하나 없었다.

또한 각지에서 명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가짜 황제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그런 상황에서 도강하여 청을 친다는 건.

어렵게 잡은 승기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또한 수석총이 있다지만, 양자강을 넘어가시면 보급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거야 상해 위쪽으로 보급품을 보내주면 되지 않겠나."

"그 말씀은 우리 보고 양자강 이북을 포기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원하는 이유는 양자강 이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닥치거라!"

벌떡 일어난 영력제.

화가 나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속국인 조선에서 그것도 왕도 아닌 왕손의 사신이 명심하라니.

당장 사신을 쳐 죽이고 싶었지만, 현실을 파악할 수 있기에 큰 숨을 몇 번이나 내 쉬었다.

슬그머니 자리에 앉은 영력제.

머리를 짚고 고심에 잠겼다.

한번 격전이 치러지면 엄청나게 총알과 화약을 소비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화약과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제 생각으로는 원손 마마께서 계획하신 대로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을 고착시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만약에 진격하다가 당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크흠."

한참을 고민하던 영력제.

사신의 말이 틀린 것이 없기에 심음을 내뱉었다.

지금 비록 몰아붙이고 있지만, 단 한 번만 실수해도 회복할 수 없어 보였다.

가지고 있는 총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추가 병력을 모집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기를 잃은 군에 들어올 병사는 없으니, 결과는 뻔하다.

숭정제처럼 남명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길뿐.

"지금은 반란군을 퇴치하고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폐하."

말을 마친 사신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흐음. 알겠네. 이만 나가보게나."

말없이 영력제에게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한 사신.

돌아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개경상사의 사장이 된 송상의 대방.

대방의 아들 중 명나라 말에 능하고 야무진 이가 있었다.

원은 그를 소개받아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소인 박문식 원손 마마를 뵙습니다.'

문식이가 아닌지 의심해 봤지만, 아니었다.

대방의 서자로 태어난 박문식.

형들에 치어 가진 포부를 펼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원을 만난 박문식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매력을 선보였다.

박문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원은 그를 데리고 백령도로 갔다.

'마마, 도대체 이건···.'

조선을 단 한 번에 뒤집어 버릴만한 1만 명 넘는 엄청난 군세.

어린 청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정예나 다름없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따로 있었다.

뒤에서 장전하고, 끝에는 날카로운 칼이 달린 총.

듣지도 본적도 없는 새로운 총으로 경비대는 무장하고 있었다.

시범으로 보여 준 사격은 더욱 놀라웠다.

동그랗고 길쭉한 새끼손가락만 한 것을 단번에 꽂아 넣고 뭔가를 끼더니 바로 발사했다.

'경고하는데, 입을 함부로 놀리면, 네놈 일가는 물론 송방 자체가 사라질 줄 알아라.'

살벌한 말을 하면서도 무표정한 원손.

그 모습을 바라본 눈치가 빠른 박문식.

바로 그 자리에 엎드렸다.

'소인, 마마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짧은 순간 대세를 파악한 박문식.

원손이 보유한 경비대면 뭐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박문식은 조선전력공사의 사신이 되었다.

아무튼 박문식은 남명을 수시로 오가며 자신의 꿈을 향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마차 안.

박문식은 걱정되는 게 있었다.

원손께서 대충 만들어 보냈다는 수석총.

서양에서 수입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바로 스프링과 마찰되는 표면에 있었다.

강하고 느슨해지지 않는 스프링.

격발 시 부싯돌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친 표면.

부싯돌을 확실하게 갈아버렸다.

'마마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리 좋은 총을 넘기신 건지 모르겠군.'

물론 조선전력공사의 경비대는 더 좋은 총으로 무장되어있었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이 쉬 사라지지 않았다.

대륙은 조선과 비교해 인구가 15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다.

백령도에서 본 뒤로 탄환을 넣는 후장식 총.

마마께서 조1 소총이라 불렀다.

종이 탄피와 뇌관 통을 별도로 사용하기에 훨씬 좋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마가 가지고 있는 힘을 알기에.

"생각이 있으시겠지."

이제 8살이 된 원손 마마.

그에게 있어 충성을 맹세한 군주이자 자신의 꿈을 이뤄준 분이시다.

만난 지 단 하루 만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그럴 만큼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믿고 기다려야 해.'

그것 말고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8살에 1만 명이 넘는 대군을 거느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섬기기에는 차고도 넘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남명의 황제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다.

원손 마마와 1만이 넘는 경비대가 있기에 무섭지 않았다.

박문식은 보았다.

백령도까지 가는 잘 닦여진 길과 흰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철로 만든 탑과 통들.

거기에 덩치가 거대한 돼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닭.

수많은 소는 물론 처음 보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소까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목동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머리를 짧게 친 아낙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박문식은 옹진반도와 백령도가 과연 조선 땅인가 싶었다.

"철탑과 철통에서 소총과 화약을 만들어 낸다고 하셨지."

극히 일부만 보고도 입이 벌어져 놀란 자신에게 원손께서 빙긋 웃더니 했던 말이다.

처음 박문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라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도 원손께서는 뭔가를 기다리셨다.

옹진십팔동인들의 호위 속에서.

'이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천연덕스럽게 원손께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귓속에 맴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큰 힘을 원하시는 건가?’

숙소에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박문식.

창가에 앉아 차를 들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원손이 세우신 조선전력공사.

단순히 종이와 연필, 은거울을 파는 상단이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힘으로 뭉쳐진 최강의 군사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박문식은 자신이 꿈꿨던 것을 벌써 이루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 황제를 대면하고 인정을 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단에서 태어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시 새로운 꿈을 꾸어야겠다."

비서 실장인 쌍식이란 분이 쇠막대기나 다름없다는 수석총.

그 총만으로도 양자강을 넘어 쳐들어온 청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조1 소총.

그것 또한 쌍식님의 표정을 보니 별로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신무기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마마라면 조2 소총이란 것도 만들어 놓은 게 틀림없어.'

추운 조선과 다르게 선선한 남명의 날씨.

박문식은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새로운 꿈을 꾸기로 목표를 재설정했다.

* * *

인조 26년(1648) 3월 4일.

봉림세자는 모화관에서 청나라 사신을 영접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대청을 위하는 길인데 고생이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외다."

"역시 대인이십니다. 그럼, 쉬시고 내일 전하를 뵙도록 하시지요."

"알겠소."

돌아서서 나가는 봉림세자.

역관 정명수(鄭命壽)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그걸 본 정명수.

뭘 째려보냐는 듯 인상을 쓰더니 사신을 따라갔다.

다음날 희정당(熙政堂)에서 인조를 만난 청나라 사신.

"대신들을 모두 불러주십시오."

"왜 그러는가?"

"모두 모아 놓고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나에게 말하면 안 되나?"

"오면 말하겠습니다."

서둘러 희정당으로 들어 온 영의정과 판서들.

사신을 대신하여 정명수가 입을 열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소현(昭顯)의 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속담에 아버지는 뼈이고 어머니는 공석(空石)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머니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그러자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이 나서서 말했다.

"폐빈 강 씨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함께 모역한 일이 발각되어 사약을 마시고 모두 죽었습니다. 세 아이의 유모들 또한 모의에 참여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세 아이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멀리 제주도로 방축(放逐) 시켰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마마를 앓다가 죽었습니다."

말을 들은 정명수는 자신이 사신이나 된 마냥 크게 소리를 쳤다.

"어찌하여 대청나라에 말도 하지 않고 처치했습니까?"

"아버지와 형제들이 역모한 사실이 이미 밝혀졌는데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보시오! 대감. 그것은 대청나라에서 판단할 일이외다. 감히···."

조선의 왕인 인조 앞에서 조선의 백성이었던 정명수가 설치자 대신들을 분한 마음에 치를 떨었다.

서로 격한 말이 오가자 그때서야 인조가 나섰다.

"그만들 하거라. 당연히 알려야 했는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제야 정명수가 빙긋 웃더니.

"전하의 말씀이 매우 온당합니다. 조정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이들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내 알아서 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라."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봉림세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들 원의 말을 떠올렸다.

'참으십시오. 아버지. 그들을 멸할 힘을 비축하기 전까지는 참으셔야 합니다.'

굳게 감은 봉림세자의 눈에서 분노을 가득 담은 눈빛이 흘러내렸다.

'내 언젠가 네놈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반드시! 멸하겠다.'

울룩불룩한 봉림세자의 어깨와 등 근육이 분을 참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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