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준비(2)
1646년(인조 24년) 4월.
찌질이 인조의 악행이 최고조에 달했다.
소현세자가 죽고, 끝내 세자빈 강 씨 또한 사약을 받았다.
"빌어먹어!"
아무리 생각해도 소현세자는 독살당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 개 새끼면 자기도 개라는 소리지. 그러면 나는 개 손잔가?"
아무튼 자칭 개 같은 것이라는 인조가 큰어머니까지 죽였다.
어떻게 해서든 큰어머니인 강빈을 살리고자 했지만, 너무 위험했다.
병신 같은 인조 주변에는 x선비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하는 참 선비들도 있었지만, 미쳐버린 인조의 광기를 감당해 낼 순 없었다.
또한 수시로 뇌물을 주고 있지만, x선비들의 입에서 언제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나올지 몰랐다.
'문식이라면 어댔을까?'
말주변이 없는 자신보다 청산유수와 같은 문식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아마 독살당했겠지.'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괜히 나서다가 나도 뒈질 수 있어. 떠날 때까지 이곳에 짱박혀 있어야겠다.'
앞으로 3년 남았다.
아담 샬과 자주 연락하면서 서양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인조가 언제 죽는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역사와 대충 비슷해.'
문식이는 학생들에게 조선 중기 역사를 가르칠 때 20세기 한국 역사와 대입했다고 한다.
특히 효종이 왕위에 오르고 북진 정책을 펼치는 연도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북괴가 남침한 것은 1950년. 효종이 즉위한 연도는 1649년. 딱 301년 차이야.'
원은 그것을 토대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려봤다.
'60살이 되는 1700년까지 살 수 있으면 충분히 가능해.'
6.25 전쟁 후 폐허나 다름없는 한국이 2000년이 되었을 때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전에 죽더라도 북벌 정도는 충분하지.'
공식이는 무려 1천 명이 넘는 박사들이 있는 대한민국, 아니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최고 기술을 선도하는 전자통신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또한 문식이 때문에 수시로 커피나 간식을 들고 다양한 분야의 박사들을 찾아가 별것을 다 물어봤다.
그 지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다시 태어난 원.
자신 있었다.
'구리와 주석이 없어서 청동기를 건너뛰고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바로 건너간 짐바브웨도 있잖아.'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업자인 아버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명목적으로 원이 있는 곳은 황해도 정촌 흑연 광산과 갈대밭이 널려있는 옹진반도 해안가였다.
하지만, 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원은 황주(黃州) 또는 해주라 불렀던 황해도 옹진반도 한가운데 있는 수대산(秀垈山) 남쪽 기슭에 있었다.
훗날 수대광산과 옹진광산이 있던 이곳을 모두 사들인 원은 금과 은은 물론 구리, 납, 아연까지 있는 광산을 발견하고 캐낼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서 사라져야 구리를 캐낼 건데.'
구리라면 몰라도 금과 은이 나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한다지만, 사람 입이라는 것은 절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입이 무겁고, 없을수록 입이 가볍지.'
그래서 조선전력공사 직원들에게 자존감을 함양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해.'
원은 이제 세자빈이 된 친어머니에게조차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금슬(琴瑟)이 좋아서인지 몰라도 지속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기르다 보니 하나뿐인 아들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작년에 낳았던 딸이 죽었기에 심적 여유도 없었다.
'괜히 엄마가 걱정할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원은 할아버지인 인조면 몰라도 생모인 장 씨를 사랑하는 마음은 끔찍했다.
‘엄마는 정말 보살 같은 분이시지.’
조선왕조 내명부에서 가장 인품이 좋았던 인선왕후 장 씨.
그래서인지 며느리인 명성왕후가 모난 성질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원은 될 수 있으면, 어머니가 걱정할 만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고, 그에 관한 말은 하지도 말라고 아버지에게도 신신당부했다.
이제 세자가 된 봉림대군 또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천재라 불리는 아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서양의 신부이자 천문과 역학에 조예가 깊은 아담 샬을 스승으로 둔 아들.
비록 어리지만, 대견했기에 항상 믿고 의지했다.
봉림세자는 그것 말고는 자신의 꿈인 북벌을 이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이 원하는 일은 모두 지원했다.
물론 아버지인 인조 몰래 말이다.
원은 오직 아담 샬과 소현세자빈 강 씨 그리고 아버지에게만 적당히 필요한 말을 했다.
아담 샬이 적을 둔 예수회는 완벽한 조선전력공사의 거래처가 되었다.
조선 막지와 연필에 대해 독점권을 주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생산품은 아담 샬에게 공급하기도 바빴다.
그만큼 엄청나게 팔렸다.
가격이 아주 싼 조선 막지와 사용이 편리한 연필의 수요는 무지막지했다.
얼마나 심했는지 조선 막지와 연필은 서양에 팔 물량이 전혀 없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주문이 쇄도 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아담 샬의 예수회.
아시아 곳곳에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 아담 샬에게 조선에 함께 가자고 소현세자가 말을 꺼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가장 믿을 만하지. 그래도 조심해야 해.'
아담 샬 덕분에 자본을 축적하게 된 원.
세종 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을 그에게 알려주고 서신으로 주고받으며 보안에 만전을 기했다.
소현세자빈 강 씨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볼모로 심양에 있을 때, 성과급 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사업 감각이 뛰어난 여인.
현대 같았으면 최고의 며느리였겠지만, 자신 보다 잘난 며느리가 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인조로 인해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큰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형들은 잘 챙길게요.'
하지만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 또한 인조에 의해 유배당한 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원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큰아들을 의문사로 죽게 하고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린 인조.
그는 자신의 장손까지 그냥 두지 않았던 거다.
이제 동업자이자 정치적으로도 한 몸이 된 원의 아버지 봉림세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둘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보다 아는 것이 많고 견해가 넓었기에 어린아이지만 봉림세자는 항상 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양에 한번 가봐야겠네.'
이제 원손(元孫)이 된 원은 손바닥만 한 기물을 보며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 간단한 걸 만들 사람도 없는 청나라 놈들이 명을 정복하다니, 역시 무력이 최우선이야.'
원은 조심스럽게 기물을 나무 상자에 넣고 닫았다.
"쌍식아!"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온 쌍식이.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한양에 갈 일이 있으니 준비하거라."
"네, 사장님."
"가는 길에 정촌 공장에도 들릴 거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황해도 정촌에는 연필 만드는 공장이 있고, 지금 있는 옹진반도에는 조선 막지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조선전력공사 옹진 공장.
명목상 청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와 호로자식들이 살아가는 곳이지만, 조선전력공사의 핵심 기지가 될 곳이다.
'x새끼들 지들이 잘못해서 여인들이 끌려갔는데, 화냥년은 뭐고 후레자식은 또 뭐야!'
물론 아직 화냥년이란 욕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청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빗대어서 하는 욕이라는 걸 아는 원은 성질이 났다.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으면 면죄부를 준다고. 무슨 죄를 지었다고 면죄부야.'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원은 사들인 조선 노예 중 원하는 여인과 그 여인의 아이들을 모두 옹진반도 조선 막지 공장으로 보냈다.
막지 생산은 도구를 충분히 준비 했어도 동력이 없는 수공업 특성상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갈대를 가는 맷돌은 소를 이용했지만, 소에게 여물을 줄 사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발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송상(松商)이 소개한 장인의 솜씨가 워낙에 뛰어났기에 아주 적은 출력을 내는 소형 발전기를 만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베어링부터 만들어야 하나.'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다.
아담 샬의 도움으로 구한 감자를 심는 법과 관리하고 수확하는 법은 조선인 노예들을 귀향시키면서 가르쳐 보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남쪽으로 내려가기보다는 북쪽 산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손가락질에 착취당하기보다는 먹고살 것이 있기에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친 것이다.
원은 막지 공장에 있는 호로자식들을 모아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직접 가르쳤다.
똑똑한 아이들을 추려서 더 많은 아이들에게 교육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아이들은 따로 모아 직접 가르치고 있었다.
'이놈들이 잘 자라줘야 할 텐데.'
어찌 보면 이 아이들이 앞으로 원이 생각하는 조선을 만들어 나갈 거다.
그러기에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관리하고 있었다.
'충성은 꿈과 희망도 중요하지만, 일단 배가 불러야지.'
갈대로 만든 조선 막지.
점점 품질이 향상되어 갔다.
흑연으로 만든 조선 연필.
갈수록 생산성이 오르고 있다.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만큼 많이 나갔다.
개성상인(開城商人) 또는 송상이라 불리는 개성(開城)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인들.
원은 그들을 이용해 상품 운송을 맡기고 뇌물도 전달했다.
'뇌물은 정기적으로 조금씩 주는 게 좋아.'
아무리 더러운 일을 겪어도 매달 꽂히는 월급 때문에 참고 다니는 직장.
그처럼 목돈이 아니라 조금씩 매달 보내는 것이 효과가 좋았다.
이미 망해버린 북인은 물론 실권을 잡은 서인 그리고 남인까지 골고루 뿌렸다.
그러기에 x선비들은 원의 행동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을뿐더러 찬양 일색이었다.
'주는 밥이나 처먹고 얌전히 있어라. 짖으면 다음 날은 없을 거다.'
원은 봉림세자를 만날 때마다 말했다.
할아버지인 인조가 죽을 때까지 참고 지내자고.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고 역정을 내며 근육 가득한 팔을 들어 올려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원의 말 한마디에 봉림세자는 뭉친 근육을 풀어야만 했다.
'꿈을 포기하시렵니까? 아버지.'
이미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아버린 봉림세자.
그는 하나밖에 없는 똑똑한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인생의 친구이자 동업자로 인정했다.
봉림세자는 믿고 따랐던 형인 소현세자와도 말이 통하지 않아 다툰 적이 많았다.
하지만 아들이 꺼내는 말은 자신의 귀를 파고들어 와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 아들이 있기에 모든 것을 조심하며 꾹 참고 버틸 수 있었다.
* * *
"몇 종류나 되느냐?"
한양에 가기 전에 들린 정촌 조선 연필 공장.
그곳에서 원은 새로 정한 규격 제품을 보며 물었다.
"단단함과 진하기를 따져 가, 나, 다, 라 4종류와 심의 굵기에 따라 2, 4, 6, 8밀 총 16가지 옵니다."
원은 1/30치를 1밀로 정했다.
밀리미터와 발음이 비슷한 빽빽할 밀(密) 자로 정한 것이다.
'밀이나 밀리미터나 거의 비슷하지.'
연구소에서도 밀리미터라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그냥 밀이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정해 놓고도 아주 친밀했다.
원이 처음 만든 연필은 2/10치, 즉 6밀이었다.
목탄의 특성상 가늘게 만들면 쉽게 부서졌고, 가는 통 또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상 장인들의 솜씨가 뛰어났기에 다양한 크기의 통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흑연과 점토의 비율에 따라 단단함과 진하기를 결정했다.
"그중 어떤 것이 제일 많이 나가느냐?"
"주문이 제일 많은 것은 '4나'이옵니다."
아직 가는 것보다 적당히 단단하고 두툼한 것이 더 잘 팔렸다.
"혹시 모르니 1밀부터 10밀까지 모두 준비해 놓거라."
"네, 사장님."
옆구리에 찰 정도로 조그마한 아이지만, 조선전력공사 직원들은 사장인 원을 부처님 보듯 했다.
나라에서조차 방치하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사람들.
거금을 들여 노예에서 해방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 집까지 마련해 줬다.
거기에 매달 월급이란 명목으로 돈까지 주었으니 부처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서 꺼냈다 간 단단히 혼이 나야 했다.
"항상 '안전 제일' 알지?"
"네, 사장님."
"입을 조심하는 것도 안전 제일에 속한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장님."
구심점.
원은 이들에게 구심점이었다.
만약 원이 잘못된다면 천당이나 다름없는 생활이 다시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원손까지 되어서 한시름 덜었지만, 그래도 걱정을 놓을 순 없었다.
장성해도 쉽게 죽어 나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에 어린아이인 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위생 철저. 알지?"
"네, 사장님. 씻지 않으면 식당은 물론 숙소에 들어갈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원은 조선전력공사에 한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용어를 정했다.
청나라 심양에서 살아왔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으며, 사람을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사투리 같은 다양한 조선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편하지.'
왕손이자 사장인 원.
그가 말하면 모든 것이 표준이 되었다.
* * *
봉림세자와 단둘이 있게 된 원.
상자를 열고 조심스럽게 기물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리 소중히 다루는 것이냐?"
"우리의 미래입니다."
"미래라니?"
"우리의 꿈을 이루어줄 기물입니다. 비록 간단한 구조지만 이것을 발전시키면 저곳을 능히 멸할 수 있습니다."
"그래?!"
다시 한번 기물을 살피던 봉림세자.
흥분했는지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인해 넓은 옷이 팽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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