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발전(1)
"그냥은 안 됩니다. 대감께서도 아시겠지만, 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곧 있으면 환갑이 될 나이인데도 김육은 간절한 표정으로 원을 바라보았다.
인조 14년(1637)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세금 감면과 대동법 시행을 건의했던 김육.
수차(水車) 보급에도 힘썼다.
그런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원은 거절하기 난처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챙길 건 챙겨야 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두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화폐 발행권은 조선전력공사에 있다고 명시해주십시오."
"바라는 바이옵니다."
원은 순간 멈칫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밀고 땅기는 게 없이 바로 승낙하다니.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원은 김육이 만나자는 서편을 받고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떠올렸다.
민간 은행인 미국의 연방준비은행,
전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힘센 곳은 바로 연준이었다.
그래서 원은 결심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화폐를 발행하고 모든 통화를 관리하기로.
그런데, 바라는 바라니.
'이건 뭐지?'
미국 연준 같이 화폐 발행권을 손에 넣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너무 쉽게 받아들이자 딴생각이 들었다.
사실 화폐를 발행하고 관리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1423년 세종대왕 때 조선통보(朝鮮通寶)를 발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을 중단했다.
구리로 만든 조선통보(朝鮮通寶).
원재료인 구리도 부족했지만, 화폐의 내재가치가 갈수록 떨어져서 재정적으로 손해를 봤다.
세종대왕께서는 열악한 조선의 화폐 경제를 활성화하려고 했지만,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그 시절 조선은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였다.
화폐 사용 경험 부족과 불신 그리고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선통보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은도 거상이나 양반, 지주를 빼고는 백성들은 보지도 알 수도 없었다.
은반지 하나만 있으면 큰 살림 밑천이 된다는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군은 은화를 많이 가지고 왔다.
고려 천자라고 불리는 만력제가 그냥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땅, 그것도 북쪽은 은화로 물건 매매가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약탈이 시작된 것이었다.
명나라 장수는 조선의 사정을 몰랐고, 백성들은 은의 가치를 몰랐다.
설사 은의 가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당장 먹을 것을 주고 은을 받아 봐야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은 문식이가 소주를 넘기며 한탄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명한 선비 몇 명만 있었더라면···.’
선조 31년(1598) 동전을 다시 주조 하려 했지만, 은자(銀子)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은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그들만이 쓰고 있는 것이지만.
다시 인조 11년(1633) 김신국과 김육이 건의하여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했으나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중단되었다.
아무튼 김육은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과 화폐유통을 꾸준히 제기한 참선비였다.
원이 멍하니 말이 없자 김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다른 조건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힘든 일이라 잠시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제가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손해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 합니다. 하지만 이 조선 땅에서 각하만큼 재물이 있는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나서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연속되는 부탁.
난처했지만,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원.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대감, 동전을 주조하려면, 구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광산 개발권도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그곳에서 금과 은이 나온다면, 전부 나라에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광물이 나오면 모두 조선전력공사의 소유로 하겠습니다. 이것만 약정해주시면 바로 동전을 주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나라에 바치는 금과 은.
천재지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원의 것이다.
또한 조선 땅에서 금과 은을 캐봐야 종이 팔아 번 돈에 비하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 조선전력공사에서 생산하는 종이는 품질도 좋아졌고 생산량도 엄청나게 늘었다.
오스만 제국은 물론 서양까지 수출되고 있는 조선전력공사의 종이와 연필, 은거울.
세계 시장을 점령해 나가고 있다.
오직 예수회만 받아들였기에 조선전력공사를 뜻하는 ‘번개’ 표시를 보고도 어디에서 온 것인 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최고라고 인정했다.
예수회 또한 함대 단위로 움직이며 자신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행적을 노출하지 않았고, 무리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오직 백령도와 대륙과 동남아만 오가며 중계무역만 했던 것이다.
이 또한 원이 아담 샬과 연락해 요청한 것이었다.
‘괜히 희망봉 넘어가려다가 뒈질 수가 있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아무튼 쏟아져 들어오는 은덩이만 보면 한숨을 쉬는 원이기에 금과 은을 똥 취급할 수 있던 것이다.
"또한, 효과적인 화폐유통을 위해 전국 곳곳에 쌀 보관 창고를 짓고 조선전력공사에서 직접 관리하겠습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김육.
"감사합니다. 각하. 그게 바로 제가 원하던 것입니다."
김육은 원의 작은 손을 넙죽 움켜주며 눈물을 흘렸다.
'젠장, 뭐야? 하는 말마다 OK니. 그리고 울긴 왜 울어.'
분명 자신이 원하던 계획이었는데, 너무 쉽게 받아들이자 왠지 속는 느낌이 드는 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 * *
원은 화폐 발행 문제로 김육과 자주 만났다.
그리고 추가로 지폐 발행권을 요구했다.
물론 책임지고 금이나 은 또는 쌀로 바꿔 준다는 조건이 붙었다.
'나중에 지폐도 발행해야 하는데 동전만 만들 수는 없지.'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기에 원은 계약서에 주화와 지폐를 분리해서 명시했다.
대부분 알지 못하지만, 미국은 주화와 지폐 발행권이 재무부와 연준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연준이 지폐 발행을 거부하고 통화량을 늘리지 않으면 미국 정부에서 1억 달러짜리 주화를 찍어내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하면 기축통화인 달러가 개판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동안 조선은 명나라나 청나라 사신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광산을 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이 뿌린 은화가 너무 많아서 이제 광산을 개발한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원이 원하는 대로 통과되었다.
주화와 지폐 독점 발행권 그리고 광산 개발권 모두 어찌 된 일인지 그 누구의 반대도 없었다.
x선비들이 따지려고 해도 주화 만드는 일은 손해가 날 짓이었고, 광산을 개발해봐야 금과 은을 빼면 돈 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며칠이 지난 후.
원은 주화와 지폐 발생권 계약서를 손에 넣었다.
또한 김육이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고, 모두가 찬성했는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백성을 위해 일하는 참선비는 적었지만, 자신의 배 따지만 채우려는 x선비들이 많아서였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손해만 봤던 주화 발행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나라에서 할 일을 조선전력공사에서 대신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원만 알고 있었다.
* * *
사실 원이 동전을 만든다고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은 김육을 찾아가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승낙했기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다.
원의 목적은 단지 화폐 발행권이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마음 놓고 탄피를 찍어내는 것이었다.
구리와 아연, 비율이 7:3인 황동으로 만들어진 탄피.
앞으로 청나라는 물론 대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단숨에 섬멸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동전을 만들거나 탄피를 만드는 일.
기본은 같다.
단지 탄피는 동전처럼 동그랗게 만들어진 황동을 여러 번 프레스로 눌러서 길게 늘이는 작업이 추가된다.
그러기에 탄피 만드는 작업은 동전보다 몇 배나 많은 프레스 장비가 있어야만 한다.
또한 자동화는 필수이다.
'그걸 언제 수동으로 일일이 만들어.'
현대에도 머신건에 쓰이는 개틀링식(Gatling-Type) 기관총의 원리.
원은 이 원리를 응용하여 자동으로 탄피 만드는 데 이용할 생각이다.
연구소에 있는 천재 중 총과 메커니즘(Mechanism)을 좋아하는 건순이와 건식이.
원은 둘에게 원리를 설명해 주고 탄피 자동화 생산 장비 설계를 맡겼다.
'별거 아니지. 개틀링 기관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만 알면 앉아서 떡 먹기지.'
건순이가 설계한 볼트, 너트, 못, 리벳 자동 생산 장비.
건식이가 설계한 다양한 스프링 자동 생산 장비.
모두 개틀링식 기관총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원통이나 원판에 공정에 맞게 홈을 파 놓고 회전을 시키면, 파인 홈의 위치에 따라 기계들이 작동하기에 원리만 알면 어려운 것이 없다.
옹진반도 곳곳에 있는 공장에서는 이미 발전기와 모터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한 지식이 대물림되고 있다.
천재들은 새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교육하고, 그 아이들은 이후의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플레밍의 오른손과 왼손 법칙.
전류를 한쪽으로만 흐르게 하는 정류 작용.
권선 비에 따른 변압 방법.
발전기의 회전에 따른 전류 제어 등.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에게는 기본 상식이다.
점점 늘어가는 연구소 연구원들.
원은 전생에 자신이 다니던 전자통신연구소처럼 수천 명의 연구원으로 가득 채울 생각이다.
이제는 저항, 콘덴서, 정류자(다이오드), 인덕터, 트랜지스터는 물론 전자회로 로직까지 가르치고 있다.
원은 가르치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천재들에게 있어 전자회로 구성은 장난감 블럭 쌓기 마냥 재밌는 놀이였다.
그래서인지 원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이 툭툭 튀어나왔다.
아무튼 연구원들 모두 놀라운 속도로 지식을 쌓고 있다.
원을 존경하기에 원이 한 말은 무조건 믿었고, 어렸기에 거부감없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
21세기 사람들과 따져도 공학과 과학에 있어서는 지적 수준을 논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린 연구원들이 압도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논리나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진짜 천재들이 연구소에 많았기 때문이다.
천재 중에 AND, OR, NOT, NAND, NOR 같은 디지털 논리 회로 구성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아이가 있었다.
실물이 없어 직접 실험해 보지 못하지만, 문제를 내면 그 아이는 척척 회로를 구성해 냈다.
그래서 원은 그 아이를 논식이라 불렀다.
'어쩌면 논식이가 최초로 컴퓨터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
트랜지스터만 있으면 논리회로를 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조합하면 연산을 하는 컴퓨터가 된다.
'진공관으로도 만들었는데. 못할 게 뭐야.'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 알려진 에니악.
18,000개의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진공관을 건너뛸 생각인 원.
어쩌면 오디오 광들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은동리에 있는 연구소에는 어린 천재들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
아무튼.
원은 바로 프레스 금형을 떠서 동전을 찍어내기로 했다.
한반도에는 구리보다 아연이 더 많다.
그래서 현대의 10원짜리와 같은 65:35의 비율로 구리와 아연으로 된 황동화로 만들 생각이다.
열처리한 프레스 금형으로 찍어내기에 주물로 뜬 조선통보나 상평통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또한 누가 봐도 황금처럼 빛나기에 값비싸 보일 것이다.
원은 은화와 금화도 만들어 세계 곳곳에 뿌릴 생각이다.
'지금부터 기축통화국이 될 준비를 해야 해.'
합금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조선전력공사의 동전.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복제는커녕 비슷하게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 * *
아직 반도체의 핵심 재료인 단결정 실리콘을 구성하지 못했다.
단결정 실리콘을 합성할 수 없으니 정류자나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없었다.
만들 수만 있다면 유선과 무선 통신은 물론 더한 것도 가능하다.
원은 성격이 차분하고 끈기 있는 연구원들을 골라 3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단순 노동이나 다름없는 단결정 실리콘 제조에 투입했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서 아직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몰리브덴을 찾아냈으니 시간 싸움이지.'
황해도 해주 동쪽 산에서 발견한 몰리브덴 광산.
광산 개발권이 있기에 바로 캐내기 시작했다.
'특수강을 만들 수 있으니 이제부터 진짜다.'
기원전 9~6세기부터 사용했다고 하는 캘리퍼스.
1542년 포르투갈의 P.누네스가 고안하고 1631년 프랑스의 피에르 베르니(Vernier)가 만들어 냈다.
그래서 버니어 캘리퍼스(Vernier Calipers)라고 부른다.
원은 예수회를 통해 캘리퍼스를 구했다.
그리고 조선전력공사의 공식 치수인 밀(mm)로 변환해서 새로 만들었다.
1/20밀인 0.05mm까지 측정할 수 있는 캘리퍼스.
정밀 가공의 필수품이다.
그래서인지 연구원들은 모두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다녔다.
캘리퍼스를 차고 다니는 조선전력공사 연구소의 연구원들.
자부심이 대단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이제는 공작기계를 운영하는 직원들도 차고 다녔다.
스스로 자신들을 공돌이라 불렀다.
원이 한 말을 듣고 좋은 줄 알고 따라 한 것이다.
캘리퍼스는 연구원과 공돌이들의 상징이 되었다.
아직 정밀 가공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오직 열처리로만 강화한 날을 쓰기에 가공하는 중에 자주 부러졌다.
'몰리브덴 합금으로 제작하면 그럴 일이 없지.'
특수강까지 손에 넣은 원.
이제 본격적으로 생산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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