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16화 (16/275)

16. 발전(5)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규식이.

손에 든 것을 원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사장님."

"그래?!"

원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양쪽에 구리 선이 붙은 물건을 받아들고 살폈다.

"충분히 테스트해 보았느냐?"

"네, 사장님.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실험해 봤습니다."

규식이는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원에게 줬다.

종이를 펴본 원.

눈이 가늘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하다, 규식아. 해냈구나."

"아닙니다. 전 혼자 해낸 것이 아닙니다. 모두 고생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 모두 고생 많았다. 모두 다 정말 장하다."

아직 추운 겨울인데도 뛰어오느라 땀을 흘린 규석이.

원의 말에 뿌듯한지 세상 환하게 미소 지었다.

"축하해. 규식아."

"규식이 해냈구나. 축하한다."

"고마워."

옆에 있던 미순이와 동식이도 함께 기뻐했다.

펼쳐진 종이 위에 그려진.

일정한 간격으로 된 터널 모양으로 연결된 선.

⌒⌒⌒⌒⌒⌒⌒⌒

전압계에 연결된 흑심이 그려낸 정류파였다.

교류에서 직류로 변환시키는 반도체 정류자를 드디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동안 단결정 실리콘을 수도 없이 만들어 테스트했다.

연구원들은 측정할 만한 장비가 없기에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직접 교류 전기에 물려 테스트했기에 수도 없이 타버리거나 폭발하는 경험을 했다.

안전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순물 때문이었다.

순도가 높은 단결정 실리콘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만 있었다면 간단한 일인데.

없었기에 정류자, 즉 다이오드를 만들어 실험하면서 끝없는 개고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타거나 폭발하지 않고 이렇게 정류파를 그려내는 반도체를 만들어 냈다.

"이럴 게 아니다. 잔치를 해야겠다. 어서 가서 모두에게 알려라. 저녁에 파티한다고."

"사장님, 그런데 파티가 뭔 뜻입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원의 입에서 나온 파티라는 말.

옆에 있던 쌍식이가 물었다.

원은 쌍식이를 한번 째려보고.

"즐거운 잔치라는 뜻이다."

"아, 아주 큰 잔치를 말씀하시는 거 군요."

"너는 바로 가서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네, 사장님."

원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연신 주먹을 줬다 폈다.

'이젠 끝났어.'

드디어 반도체 소자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마이크도 스피커도 미리 만들어 놓았지만, 소리를 증폭하는 앰프가 없기에 한 곳에 처박아 놓았다.

그런데 다이오드에 이어서 트랜지스터까지 만들어 내면.

'선동이 가능하지.'

백령도에 있는 경비대에서 대단한 입담을 가진 이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해경 응원대의 응원 대장이었다.

쪽수가 육경의 반의반도 안 되는 해경.

그런데도 해경 응원 대장은 일사불란하게 응원전을 펼쳤다.

그걸 기억한 원은 그를 불러 만났다.

단번에 반한 원은 그에게 선식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조선전력공사에서 '식'자나 '순'자 돌림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바로 작명 센스가 없는 원이 지어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선식이는 천부적인 만담꾼이었다.

말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선식이.

앞으로 조선전력공사의 괴벨스가 될 것이다.

*

"아, 거기 계신 이쁜 처자. 나와보세요."

선식이가 연구소 식당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누군가를 가리켰다.

"네, 네. 맞습니다. 본인이 이쁜 줄 아는군요."

"""하하하."""

얼굴이 빨개진 처자는 동료들에게 떠밀려 단상으로 올라갔다.

식당에 모인 수백 명의 연구원들.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선식이의 만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본사 5층 발코니.

원은 잔치가 벌어진 연구소 식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생과 다르게 높은 위치.

그것도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외로웠다.

하지만, 원은 딴생각하느라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아, 시발. 뭐가 있어야 사고팔지.'

다품종소량생산이라면 몰라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팔 물건도 살 사람도 없었다.

곧 있으면 용산에 물류 창고가 완성된다.

그곳에 채워 넣은 쌀은 지금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원은 한양 분점을 지으면서 여러 각도로 구상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돈을 쓰게 만드는 것.

'세금도 안 내는 놈들 주머니 좀 털어야 하는데.'

일반 백성들과 달리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과 지주들.

뭐라 할 이유는 없었다.

'조세 제도가 개판이니. 더구나 왕실부터 왕족까지 모두 한통속일 줄이야.'

따져 봐야 누워서 침 뱉기다.

조서원의 조사에 의하면.

공납은 물론 방납까지 왕실과 왕족은 물론 군부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김육이 아무리 대동법을 외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자신에게 잘해줘서 그리 생각한 건 아니었다.

파고들어 가보니 조선의 왕이라는 게 엿가락처럼 힘이 없었다.

두 번의 왜란으로 망가져 버린 조선.

이괄의 난으로 조선에 남은 마지막 정예가 사라져 버렸다.

모병제인 조선의 정규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고, 그조차 개판이었다.

원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조선을 손안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은 원치 않았다.

'빌어먹을 x선비들하고 입씨름하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지. 그나저나 촉박한데.'

한양 분점 앞 장터에 큰 건물을 줄줄이 지어 놓았다.

물론 직접 운영하지 않고 상단에 임대했다.

상단에서 팔 물품은 개관과 함께 상단들이 알아서 준비하기로 했으니 신경 쓸 일은 없다.

하지만 손님을 끌 만한 획기적인 상품이 필요했다.

"결국은 비눈가?"

밤하늘을 올려다본 원.

별이 쏟아질 것같이 맑았다.

그런데 으스스하니 떨렸다.

"시발, 좀나 춥네. 에구 추워라."

두툼한 옷을 입고 고심에 잠겨 몰랐는데, 아직 한 겨울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양반과 지주가 아니면 대부분 가난했다.

그래서 어떤 물품을 팔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원은 양반과 지주만을 위한 비누를 만들어 팔 생각이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기에 비누 따위를 팔고자 양반과 지주를 찾아다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비누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있는데도 만들지 않았다.

단지 필요한 양만 조금씩 만들어 쓰고 있었다.

백령도는 물론 옹진반도에서 닭을 튀기고 남은 폐유.

엄청나게 많았다.

디젤 엔진을 개발하면 쓸 생각으로 쟁여 놓은 것이다.

'어쩔 수 없군. 비누를 만들어서 싸게 팔아야지. 글리세린도 얻고.'

아무리 생각해도 비누만큼 백성들에게 필요한 획기적인 물품이 없었다.

* * *

인조 26년(1648) 2월 24일.

청인(淸人)을 위한 참(站)을 홍제원(弘濟院)에 설치했다.

이로 인해 주변 마을 백성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사신이 오가면서 기거할 곳인데, 백성들이 부역해야 했기 때문이다.

"참말인 거야?"

"그럼, 내가 밥 먹고 헛소리나 하는 사람인가?"

"자넨 밥이라도 먹고 사는가? 난 쌀 구경 한지가 언젠지 모르겠네."

"에이, 나도 그냥 하는 말이여. 요즘에 쌀밥 먹는 사람이 어딨다고."

춘궁기(春窮期)가 빨리 시작되었다.

작년 농사가 여의치 않아 묵은 곡식(穀食)은 다 떨어졌다.

5월은 돼야 보리를 수확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다 죽게 생겼다.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은 소나무 속껍질을 벗긴 송기로 떡을 해서 끼니를 잇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낼부터 개관한다고 하니 같이 가세."

"근데 이자가 1할이라니, 거짓말 아니지."

"아따, 속고만 살았는가. 참말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가."

"속고만 살았으니까 그렇지."

양반과 지주들은 춘궁기에 묵은 쌀, 그것도 모래나 쌀겨가 섞인 것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5할을 붙여서 햅쌀로 받았다.

그런데 조선전력공사 용산 분점에 있는 조선은행에서 1할만 받고 돈을 빌려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돈은 바로 도정이 된 쌀로 교환해 준다고 하니 속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천지 그런 장사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이번에도 속는다면···.

생각만 해도 암담했다.

사대부네 양반이네 하는 것들도 입만 열면 사기를 치는 세상.

비록 부처님이나 다름없다는 원손이 운영하는 조선전력공사지만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배고 고파 우는 자식들을 본 두 사람은 새벽같이 일어나 용산으로 향했다.

용산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게 줄이 이동했다.

하지만 줄은 길게 길게 계속 늘어갔다.

다행히 새벽부터 서둘렀던 두 사람.

호패(號牌)를 보여 주자 바로 큰 동전 9개와 작은 동전 10개를 받았다.

"이거 금 아니겠지."

"에이, 설마 금 일라고."

황금처럼 반짝이는 손톱만 한 작은 동전.

앞면에는 벼 이삭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1'이란 것과 '조선은행'이란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게 뭔 표시 단가?"

"아까 말 못 들었나. 일, 하나라는 뜻이고 밑에 문자는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이라 하는 것이고 뜻은 조선은행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못 들을 수도 있제. 나는 이거 하나면 쌀을 한 되 준다는 말은 들었네."

한 되면 1.6kg이다.

성인 남자의 한 끼는 336g.

성인 여자는 240g.

아이는 96g.

따라서 한 되면 아이 3~4 있는 가족이 하루 동안 충분히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모두 100문이니, 100일 동안은 걱정 없겠네."

"무슨 소릴 그렇게 하는가? 100일이라니, 150일은 먹을 수 있지."

"아껴 먹으면 그럴 수 있지만···."

"아껴 먹지 않아도 되네. 벼가 아니라 도정한 쌀로 준다고 했단 말일세."

"참말인가 보네."

"에이! 어서 가서 쌀로 바꾸세."

하지만 둘은 모두 쌀로 바꾸지 않았다.

아무리 조선 시대 사람이 힘이 좋다고 하지만, 혼자서 160kg의 쌀을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새벽에 일어나 이곳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의심했다.

혹시나 또 속는 건 아닌지.

그런데 하는 짓을 보니 절대 속일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1달 먹을 쌀 30되만 사고 나머지 동전은 소중하게 챙겼다.

"그런데 저것은 뭣이단가?"

"으응, 뭐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이 빌린 돈으로 전부 쌀을 사지 않았다.

남은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렇고 반질반질한 것을 많이 사 갔다.

"자! 자! 비누라는 신물입니다. 하나에 단돈 1문. 찌든 빨래는 물론 십 년 묵은 때까지 말끔하게 씻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빨리 서두르세요. 오늘 밤 사랑받으시려면 비누는 꼭 사가셔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상단 입구마다 바람잡이들이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

조선에 새로운 통화 기준이 확립되었다.

정미한 쌀 기준 1되 = 1문.

추수기인 가을이고 춘궁기인 봄이고 가격은 같다고 한다.

또한 벼로 주는 것이 아닌 바로 도정한 쌀로 준다고 했다.

단, 조선전력공사 한양 분점에서만 가능하고,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이 아니면 팔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사재기하려고 달려갔지만, 동전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비누라는 것을 사고 싶어 동전을 구하려고 가지고 있는 쌀을 팔려고 했지만.

"이거 묵은 쌀에 도정이 안 된 것이라 반 쳐줍니다."

"이거 썩어서 안 됩니다."

"오매, 모래가 섞여 있네. 에끼 여보시오, 곤장 맞기 전에 썩 꺼지시오."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동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까지 빌려준다는 조선은행.

빌린 돈으로 바로 도정한 쌀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각지의 백성들은 어서 빨리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자기 고장에 지어지기를 학수고대했다.

원은 용산 분점을 지을 때 열식기관도 설치했다.

발전한 전기로 현미기(玄米機, rice huller)를 돌려 쌀을 도정해서 팔도록 했다.

매일같이 밥때만 되면 절구통에 벼를 넣고 도정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누도 싸게 팔았다.

1문만 받고 비누를 팔고 있지만, 손해 보고 파는 것은 아니었다.

도정 후 남은 쌀겨는 비누를 만드는 좋은 재료였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동전은 총 6종류였다.

황동화로 된 1문, 10문, 100문,

은화인 1원, 10원.

금화인 100원.

추가로 5문, 20문, 50문, 500문 동전도 만들 예정이다.

아무튼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백문이불여일원'이란 말을 하며 1원짜리 은화를 최고로 쳤다.

10원짜리 동전인 은화와 100원짜리 금화는 구경 조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이 고액 동전을 만든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기축 통화가 되기 위해서였다.

단단한 18k(75%) 금으로 만든 100원짜리 금화.

앞면에 조선을 중심으로 그려진 세계지도가 있고, 뒷면에는 '100'이란 아라비아 숫자와 '조선은행'이란 한글 그리고 '1648'이라는 년도가 새겨져 있다.

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지도를 그려 놓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앞으로 영토분쟁이 발생하면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며.

조선의 100원짜리 금화.

정교하고 아름답기에 세계의 표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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