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준비(5)
조선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대명사였던 안동 김씨.
안동 김씨인 김자점(金自點)은 숱한 정치적 압박에도 인조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조와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최근에 영의정까지 되었다.
원은 이 둘이 소현세자의 죽음과 틀림없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찌질이 인조가 개차반 김자점을 감싸고 돌 이유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숙원 조 씨지.'
조 씨의 치마폭에서 사족을 못 쓰는 인조.
조 씨와 사돈인 김자점.
뭔가 있어 보였다.
문식이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만 빼고는 역알못인 원은 그저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예상만 할 뿐이다.
원은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쌍년이를 수장으로 정보조직을 구축했다.
'술 쳐드시면 입이 가벼워지지.'
그래서 전국 곳곳에 기방이나 주막을 사들이고 있다.
또한 길목인 장터 근처에 여관을 지으라고 지시해 놓았다.
"나가봐라."
"네, 사장님. 그런데 쌍년이 동생들은···?"
이재에 능한 쌍년이와 달리 동생들은 그리 똑똑하지 못했다.
그래도 약속된 보상을 해야 하기에 영재 교육에 포함을 시켰다.
하지만 하루 만에 두 손을 들었다.
"조서원에 두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래도 쌍년이를 닮아 그쪽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새 조(鳥)자에 쥐 서(鼠)자를 따서 만든 조서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지.'
조선전력공사의 정보조직이었다.
* * *
인조가 총애하는 숙원 조 씨 덕분에 간땡이가 커질 대로 커진 김자점.
사돈인 조 씨와 짜고 장렬왕후와 영풍군 부인 신 씨를 저주했다는 모함을 하고 세자빈 강 씨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인조가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친청파(親淸派)의 우두머리인 김자점의 사랑방.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대감, 사랑방이 참 따듯하고 좋습니다. 어디서 좋은 숯을 구했나 봅니다."
"자네들을 위해서 내가 신경 좀 썼네."
청나라 앞잡이나 다름없는 이들.
서슴없이 조선의 왕이자 자신들을 지켜주는 인조까지 씹으며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마셨다.
"그런데 대감. 송시열, 송준길, 김집, 윤휴 이놈들을 그냥 두어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게. 아직은 때가 아니야."
"혹시 정명수와···."
"어허! 말조심하게.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야.'
역관 정명수.
여진말에 능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갖 횡포를 부린 자이다.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만으로 병조좌량 변호길을 몽둥이로 폭행했으니 그의 만행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저나 따뜻해서 그런지 나른하니 좋습니다. 좀 더운데 문 좀 열겠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찬 바람이 사랑방을 급격히 식혔기 때문이다.
"어휴 춥습니다. 이러다 고뿔에라도 걸리면 고생입니다."
"불을 더 지피라 하게."
삼래는 투덜거리며 아궁이에 번개 숯을 쏟아부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추워서 움직이기도 싫은데, 오밤중에 불을 때라니.
"염병할 문은 왜 열고 지랄이야."
잠깐 밖에 있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아무래도 고뿔에 걸린 것 같았다.
몸이 아파 심술이 난 삼래.
특별할 때만 쓰는 비싸게 주고 산 번개 숯을 왕창 집어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번개 숯.
비싸서 그런지 화력이 정말 좋았다.
삼래는 혹시나 아궁이가 세찬 바람에 엉망이 될까 봐 문을 꼭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지독한 감기로 인해 몸져누운 삼래가 시끄러운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간 삼래는 놀라 죽는 줄만 알았다.
의금부 관졸들이 사랑방을 에워싸고 흉흉한 눈빛으로 주변을 지켰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곡소리.
뭔지 몰라도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 * *
1647년(인조 25년) 2월.
청(淸)나라 호부(戶部)에서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쟁기, 가래, 코뚜레 등, 농기구가 부족하다며 압력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친청파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한 것도 추궁했다.
하지만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한 그들이 강빈의 저주를 받아 동시에 뒈졌다고 수군거렸다.
그래서인지 쫄보 인조도 몸을 사렸다.
'별걸 다 시키네.'
원손이 천한 쌍것들이나 하는 공업을 한다고 못마땅해하는 몇몇 x선비들이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양반의 후손이라고 지방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농기구를 바치라고 하자, 신동을 넘어서 천재라고 알려진 원에게 좋은 방법이 없는지 물어보는 게 좋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한마디로 엿을 먹이자는 수작이었다.
'알고 그런 걸까?'
철저히 말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보안을 빈틈없이 했지만 모를 일이다.
'철광석을 사들이는 게 문제였나 보네.'
아무튼 인조의 명을 받은 원은 청에 보낼 농기구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건 줄 수 없지.'
임진왜란 때 많이 잡혀갔다고 하지만, 아직 도자기를 굽는 장인들이 많았다.
그들을 시켜 용광로를 만들게 했다.
생각 같아서는 현대식 용광로(고로)를 만들고 싶었지만, 전기로를 만드는 게 훨씬 쉬웠다.
'흑연으로 전기 아크로를 만드는 게 만 배는 쉽지.'
끝없이 철물을 뱉어내는 현대식 용광로는 진짜 최첨단 중 최첨단 기술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잘못 관리하면 폭발해버리지.'
엄청나게 크고, 높고, 내부 압력도 높은 현대식 용광로.
용광로를 끄고 내부를 식히는 과정에서 외부 기압과 비슷해져 공기가 유입되면 큰일이 난다.
안에 적체되어있는 가스로 인해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밀봉 기술과 질소 가스 주입 기술 등 수 많은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불가능해."
발전기와 모터를 개발했다고 하지만, 고온(800도 이상)을 초고압으로 고르게 불어 넣을 수 있는 기술도 있어야 했다.
아무튼 현대식 용광로는 포기하고 대신 전통 방식을 개선한 용광로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철광석도 사들이고 목탄도 비축해 놓았다.
'한반도에 역청탄 광산이 없으니···.'
원은 품질 좋은 목탄, 즉 숯으로 대신 하기로 했다.
'사실 코크스보다 목탄이 더 좋지.'
인이나 황 성분이 적은 목탄이 철을 녹이는데 최고였지만, 철의 수요가 많아지자 나무를 구할 수가 없어 역청탄에서 코크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코크스 대신 미분탄을 써도 되긴 하는데···'
역청탄으로 만든 코크스가 없어도 0.5밀 이하로 잘게 부순 미분탄을 사용하면 철을 녹이는 제련이 가능하다.
'그건 안되지.'
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분탄은 탈황 장비나 집진 장치 기술이 없는 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산성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지.'
추가로 발생하는 질소 산화물(NOx)은 농사는커녕 숨도 쉴 수 없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일단 선철 상태로 주물을 떠서 줘야겠군.'
공기를 강제로 불어 넣어 탄소화합물인 코크스나 목탄을 철에 섞여 녹이면 탄탄한 선철, 즉 무쇠가 된다.
'무쇠 팔~! 무쇠 다리~! 개소리지.'
무쇠는 탄소 함량이 많아 단단하지만 잘 부러진다.
그래서 화승총 같은 전장식 총을 만들 때는 가공하기 좋은 연철로 만들어야 한다.
연철을 만드는 것도 지랄 같았다.
용광로가 아닌 고전 방식인 노에서 스펀지처럼 생긴 철을 만들고, 죽어라 두드리고 접고 또 두드려서 연철을 만든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소량 생산만 가능한 퍼들법뿐이다.
대장간 하면 떠오르는 담금질(Quenching).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 칼은 수백 번 담금질 해서 만든다고? 개도 웃겠다.'
30번 넘게 접어서 담금질하면, 탄소가 모두 빠져나가 엿가락 같은 순철에 가까워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이 된다.
아무튼 청나라에 보낼 농기구는 선철을 주물에 부어서 대충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
'쓰다가 부러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하지만.
'강철을 만들어야 하는데.'
질 좋은 강철을 만들어야 선반, 밀링, 프레스 같은 공작기계를 만들 수 있다.
공작기계.
정밀 산업의 기본이자 꽃이다.
'그것만 만들어 내면 니들이 다 죽었어!'
화약이야 전기가 있으니 흑연이든 무연이든 뇌홍이든 아니면 다이너마이트든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
효율 좋은 교류발전기를 만들어 낸다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에 그때부터는 게임 셋이다.
현대와 같이 화약 따위나 비료를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문식이 때문에 만드는 방법을 수도 없이 검토했고, 또 설명했던 것이라 공정 순서를 잊어버리기도 힘들었다.
'왜 이리 할 일이 많냐!'
영재들을 모아 교육하고, 그중에서도 최고만을 뽑아 차세대 과학 천재들을 육성 중이다.
하지만 기다려야만 했다.
돈도 있고 인력도 충분한데 아직은 대놓고 일을 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조는 의심과 질투가 많은 인물이라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꾹 참고 있어야 했다.
'2년 남았나?'
설 명절이라고 찾아뵙더니 인조는 뭘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은 멀쩡했다.
김자점 일당이 몰살당하고 나서 아프다고 들었지만,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제련(製鍊)은 해결됐으니 이젠 제강(製鋼)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탄소가 많은 선철에서 탄소를 빼서 강철을 만드는 제강법.
'평로로 바로 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전로부터 시작해?'
여기서 전로는 전기 전(電)자가 아니다.
선철을 강철로 만든다는 의미인 전로(轉爐, Converter)이다.
평로제강과 효율 좋은 LD 전로 제강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고압으로 산소를 담을 수 있는 용기부터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베서머법(Bessemer process)뿐이 없군.'
지금 가진 기술로 가능한 방법은 1855년에 헨리 베서머가 특허를 취득한 베서머 전로를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아니야 하는 김에 토머스 전로로 바로 가자. 부산물로 생성되는 인산염(燐酸鹽, Phosphate)은 화약을 만들거나 비료로 써도 되고.'
원은 베서머법을 이용한 토머스 전로를 쓰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베서머 전로의 문제점은 인과 황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질이 좋지 않은 강철이 나온다.
하지만 염기성 공법인 토머스 전로를 사용하면 그런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한반도에 토머스 전로를 만들 백운석(白雲石, Dolomite)이 풍부했다.
'백운석은 쓸 데가 많아.'
백운석은 절연체는 물론 유리 제조, 비료, 다리미에서 열을 차단하는 내화재로도 쓸 수 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잘 계시는지 모르겠네."
세자로 책봉된 봉림세자는 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몸이 나빠진 인조가 항시 옆에 두고 정사를 돌보라 했기 때문이다.
장수를 능가하는 몸을 가진 봉림세자.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이유로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원이 본 아버지는 진심이었다.
'힘이 없어서 현실과 타협하신 거지.'
봉림세자가 얼마나 청나라를 멸하고 싶었으면 매일 같이 언월도나 철퇴를 가지고 무예를 닦았을까.
영조 때 효종이 쓴 언월도와 철퇴가 저승전에 남아있었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힘이 세다고 자부하는 무사들이 모두 들지도 못했다고 한다.
원은 아버지의 안전에 대해서 염려조차 하지 않았다.
봉림세자 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심양에 있을 때부터 호위였던 용만(龍灣)팔장사들이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에게 있어 걱정되는 건 인조였다.
혹시나 원 역사와 다르게 장수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더 보내줘야 하나?'
사치와 방종이 취미 생활인 인조에게 있어 손자인 원이 보내는 은덩이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싸장님!"
"저놈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난 쌍식이가 뭔가를 들고 왔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뭔데 그래?"
"이걸 보십시오."
무명베에 소중하게 감싸서 들고 온 것.
바로 거울이었다.
어두운 실내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잘생긴 어린아이.
원은 기분이 좋은 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역시.'
그런대로 잘생긴 인조.
아주 아주 잘생긴 봉림세자.
그 아들인 원은 전생과 다르게 미소년이었다.
아쉬웠다.
전생에 이 얼굴을 가졌다면, 날마다 소개팅이 쏟아졌을 건데.
문식이와 선두를 다퉜던 얼굴 덕분에 단골 식당 이모들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한참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었는데, 쌍식이의 걸걸한 목소리가 원을 깨웠다.
"쓸 만 하구나."
"그럼 대방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라."
원은 조선팔도에 내로라하는 상단을 모두 손안에 넣었다.
독자적인 생산품으로 슈퍼 갑이 된 조선전력공사.
최근에 금필 제조법을 공개했다.
'만들어 봐야 돈도 안 되고 질질 세거나 툭하면 막히기나 하는 것을 직접 만들 필요는 없지. 볼펜이면 몰라도.'
그래도 돈이 되기에 상단들은 판매가의 5푼(5%)을 기술비로 바치고 만들어서 팔고 있다.
그러니 원이 말하면 상단의 대방들은 번개같이 달려왔다.
공기 중 78%가 질소이다.
철을 촉매로 사용해서 공기를 고온 고압으로 통과시켜 암모니아를 만들어 내는 하버-보슈법(Haber-Bosch process).
질산을 만드는 데 필수 선행 공정이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백금이 필요하지만, 아직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은거울반응에 사용할 질산은암모니아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주석과 수은을 써서 거울을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선명하지도 않고 수은 중독도 문제였다.
'준비가 거의 끝나 가는구나.'
많지는 않지만, 아세틸렌가스와 전기분해로 얻은 산소가 있어서 급한 대로 초고온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흑연 봉을 이용한 전기 아크로가 완성되면, 5천 도 이상 초고온도 문제없었다.
물론 대량 생산은 아직 가능하지 않았다.
'효율 좋은 교류발전기만 만들면 되는데···.'
열식기관으로 생산해 내는 전기가 있지만, 외연기관 특성상 강력한 힘을 낼 수 없기에 필요한 만큼 전기를 생산해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증기기관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
'증기 터빈이면 몰라도 쓸데없는 짓이지.'
크기가 큰 증기기관을 만들려면 생각 이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대신 길게 아궁이를 만들어 열식기관을 쭉 연결해서 쓰고 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똘똘한 교류발전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데."
이제 7살이 된 원.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조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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