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발전(3)
인조 25년(1647) 11월.
암행어사 성이성(成以性)과 이해창이 인조의 명을 받고 암행에 나섰다.
인조로부터 별도의 명을 추가로 받은 성이성.조그마한 조선말에 탄 어린 여인을 보고 물었다.
"저곳이 네가 살았던 고을이 맞느냐?"
"네, 어사 나으리 틀림없습니다."
"어허, 말조심하거라. 누가 들을까 염려되는구나."
"죄송합니다. 나으리."
춘향전의 실제 주인공인 성이성.
강직한 간관이자 청백리이다.
춘향전에 나온 '금준미주 천인혈'은 성이성이 실제로 지은 한시라고 한다,
성이성은 인조 17년(1639)에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호남(湖南) 지역을 5년간 순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다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지역은 호남이었다.
경상도에서 태어났기에 경상도로 보내지 않았다.동향으로 보내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이성은 빨리 일은 마무리 짓고 본래 업무인 암행을 하고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옆에는 곱게 단장한 어린 여인이 누군가를 보더니 다급한 듯 말을 꺼냈다.
"나으리 저, 저분이 제 어미 옵니다."
"그래?"
"틀림없습니다. 나으리."
"어서 가보거라."
말에서 내린 어린 여인은 득달같이 달려가 허름한 몰골을 한 아낙을 껴안았다.
"어머니!"
"누, 누십니까?"
곱게 단장한 지체 높은 여인이 자신을 껴안자 놀란 봉순네는 이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어머니. 저여요 봉순이. 저란 말이에요."
깜짝 놀란 봉순이 어머니는 눈을 깜빡이며 여인을 다시 보았다.
"오디, 차말로 봉순이구나. 호랑이에게 물려간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구나. 아이고, 봉순아!"
"어머니!"
모녀는 서로 껴안고 울어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큰딸 봉순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고 말했지만, 봉순이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얼마나 똑똑한 아이인데.'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아니 그러면 절대 안 된다고 자기부정을 하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딸 봉순이가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곱게 당장하고 나타났다.
"어디 보자."
안겨있는 여인을 밀치고 다시 봐도 틀림없이 자기 배로 낳은 딸 봉순이가 맞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냐. 아니 됐다. 살아 돌아왔으면 됐다. 이제 어디 가지 말고 꼭 붙어있거라."
"네, 어머니."
다시 껴안고 꺽꺽 울어대는 봉순이와 어머니.
자식은 많았지만, 어찌 처음 난 큰딸을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땅에 쏟아진 낱알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추수가 끝난 후 한동안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다시 떨어진 양식.
동네 김 진사댁에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쌀을 얻어 왔다.
"이걸 어쩌냐. 너 밥해 먹여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제가 돈 많이 벌어왔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글썽거리는 눈으로 방긋 웃는 봉순이.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어머니에게 주었다.
"이게 뭣이냐?"
"열어 보세요."
주머니를 열어 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은덩이와 황금처럼 빛나는 작은 동전들이 가득했다.
"이걸 어디서 났느냐? 설마!"
순간 봉순이 어머니 머릿속에 오만가지 상상력이 발휘됐다.
설마 집 나간 딸자식이···.
그런데.
"어머니 저 조선전력공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조선전력공사?"
"네, 어머니."
조선팔도는 물론 주변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조선전력공사.
어미 또한 들어봤다.
신동을 넘어 천재라 불리는 원손이 주인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상단.
그런 곳에서 사라진 딸이 일한다니.
"차말이지?"
"그럼요."
밝게 웃는 딸.
차림새를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구원? 그거시···."
"그런 것 있어요. 그나저나 어머니. 저랑 같이 조선전력공사에 가서 살아요."
"그래도 되냐?"
봉순이 어머니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선전력공사는 인세에 천당 같은 곳이라는 걸.
하지만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요. 사장님께서 허락하셨어요."
"그, 그럼···."
"네, 아버지와 동생들도 모두 데리고 가도 돼요."
"차말로 그래도 되냐?"
"네, 어머니."
다시 껴안고 울부짖는 모녀.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울다 웃다 반복했다.
"어험!"
옆에서 지켜보던 성이성이 헛기침을 했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됐다. 너는 저 사람들과 함께 정리하고 서둘러 올라가거라. 눈 내리기 전에."
"네, 나으리. 고맙습니다."
수학 천재 미순이가 된 봉순이는 땅에 엎드려 성이성에게 큰절을 올렸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어험, 됐다. 난 이만 가보겠다."
"살펴 가십시오. 나으리."
원은 인조에게 은덩이를 왕창 안겨주고 부탁했다.
보내준 고아 중에 부모가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의 부모를 찾아 주라는.
은덩이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일말의 가족 간의 정이 남아있었는지 몰라도 인조는 바로 암행어사를 붙여줬다.
그것도 능력이 검증된 성이성을.
미순이는 진작 부모를 찾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새로 맡은 일을 끝내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원이 나선 것이다.
특경대원들만 붙여줘도 되는데, 공권력을 동원 한 것이다.
원은 미순이네 사정이 어떤지 모른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탐관오리나 지주가 패악질을 부리면, 패 죽일 수도 없다.
괜히 말썽을 일으키기도 싫었다.
그래서 인조에게 상납하러 가는 길에 부탁한 것이다.
아무튼 미순이가 살았던 고을 사또와 김 진사는 난데없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청백리인 성이성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강철이 쏟아지자 옹진반도는 놀랍도록 변신하고 있었다.
현대의 석유화학 단지와 비교하면 어림도 없지만, 17세기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발달했다.
옹진반도 바닷가에 거대한 증류탑도 생겼다.
그 옆에도 계속 또 다른 탑이 지어지고 있었다.
실험이 끝나고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면 생산 공정을 설계한다.
이때 도움을 준 이가 바로 수학 천재 미순이었다.편미분 방정식이나 열 방정식 등 근사해를 구하는 방법인 유한요소법(有限要素法, Finite Element Mmethod)은 유체가 흐르는 파이프에서 일어날 문제점을 예측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순이의 지원을 받은 공정 설계팀은 거침없이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이미 은동 저수지 수력 발전 댐을 계산한 미순이의 실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캘리퍼스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자칭 공돌이들.
설계도에 맞춰 다양한 금속을 만들고 가공했다.
완성된 부품은 바로 현장으로 옮겨 하나씩 이어 붙였다.
이미 완성된 시설에서는 흑색화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몇 가지 공정을 빼고 생산됐다.
외부에 팔아먹을 흑색화약이었기 때문이다.
흑색화약을 동글게 만들어 흑연 코팅을 하면 습기에 강해서 훨씬 오래 가고 화력도 좋다.
하지만 팔 것이라 그 과정을 생략했다.
옹진반도로 들어오는 곳은 모두 철조망이 이중으로 처져있다.
그 사이에는 진도에서 가져온 개들이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물론 짐승도 접근하지 않았다.
원은 잘 알고 있었다.
진돗개는 경찰견이 될 수는 없지만, 경비견으로서는 최고라는 걸.
'그냥 풀어 놓으면 되지.'
구역을 지키는 본능이 강한 진돗개.
알아서 옹진반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은동리 본사 5층.
원은 완성된 조1 소총을 보며 흐뭇해했다.
잘 먹고 틈나는 대로 농구를 해서 그런지 원은 무럭무럭 자랐다.
벌써 키가 4척 가까이 됐다.
하지만 아직 무거운 총을 들기에는 힘이 들었다.
"샤프스 1859, 좋은 총이지."
원은 무슨 총을 먼저 만들까 고민하다가 샤프스 1859를 최종 선택했다.
황동 탄피로 된 탄약을 무진장 만들고 있지만, 그건 아무나 줄 건 아니었다.
항상 몇 단계 앞을 생각하고 있는 원.
언제든지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범위에서 총을 풀 작정이다.
옹진반도에 있는 동전 제조 공장.
한 곳에서 만들어진 탄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퍼커션 캡이나 탄피에 쓸 뇌관도 벌써 만들어 쓰고 있다.
원은 뇌홍을 건너뛰었다.
수은은 구하기도 힘들고 독성도 강하고 환경도 망치기에 쓰고 싶지 않았다.
또한 질산과 수은 그리고 에탄올로 만든 뇌홍은 너무 위험했다.
'내 손이 소중하듯 다른 이의 손도 소중하지.'
뇌홍은 보관하기에도 지랄 같았고 시간이 지나면 위력이 약해진다.
그보다 생산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손모가지가 날아갔다.
'위험하고 거지 같은 걸 왜 만들어. 훨씬 편하고 좋은 게 있는데.'
그래서 원은 바로 암스트롱 믹스처(armstrong mixture), 간단히 줄여서 '아믹'이라 부르는 뇌관용 폭약을 만들어 쓰기로 했다.
'이것도 오래 쓸건 아니지.'
그래도 아믹의 재료인 적린은 따로 쓸 곳이 많았다.
위험 2등급 물질인 적린은 안전한 암적색 분말이다.
성냥을 만들 때 쓰는 적린.
불꽃놀이뿐만 아니라 의약, 농약, 유기물을 합성하는 데도 사용한다.
조1 소총을 한쪽으로 치운 원.
일어서며 읊조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까부는 건 거기까지다."
어차피 퍼커션 캡을 사용하는 총은 외부용이다.
정예나 다름없는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는 바로 황동 탄피로 만든 탄약과 소총을 지급할 계획이다.
그래야 안심하고 대원들을 북쪽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태어난 원의 계획은 어디까지일까.
원만이 알뿐이다.
* * *
만력제의 일곱째 아들인 주상영(朱常瀛)
그의 아들인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 주유랑(朱由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이 험악해졌다.
"감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말이 안 될 건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양자강 이북은 청이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감히 속국이!"
"말이 심하십니다."
"이런!"
조선에서 왔다는 사신의 말에 화가 치민 영력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선의 왕도 아닌 원손이 보냈다는 사신.
명나라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폴란드 출신 미하우 보임(Michał Piotr Boym)이 데리고 온 자이다.
보임에게 현실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서양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가톨릭을 국교로 하겠다고 말했지만, 너무 멀어서 파견하지 않을 거란 말만 했다.
그런 보임이 뜬금없이 조선의 원손이 보낸 사신을 소개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신을 만났다.
그런데 사신의 말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양자강 이북은 조선의 땅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는 열불이 났지만, 영력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명나라는 망해 버렸고, 남명이 세워졌지만, 서로 전통이라 말하며 황제를 칭하는 자가 수시로 나타났다.
자신은 만력제의 손자이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이지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깃했다.
영력제는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아버지가 죽고 계왕(桂王)의 지위를 세습한 둘째 형도 죽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이후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6년 황제에 올랐다.
아무튼 지금까지 개고생하면서 남명의 황제로 있다.
그런데, 청나라를 치겠다니.
그리고 무기를 지원하겠다니.
믿을 수 없는, 듣기 좋은 말만 꺼냈다.
종이와 연필 그리고 은거울을 만든 조선의 원손.
이곳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주유랑도 원손에 대해 궁금했기에 예수회의 신부인 보임에게 자주 물었다.
대단한 갑부이자 추후 조선의 왕이 될 자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런 어린애가 청나라를 치겠다니 믿기 힘들었다.
'쌀을 주는 만큼 최신 수석총과 화약을 주겠습니다. 참 부싯돌은 직접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청을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이 양자강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면 됩니다. 청은 우리가 칠 것이고, 청이 멸망하면 양자강 북쪽은 조선의 땅입니다. 원손께서는 남명이 망하는 걸 원치 않으시니 무리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의 원손이 보낸 사신이 한 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청을 멸망시키겠다는 건지.
하지만 사신이 가지고 온 수석총을 보니 가능할 것 같았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서양에서 만든 것보다 정교하고 강력해 보였다.
게다가 가격도 쌌다.
하지만 선뜻 응 할 수는 없었다.
주유랑이 알기로는 조선이란 나라는 낙후된 곳이다.
게다가 청나라가 두 번이나 쳐들어가 작살을 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최신 수석총을 원하는 만큼 팔겠다니.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진짜 사실이라면.'
너무나 좋은 조건이다.
어차피 나라 이름을 남명이라 했다.
그러니 양자강 남쪽만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또한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좋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기다리면 청나라와 조선이 싸울 때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 대명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지.'
비록 여기저기서 치이는 남명의 황제가 되었지만, 주유량도 꿈은 있었다.
다시 중원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드는 꿈.
그 생각이 들자 주유랑은 찌그러진 인상을 폈다.
"다시 말해 보겠는가?"
훨씬 너그러워진 말투에 사신은 방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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